뭉텅이째 쏟아지는 택배 운송장
여름휴가철 택배 비수기가 지나고, 택배 차량이 분주한 추석 성수기입니다. 요즘 택배기사들은 새벽 5시부터 나와 낮 1시까지 배송물건을 차에 싣습니다. 이른바 '까대기'입니다. 기사 1명이 나르는 물건은 최소 2백 상자. 많아진 물량만큼 고객의 개인정보를 담은 운송장들도 함께 나온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한 4년 차 택배기사는 "운송장이 하루에 200~300장씩 나오는데, 며칠 있으면 차량조수석에 가득 찬다."라고 말했습니다. 갖가지 고객 정보를 담은 택배 기사용 운송장. 하지만, 제대로 폐기하지 않고 멋대로 버려두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악용이 걱정입니다.
사이즈·색깔까지… 기사가 봐도 걱정
밤늦게 배송을 모두 마친 차마다 고객 주소와 연락처가 담긴 운송장 뭉치가 수북합니다.기사들이 취급하는 운송장. 여기 담긴 고객 정보는 꽤 상세합니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는 기본. 인터넷 쇼핑 상품의 경우, 배달되는 물품의 정보도 자세히 쓰여 있습니다. 어떤 신발과 옷을 사는지, 또 사이즈는 얼마인지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한 택배기사는 "속옷 같은 건 품목 정보가 사이즈, 색깔까지 명시돼 있다."라고 했습니다. 성인용품 등 매장에 방문해 구매가 힘든 물품 역시 인터넷 쇼핑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런 민감한 상품 역시 운송장에 그 정보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배송하는 기사들까지도 유출되면 큰일이라고 걱정할 정도입니다.
방치된 운송장, 훔쳐 가기라도 하면
추석 선물 상자에 붙은 운송장을 떼서 버리면 안전하다는 게 상식입니다. 방송기사로도 자주 보도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택배기사용 운송장에서도 정보는 샐 수 있고, 만일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정보는 상세하고 뭉텅이로 유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팀은 택배 배송이 모두 끝난 저녁 시간, 하루 수백 대의 차가 드나드는 인천의 한 택배 집하장에 들어가 봤습니다. 한 눈에도 쓰레기 더미 옆 종이 상자 십여 개가 방치된 모습이 보였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운송장 뭉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지 겉면엔 흙먼지가 쌓였고, 운송장들은 이슬을 맞아 다닥다닥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직원은 한 달은 방치돼 있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운송장엔 이 회사가 올 상반기 동안 인천의 한 자치구에 배송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누군가 통째로 훔쳐 분류하면, 특정 소비자의 택배 이용 패턴까지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운송장엔 경비실 말고 집으로 갖다 달라고 요구하거나, 문 옆 창고 같은 특정 공간에 둬 달라는 요청사항들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기사들은 한 지역을 오래 전담하다 보면, 택배를 받을 때 집에 있는지, 여성만 사는 집인지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알아서 버려… 본사가 관리해야"
택배 이력을 실시간 추적할 수 있을 만큼 편리성은 커지고 있습니다. 택배사 홈페이지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간편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게 운송장입니다. 택배기사는 집하장에서 물건을 받으면, 휴대용 스캐너에 바코드를 입력합니다. 배송이 끝난 뒤엔 자정 전에 역시 똑같이 배송 완료 사실을 입력합니다. 이런 스캐닝으로 택배사 전산 시스템엔 모든 택배 상품의 이동 정보가 기록되고, 이를 토대로 서비스 관리가 가능한 겁니다. 하지만, 배송이 끝난 뒤부터 운송장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됩니다. 배송 완료 증서로서의 효용만 남는데, 고객들이 택배가 분실했다며 항의하지 않는 한 불필요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택배 화물차는 하루 수백 장, 한 달에 1만 장에 육박하는 운송장 차지입니다. 당연히 기사들은 본사의 적극적인 회수 노력이 없는 한 '알아서' 운송장을 폐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7년 차인 한 택배기사는
"배송을 확인한 다음엔 아파트 경비실 쓰레기통이나 분리 수거장 같은데 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부 영업소와 기사들은 과거 본사가 직접 운송장의 회수와 폐기를 책임지고 관리하던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고객정보유출과 관련해선 본사가 그만한 돈을 투자할 이유가 있다"며 불만을 제기할 정도입니다.
개인정보 관리의 외주화
해당 택배사는 영업소와 계약 때마다 벌칙 조항을 통해 운송장 관리를 강제하고, 또 기사 교육을 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 집하장 택배사 관리 직원은 집하장에 운송장을 버리고 자신들에게 보고하지 않은 택배 기사들을 탓했습니다. 택배 업계만큼 '아웃소싱'이 급격하게 진행된 업종도 없습니다. 과거 본사-직원 관계로 물건을 나르던 관행은 사라졌습니다. 현재 생존한 업체들은 본사 아래 지역별 지점이 영업소에 배송을 맡기는 구조. 본사와 영업소는 계약서로 의무와 권리를 명시한 관계이며, 기사 대부분 영업소 소속 비정규직입니다.
배송의 외주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운송장 관리 책임 역시 '하청 업체'인 영업소와 그 소속 기사에게 떠넘기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정보 관리의 외주화'. 택배사든 택배 기사든, 정보 유출의 위험은 고스란히 소비자가 떠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