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SBS 기자 뱃살 노출'?…오보까지 그대로 베끼기

남의 기사 확인 없이 그대로 전재…오보까지 급속히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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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SBS 보도국 뉴미디어 부장입니다. 귀사의 인터넷 사이트에 나온 기사가 잘 못 됐습니다. 정정해주시거나 삭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제(29일) 오후 SBS 보도국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정확하게 오후 4시 7분. 스포츠서울닷컴에 '태풍에 뱃살이…SBS 권지윤 기자, 노출 굴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제목에 등장한 '뱃살', '노출'로 보면 상당히 '섹시'한 내용의 기사일 것 같습니다.

기사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통과한 지난 28일, 서해대교 현장에 강풍이 불어 5톤 탑차가 뒤집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났다. SBS <권지윤 기자>는 강한 바람 속에서 사고 피해자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인터뷰 중이던 <권 기자>와 피해자는 강한 바람에 중심을 잃었다. 이때 <권 기자>의 상의가 바람에 날리며 뱃살이 훤히 노출되고 말았고, <권 기자>의 속살은 안방으로 여과 없이 전달됐다' 여기에 네티즌들의 반응까지 덧붙여 기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일단 이 기사는 기사의 가장 기본적 요건인 '팩트'가 틀렸습니다. 원래 이 기사는 취재 당일인 28일 SBS 8시 뉴스를 통해 보도됐습니다. 보도 기자는 사회2부의 김종원 기자입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뱃살'이 '노출'된 기자는 김종원 기자가 아니라 다른 후배 기자입니다.

방송뉴스는 여러 사람이 취재해 한 명이 리포트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태풍이나 홍수 같은 대형 사건사고의 경우에는 부서를 망라해 보도국 기자들이 현장에 대거 투입되기 때문에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럼 뱃살이 드러난 기자가 <권지윤 기자>일까요? 아닙니다.

문제의 스포츠서울닷컴의 기사는 다음 날인 29일 아침 'SBS 모닝와이드' 뉴스를 보고 쓴 기사입니다. 전날 저녁때 보도한 김종원 기자의 리포트를 아침 뉴스에서 <권지윤 기자>가 새로 만들어 보도했습니다. 8시뉴스와 거의 같은 내용인데 다른 기자가 보도한 것입니다. 물론 이 뉴스에 나온 '뱃살' 기자도 8시 뉴스에 나온 후배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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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쓴 스포츠서울닷컴의 고OO 기자는 아침 뉴스를 보고, 권지윤 기자가 리포트했으니 화면에 나온 기자도 권 기자일 것이라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입니다.

이 기사는 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 올라가면서 '뱃살, 기자, 노출, 굴욕'이라는 '섹시'한 제목 때문에 조회수가 쑥쑥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뉴미디어를 담당하는 데스크로서 본질과 상관없는 낚시성 제목과 기사가 오보로 올라간 것에 대해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츠서울닷컴에 전화를 걸어 편집책임자와 통화했습니다. 정중히 잘못을 시인하고 제목과 기사를 수정했습니다. 수정된 기사의 제목은 '태풍에 뱃살이…SBS기자 돌발 노출'입니다.

'권지윤'이라는 이름이 사라졌고, '굴욕'이 '돌발'로 변경됐습니다. 기사 내용에서도 '권지윤 기자' 대신 'SBS 기자'로 바뀌었더군요.

이렇게 처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새 네이버에는 스포츠조선닷컴과 스포츠동아닷컴 기사가 떴습니다.

