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체조의 요정' 손연재(19·연세대)가 리듬체조 최강국 러시아를 필두로 한 동유럽 국가의 텃세를 넘어설 수 있을까.
30일(이하 한국시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국제체조연맹(FIG) 리듬체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손연재는 개인종합 예선 6위로 결선에 진출했다.
전날 볼과 후프에 이어 이날 곤봉 종목별 결선에 진출했지만 메달을 하나도 손에 넣지 못했다.
비록 올 시즌 수많은 국제 대회를 치르면서 피로가 쌓이는 바람에 체력적, 심리적 부담이 커져 실수를 여러 번 저지르긴 했지만, 전문가들은 홈그라운드 이점을 입은 우크라이나 선수들과 리듬체조 최강국 러시아 선수들에 비해 손연재의 점수가 조금 낮게 책정된 듯하다고 조심스레 분석했다.
세계 리듬체조계는 올 시즌 국제 심판 선발 시험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드러나 한바탕 홍역을 앓았다.
이번 부정행위는 체조강국인 러시아 등을 포함해 광범위하게 저질러졌으며 관련자만도 6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국제 연맹은 지난달 재시험을 치렀고, 그 결과 200명이 넘던 국제 심판 중 절반이 안되는 81명만이 자격을 유지했다.
40여명이던 러시아 국제 심판은 3명으로 줄었고, 1급 심판 또한 빅토리아 아니키나 한 명만이 남았다.
한국에서는 김지영 경기위원장과 서혜정 기술부위원장이 각각 1급 심판과 2급 심판 자격을 유지했다.
이처럼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으나 세계 리듬체조계를 휘어잡는 이리나 비너르 러시아 리듬체조 협회장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비너르 협회장은 올림픽 2연패에 빛나는 '여제' 예브게니아 카나에바를 키웠고, 카나에바의 뒤를 이을 마르가리타 마문과 야나 쿠드랍체바 등 최고의 선수들을 끊임없이 길러왔다.
물론 단순히 비너르 협회장의 영향력만으로 러시아 리듬체조가 세계 최강이 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는 리듬체조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러시아 선수들은 이르면 2∼3세 때부터 리듬체조를 시작해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갈 때쯤이면 이미 세계 정상급으로 발돋움한다.
선수층도 넓고, 일단 리듬체조를 시작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최고의 연구진들과 함께 자신의 강점을 찾고 작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리듬체조로 성공하고픈 선수들은 대부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고, 손연재 또한 주니어 시절부터 러시아를 오가며 훈련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길러낸 그 방법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다른 국가들은 비너르 협회장과 가까워져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같은 지역의 동유럽 국가들은 좀 더 수월히 러시아의 영역권 안에 들 수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리듬체조 변방국인 한국의 손연재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선 끝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손연재는 러시아 선수들을 비롯해 안나 리자트디노바(우크라이나), 멜리티나 스타니우타(벨라루스) 등 유럽 선수들로 가득한 리듬체조에서 동양인 특유의 매력을 호소하며 강한 인상을 심는 데 성공했다.
계속된 러시아 전지훈련과 러시아 대표팀과 함께하는 크로아티아 지옥 훈련 또한 손연재가 리듬체조 강국의 기술을 배우는 동시에 세계 리듬체조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비록 지금은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들의 '텃세의 벽'에 가로막혀 있으나 손연재가 지속적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 리듬체조를 빛낸다면 그 벽은 서서히 허물어질 것이다.
이연숙 리듬체조 강화위원장은 "리듬체조가 동유럽 쪽이 강하고 같은 지역권이다 보니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며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많은데다가 감정이 중요시되는 종목이다 보니 심판들 또한 자존심이 세고 자아가 강하다"며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놓은 기득권을 한순간에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이런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손연재에 대한 안쓰러움도 드러냈다.
그는 "사람들은 (손)연재에 대한 기대가 커져서 연재가 메달을 못 딴 것에 아쉬워하지만, 어린 나이에 홀로 타지에서 고생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연재는 칭찬받아야 한다"며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최초로 종목별 결선에 진출한 것을 비롯해 연재가 동유럽 국가들이 우세한 리듬체조계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