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피지로 간 서울의대 교수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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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는 우리나라 사람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남태평양의 휴양지다. 산호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푸른빛 바다가 온통 널려 있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푸른 바다 빛(아주리, Azzurri)이 이탈리아 축구선수에게만 허락되는 건 어쩐지 좀 샘이 난다. 

피지에서는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 구름인 듯 착각하기 쉽지만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별들의 무리, 은하수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피지에서 찌든 일상을 내려놓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피지에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들이 최근 두 달 동안 줄을 이어 찾고 있다. 한 교수가 일주일 정도를 머물고 나면 다음 교수가 오는데, 바통 터치는 주로 공항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걸 보면 단체여행은 아닐 게다. 학회도 이렇게 참석하는 법은 없다.

의대 교수들이면 모두 의사이고, 의사로서 관련된 일이라면 의료봉사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청진기나 약품 같은 해외 의료봉사에 으레 따라다니는 거대한 물품들이 없다. 빈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왜 피지에 그것도 줄이어서 찾고 있는 것일까?

피지는 국가다.

우리나라에서 피지는 발리나 푸켓 같은 휴양도시의 이미지다. 하지만 피지는 엄연한 하나의 국가다. 우리나라와 1971년에 수교 했고, 외교 수교국 순위로는 여덟 번째다. 경상북도보다 조금 작은 크기지만 백 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1874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70년 독립했다. 지금 피지를 장악하고 있는 정권은 2006년 12월 쿠테타로 출범한 군사 정부다. 1987년, 2000년에 이은 세 번째 쿠테타 이다.

다만 2006년, 바이니마라마(Bainimarama) 군 사령관에 의한 쿠테타는 피지 원주민 정권에 대한 피지 원주민 정권에 의한 쿠테타로 평가 받고 있는데, 인도계 사람에 대한 인종차별적 정책을 철폐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게 이전 쿠테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쿠테타라는 민주적 절차 파괴는 우방국이었던 호주와 뉴질랜드와의 불화를 불러왔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현 피지 정권에게 2014년까지 ‘민정이양’을 요구했고, 현 정부는 내정간섭이라며 호주와 뉴질랜드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에 호주와 뉴질랜드는 국력을 발휘해 피지가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받는 걸 막았고, 태평양도서국포럼(PIF, Pacific Island Forum)에서도 피지를 제외시켰다. 이 틈을 '내정불간섭'을 내세운 중국이 비집고 들었다. 피지에 주재한 정해욱 대사에 따르면, 중국은 피지에서 가장 큰 수력발전소를 차관 형식으로 지어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 때문에 막힌 돈 줄을 대신 터주는 역할도 한다. 이유는 하나다. 피지가 갖고는 있지만, 지금의 능력으로는 개발할 수 없는 엄청난 해상자원 때문이다. 피지의 경제수역은 우리나라 10만 제곱킬로미터보다 120배나 넓은 1200만 제곱킬로미터나 된다. 정 대사는 “우리나라도 지금이 피지와의 관계 증진이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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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해외의료원조'

피지의 수도 수바의 한 호텔 세미나 룸, 28 명의 검고 덩치 큰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한국인의 눈엔 모두 같은 나라 같은 민족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모두 14개의 국적이 들어 있었다. 모두 피지의 인접한 섬나라, 푸른 섬 (blue continent) 지역 국가들인데, 우리나라와 비행기로 10시간 정도 떨어져 있긴 하지만 세계보건기구 지역별 분류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서남태평양 소속이다. 이들은 모두 의료인이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정부 보건 담당자가 섞여있다. 오전 8시 반부터 모였으니까 낙천적인 이들로서는 꽤나 서두른 거다. 서울에서 온 교수들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그런 후엔 5개의 조로 나뉘어 앉아 열띤 토론을 한다. 가끔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진지했다. 커다란 하얀 괘도에 열띤 토의 결과를 쓰고 서로 돌아가며 발표한다. 신좌섭 (서울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는 이 과정을 진행한다. 그들의 토의 주제는 당뇨•고혈압•심장질환•암성질환 등의 비전염성 만성질환(Non-communicable disease, NCD)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이들 선진국형 병이 왜 남태평양 섬나라에도 성행하게 됐는지는 후에 따로 언급하겠지만, 이들은 자신의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하고 토의하고, 그리고 발표를 통해 서로 점검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데 우리나라 외교통상부가 지원한 50만 달러가 조금씩 나누어 지원되는 것이다. 신 교수는 이를 ‘눈높이 해외의료원조’라고 했다. 그들이, 그들의 문제를, 그들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외 의료 원조는 잘 사는 나라의 돈으로 못사는 나라에 큰 병원을 지어주고, 그 안에 CT와 MRI 등 최첨단 의료 시설을 갖추어 주는 것이거나, 선진국에서 파견된 의료진이 좋은 의약품을 들고 그 나라에 찾아가 환자들을 직접 진료해주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원조받는 국가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게 신 교수의 말이다. '선진국에서 지어준 병원을 몇 년 뒤 찾았더니 폐건물이 되어있고, 그 안에 있던 최첨단 의료장비는 그저 커다랗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례'를 신교수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1960년대의 소프트웨어가 보급된 사회에 2010년대의 하드웨어는 고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게 신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서울대병원에 와서 수련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진국 의사들이 ‘정작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고백을 듣고 ‘아! 이건 아니구나’ 했단다. 국제보건학을 전공한 오주환 교수(서울의대 의료관리학)도 한국의 의료진이 외국에 가서 짧은 기간 의료봉사를 하는 것을 두고서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더 큰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평생 관리가 필요한 고혈압, 당뇨 환자에게 한 달치 약만 처방하고 오는 것이니까요"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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