제목만 살짝 바꿨을 뿐 기사는 그대로이거나 살짝 손 본 정도입니다.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도 없었습니다. 역시 같은 방법으로 두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한 곳은 기사 전체를 삭제했고, 한 곳은 '권지윤 기자'를 'SBS 기자'로 고쳤습니다,

기사 제목을 볼까요? '태풍에 뱃살 노출…SBS 기자 상의 훌러덩'

그 사이 인터넷 매체인 TV데일리, 뉴스엔, TV리포트에 같은 기사가 올라왔더군요. 마치 이 쪽 불을 끄는 사이에 저 쪽에서 또 다른 불이 난 기분이었습니다. 이들 매체에는 아예 기자의 이름까지 붙인 기명 기사였습니다. 세 곳 모두 전화를 걸어 삭제를 요구했습니다. 두 곳에서는 곧바로 삭제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기사를 쓴 황OO 기자가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뱃살이 노출된 기자가 누구냐? 그 이름으로 바꿔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뱃살'과 전혀 관계가 없는 권지윤 기자가 해당 기사 때문에 피해를 받았으니 기사를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한 번 올라간 기사는 내릴 수 없다"는 황당한 답변을 하더군요. 한 번 올린 기사, 그것도 잘못된 기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저 역시 SBS 인터넷 뉴스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잘못된 기사는 즉시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많이 있으니까요. "고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몇 분 뒤 "데스크와 상의해서 기사 내리는 방향으로 결정했으니 1시간 이내로 확인하세요" 그 기자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법적 조치'를 당하기 싫었나 봅니다.

"26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 입장에서 조언 한마디…기사를 쓸 때는 아무리 급해도 이해당사자, 특히 실명이 거론될 때는 본인에게 꼭 확인하고, 어려울 때는 주변사람이라도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세요.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정상이 참작됩니다"

제가 보낸 답장 문자입니다.

여기까지 처리하는데 들어간 시간이 3시간쯤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인 오늘 아침 출근해서 네이버에 '권지윤'이라는 검색어를 쳐봤더니 밤사이에 다른 3곳의 인터넷 매체에 똑같은 내용으로 '권지윤 기자 뱃살 노출'기사가 올라와 있더군요. 제목들은 더욱 이상해졌습니다.

'권지윤 기자 뱃살 굴욕…강풍 앞에 속수무책, 볼라벤 피해자' (파이낸셜뉴스)

'권지윤 기자 굴욕, 강풍에 뱃살 노출…박대기 기자의 뒤 잇나' (TV리포트)

'권지윤 기자 뱃살 굴욕…볼라벤이 연출한 19금 뉴스' (아츠뉴스)

이 기사들 역시 기명으로 쓰였는데, 최초에 문제가 된 스포츠서울닷컴의 기사를 확인 없이 그대로 베끼거나 살짝 바꾸면서 제목을 더욱 자극적으로 뽑아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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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사의 '출처'가 있는 인터넷 매체들은 해당 회사나 기자에게 연락해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기사를 퍼다가 올려놓은 블로그나 카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네이버에 '권지윤'을 쳐보니 블로그나 카페는 물론, 동영상, 웹문서 검색까지 부지기수로 떠있습니다. 이런 곳들은 연락할 방법도 없습니다.

'권지윤 기자' 사태의 전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사안을 지켜보고 처리하면서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저로서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한 곳에서 쓴 기사를 수많은 매체들이 확인 없이 앞다퉈 베껴쓰고, 심지어는 오보마저도 복사, 또는 표절해가는 현실. 제목과 기사는 갈수록 선정적이고 낚시성으로 변하고. 이 기사들은 해당 매체에서 끝나지 않고 포털에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여기에 일반 네티즌들이 퍼다가 블로그나 카페에 올려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어찌 보면 이 사안은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권지윤 기자'가 여기자가 아니다 보니 뱃살이 좀 노출됐다고 해서 '굴욕'까지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처럼 다른 기사들도 이런 식으로 인터넷에 확산되는 경우가 하루에도 수없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문제의 기사가 유명인이나 일반인의 명예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내용일 경우, 당사자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했던 것처럼 언론사마다 전화를 걸어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설령 그렇게 하려고 해도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사태를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조회 수'에 목을 매야 하는 한국 인터넷 언론의 현실의 한 단면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제2, 제3의 '권지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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