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본 동화책의 마지막 문장은 대부분 이랬다. 단 한 문장만으로 설명된 주인공들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막연하게 '영원한 행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정말 행복하기만 했을까.
만약 유럽 횡단열차 안에서 만난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 분)와 프랑스 여자 '셀린느'(줄리 델피 분)가 6개월 후를 기약하며 헤어지는 데서 영화('비포 선라이즈')가 마무리 되었다면, 또 9년이 흘러 재회한 두 사람이 아파트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비포 선셋')에서 멈췄다면, 관객에겐 좀 더 행복한 상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95년부터 '비포 시리즈'를 만들어온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에단 호크, 줄리 델피는 2013년 현재를 살고 있는 제시와 셀린느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들에게 이 시리즈는 한편의 영화 이상의 의미가 됐다. 한 시리즈를 같은 감독과 배우가 18년간이나 이어왔다는 건 단순히 작품에 대한 애정 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 열광한 관객에 대한 책임과 의무까지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배우는 2편 '비포 선셋'부터 주연 뿐만 아니라 각본에도 참여하며, 작품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애정을 드러냈다. 그 덕분에 2013년, 마침내 관객들은 두 사람의 마지막 여정이 될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을 만나게 됐다.
영화의 배경은 그리스의 조용한 해변마을 카르다밀리다. 여름휴가를 보낸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제시의 모습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사람은 여느 부자(父子)처럼 장난도 치고 농담도 주고받으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카메라가 담아낸 제시의 표정에선 완벽한 가정을 선사하지 못한 아버지의 죄책감도 엿보인다.
쓸쓸하게 공항을 나서는 제시를 반기는 건 쌍둥이의 엄마가 된 셀린느다. 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얼굴엔 주름이 보이고, 몸 곳곳에는 살집이 붙은 영락없는 40대의 모습이지만 이성남 제시와 감정녀 셀린느의 캐릭터는 여전하다. 이 시리즈의 상징적 기술인 롱테이크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은 삶과 사랑, 인간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주고 받고, 재기발랄한 유머를 쏟아낸다.
세월은 이들에게 '부모'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더욱 복합적인 고민을 공유한다. 불혹에 접어든 제시와 셀린느는 과거처럼 서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꿈과 이상을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함으로 인해 잃어버리거나 놓쳤던 것에 대해 끊임없이 토로한다.
18년 전 우연한 만남과 9년 전 짧은 재회가 이들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해 영화는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그린다. 그래서 '비포 선라이즈'의 달콤함도 '비포 선셋'에 설렘도 찾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비포 미드나잇'은 관객이 오랫동안 꿈꿔온 기대를 허물어 버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동화처럼 만났지만, 현실과 맞부딪히며 이어온 이들의 사랑은 우리 삶의 단면을 보는듯 하다. 확신에 차 내렸던 결정이 완벽을 보장하거나 영원을 기약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겪는다. 사랑하고, 싸우고, 상처받으며 추억을 지켜온 제시와 셀린느의 18년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극중 제시의 말대로 이들의 사랑은 '완벽하진 않지만, 현실적인 것'이다.
9년의 세월을 간격으로 만들어진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은 다시 나오기 어려운 희대의 타임 멜로다. 이 시리즈의 가치는 감독과 배우와 관객이 1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만들어간 로맨스라는데 있다.
또 어떤 나이,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깨달음과 울림이 다르다는 것도 이 시리즈가 가진 미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결편인 '비포 미드나잇'은 관객에게 아주 귀하고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108분, 5월 22일 개봉.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