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는 더이상 가족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가족'을 소재로 한다고 하면 '후지다'고 하죠. 이 영화가 투자가 안 됐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 우여곡절을 겪고 이렇게 개봉했다는 것만으로도 뭉클하네요"
송해성 감독은 허진호 감독과 더불어 충무로에서 가장 멜로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대표작인 '파이란'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지금도 많은 관객에게 한국 최고의 멜로 영화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2010년 '무적자' 이후 2년 만에 신작 '고령화가족'으로 돌아왔다.
그는 2008년 멜로 3부작의 마지막 영화가 될 '멜로스'를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촬영 2주를 앞두고 투자 문제로 영화가 엎어졌다. 크게 낙심한 그는 뜻밖에도 일본 자본이 유입된 '무적자'의 메가폰을 잡았다. 이마저도 크게 실패하자 영화 속 '인모'(박해일 분)처럼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 나타난 영화가 '고령화가족'이었다.
'고령화가족'은 인생포기 40세 인모(박해일), 결혼 환승 전문 35세 미연(공효진), 총체적 난국 44세 한모(윤제문)까지, 나이 값 못하는 삼남매가 평화롭던 엄마(윤여정) 집에 모여 껄끄러운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 천명관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작품도 투자가 여의치 않아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는 끝날 때까지 정말 행복하게 작업했다. 영화라는 건 감독이든 배우든 스태프이든 현장에서 즐겁게 찍어야 결과물로도 드러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달까. 그동안 내가 왜 즐기면서 작업하지 못했나 싶더라"
송해성 감독은 누나를 일곱이나 둔 딸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가족관계를 보면 유년시절이 어땠을지 언뜻 그려진다. 어쩌면 그에게 가족이란 가장 따뜻한 울타리인 동시에 가장 버거운 부담감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늘 속해있으면서도 벗어나고자 하는 '가족'에 대해 또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가장 따뜻하게 품어주는 '가족'에 관해 이야기한다.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을 단 한 장면으로 명료하게 보여줬다. 그는 "된장찌개에 다섯 개의 숟가락이 동시에 들어가는 부감샷(위쪽에서 아래쪽을 볼수 있게 찍은 화면)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그게 우리 가족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면서 "지금은 식탁이 보편화됐지만, 우리 어렸을 때에는 상을 펴서 밥을 먹었다. 가족이란게 서로 죽일듯이 싸우다가도 밥상머리 앞에서는 하나가 된다. 가족이 별건가 결국 같이 먹고, 같이 하고 하는거지"라고 말했다.
"'고령화가족'은 가족애에서 시작해 형제애로 넘어가는 지점이 있다. 오인모(박해일 분)라는 캐릭터는 형이 미운 만큼 작지 않은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 형 오한모(윤제문 분)는 늘 동생을 괴롭히지만, 마음 한쪽엔 똑똑한 동생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꺼이 희생을 했던 거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에게 그런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고, 형제애가 표면화되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게 영화적인 재미가 아닌가 싶다"
그는 '고령화가족'으로 관객에게 눈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말초적인 자극이 없더라도 흥미로운 이야기, 배우들의 설득력있는 연기로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령화가족'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미덕은 '루저'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다. 이 영화의 화자인 '인모'는 흥행에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원작소설에 따르면 그는 '전화번호부보다 못한' 영화를 만들고 난 뒤 충무로에서 사장(死藏)되다시피 했다. 일과 사랑에 실패한 인모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곳이 집이고, 가족이었다. 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각별했다.
"나도 인모처럼 영화 흥행에 실패한 시기가 있었다. 아마 이 영화는 충무로에서 실패를 경험한 모든 감독이 공감하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일거라 생각한다"
송해성 감독은 지난 10년간 6편의 작품을 했다. 그 가운데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있었지만, 참패한 작품도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그는 "감독이란 건 사실 종이 목숨이다. 충무로에는 인모처럼 한 작품한 뒤 10년 동안 차기작을 못 만들고 있는 감독이 태반"이라며 "나도 흥행과 실패를 거듭했다. 다행인 건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도 슬럼프 같은 것은 별로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감독의 분신과 같은 인모라는 캐릭터는 박해일의 열연이 있었기에 탄생 가능했다. 그는 "인모는 인생의 나락에서 가족에게 기대지만, 마음 한쪽에 부채감을 가진 복합적인 인물이다. 캐릭터 잡기가 쉽지 않은데 박해일은 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현장에서 윤제문이 박해일의 열연에 기가 죽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고 호평했다.
더불어 최고의 연기로 영화를 빛내준 윤여정, 윤제문, 공효진, 진지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촬영할 때 우리 배우들을 보면서 한국 영화판 '어벤져스'라는 농담을 많이 했다. 우리 영화가 예산이 많지 않은데 이런 캐스팅을 했다는 게 대단하지 않은가. 배우들은 저마다 자신이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심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 배우들은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상대배우가 잘하면서 자극받고, 시너지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3년에 한 편꼴로 작품을 발표해왔던 송 감독은 앞으로는 조금 더 속도를 내겠다고 했다. 그는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고집보다 대중들이 편하고 즐겁게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차기작 계획을 묻는 말에는 "구상 중인 작품이 있지만 아직은 비밀"이라며 "'고령화가족'이 잘되면 제작에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관객들이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ebada@sbs.co.kr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사진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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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