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상 5줄짜리 범죄가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피고인은 2012년 9월, 집에서 파일공유 사이트에 아동 청소년 이용 음란물을 올려 배포하였다. 간단하죠. 범죄 사실에 적시된 음란물은 파일 1개입니다. 대전지방법원은 최근 피고에게 벌금 1백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판결이 확정되면, 피고는 관할 기관에 신상정보도 제출해야 합니다. 피고는 86년생 대학생입니다. 나이로 미뤄보면, 아마 취업 준비에 여념없는 학번일 것 같습니다.
4문장짜리 범죄도 있습니다. 요약하면, 피고인은 2012년 9월 집에서 파일공유 사이트에 아동 청소년 이용 음란물을 올려 공연히 전시했다. 역시 간략하고, 검찰에 걸린 음란물 파일은 1개입니다. 인천지방법원은 피고에게 벌금 3백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피고는 90년생 청소년입니다. 판결이 확정되면, 이 청소년도 관할 기관에 신상정보를 제출해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같은 혐의로 벌금 2백만 원을 선고받은 84년생 취업 준비생도 있습니다.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 피고들입니다. 아동 청소년 이용 음란물을 전시하거나 배포했다는 혐의입니다. ‘아동 청소년 이용 음란물’은 2013년 5월 현재,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표현물이 등장하는 음란물을 뜻합니다. 아청법 2조5항입니다. ‘인식될 수 있는’이라는 피동형을 써서 객관적인 것 같지, 이건 검사가 청소년으로 인식할 수 있다며 기소하고, 판사는 청소년으로 인식할 수 있다며 유죄 판결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입법 당시부터, 처벌 기준이 주관적이고 애매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86년생 대학생과 90년생 청소년, 84년생 취업 준비생도 법정에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대학생은 성인 여성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으로 연출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습니다. ‘피고 청소년’도 음란물에 나온 여성이 청소년은 아니라고 주장했고, 취업 준비생도 ‘91년생 성인 배우’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판사 3명 모두 출연 배우가 교복을 입었으니, 청소년으로
인식할 수 있다
고 봤습니다. 특히 인천지법의 판사는 출연 배우가 실제 성인으로 알려져 있어도 다르지 않다고 판결했습니다. 교복 입었으면 청소년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게 짧은 기간에 나름 확립된 판례입니다.
줄줄이 유죄가 나오던 와중에 대형 변수가 생겼습니다. 서울 북부지방법원 형사5단독 변민선 판사가 ‘인식될 수 있는 사람’ 조항이 애매하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것입니다. 역시 ‘교복 입은 성인물’ 사건의 재판을 진행하다가, 피고의 위헌심판 신청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러면 해당 재판은 자동 중단됩니다. 2조5항으로 기소된 재판들 모두 일시 정지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일선 법원들이 아청법 재판을 중단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관례상 멈추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헌재 심리를 기다려보겠다는 취지입니다. 헌재가 모든 법원에 통보해주는 것은 아니고, 판사들이 언론 등을 통해 위헌심판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청소년과 취업 준비생 피고는 억울하다며 법원에 항소했는데, 2심 재판들도 일단 중단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입니다.
2조5항의 헌법재판소행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입니다. 아청법 사건을 맡은 한 변호사도 수원지법에 2조5항의 위헌법률심판을 신청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3월 21일 헌재에 직접 헌법소원을 낸 상태입니다. 헌재는 지금 이 사건의 사전 조사를 진행 중인데, 나중에는 북부지법이 낸 위헌법률심판 사건과 합쳐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변호사의 헌법소원보다는 법원의 위헌심판 절차가 더 빠르게, 빠르다고 해봤자 최소한 몇 달 걸리겠지만, 어쨌든 착착 진행될 것 같습니다.
얄미운 것은 국회입니다. 검경은 애매한 아청법을 마구 휘두른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법원은 위헌심판과 재판 중단을 맞았고, 피고들은 줄줄이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아리송한 법을 만든 국회는 이미 잽싸게 조문을 고쳐놨습니다. 영화 ‘은교’도 아청법 위반이냐? 이렇게 나오니까 2조5항에 ‘명백하게’라는 단어를 쏙 넣었습니다. 즉,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명백하게 인식될 수 있는 사람’
이 등장해야 아동 청소년 이용 음란물이라는 것입니다. 개정안은 6월 19일부터 시행됩니다. 이전 조항의 생존 기간을 계산해보면, 2012년 3월부터 2013년 5월까지, 달랑 14개월입니다. 피고들은 하필 이 14개월에 걸린 것입니다. 무엇이 죄가 되는지 예측 가능해야 하는데, 법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위기입니다.
6월 19일부터 개정안이 시행되면 깔끔하게 해결될까요? ‘명백하게’를 넣었다고, 무엇이 죄가 되는지 명백해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것은 ‘교복 입은 성인물’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경찰청 사이버팀의 단속 가이드라인입니다. “성인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으면 단속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합니다. 성인으로 인식될 가능성은 또 무엇인지 수사 기관에 2차 해석을 요구해야 할 지경입니다. 법이 해석을 낳고, 해석이 또 새끼 해석을 낳는, 언어의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교복 입은 성인물’ 전시나 배포가 아청법에 걸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분명한데, 그 경계가 어디인지 애매하고, 여전히 예측하기 힘들며, 몇 년을 기다려 대법원 판례를 보고, 아 그렇구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4개월 만에 효력을 잃게 된 아청법 2조5항, 막판 헌재에까지 끌려간 법조문. 2조5항으로 여러 사람들을 처벌한 것이, 우리 사회의 아동 청소년 보호와 성범죄 억제에 얼마나 기여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법의 실익을 측정하기에는 생존 기간도 너무 짧습니다. 반면 부작용은 또렷한 것 같습니다. 사법 불신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뭐 이런 법이 있느냐고 삿대질을 받다가, 시행 1년 만에 헌법소원에 위헌법률 심판까지 제청됐습니다. 물론 인터넷에 음란물을 올리면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정보통신망법상 일반 음란물 배포를 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사 기관의 주관이 듬뿍 들어갈 수밖에 없는 법, 애매한 영역이 많아 해석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반발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이 순간 가장 괴로운 사람은,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고 항소하지 않은 피고들입니다. 그들은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나와도, 법원에 일일이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받아내야 할 형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