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독도에서 일본과 교전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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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놓고 한-일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물리적 충돌 우려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교전 상황까지야 아니더라도 홍콩 시위대가 센카쿠 열도에 상륙한 것처럼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도 그럴 위험이 어느 때보다 크다고 한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지난 2005년 독도 위기 대응 지침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이 독도 상륙을 시도할 경우 해경 경비함과 독도 경비대원 등 경찰이 일선을 맡고 군이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독도 위기 대응 지침은 일본 우익단체 회원 등 민간인들의 상륙 시도를 포함해 모두 6가지 유형의 우발 사태에 대한 대응 절차와 방법 등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독도 경비대원들은 물론 5천톤급 해경 경비함인 삼봉호와 해군 함정 등은 이에 따라 24시간 경계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독도 방비가 늘 이렇게 튼튼했던 건 아니었다.

◈ 현대판 '의병', "독도의용수비대"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나라를 지키고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발휘되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저력이 있다. 바로 의병이다. 한국 전쟁의 전란 속에서 독도는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다. 지난 1952년에는 일본인들이 독도에 불법 상륙해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말뚝을 박아놓기도 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에 대한 이런 일본의 침탈 행위를 막고 일본의 독도 소유권 주장을 차단하기 위해 조직된 순수 민간 단체였다. 독도에서 일본인들을 축출하고 일본 어선의 독도 근해 불법 조업을 막아 우리 땅도 지키고 울릉도 주민들의 생존권도 지키겠다는 목적이었다. 현대판 '의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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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는 6.25가 끝나기 전인 1953년 4월에 조직됐다. 6·25 전쟁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의 홍순칠 대장이 구심점이 됐다. 홍 대장은 부산으로 내려가 혼자 힘으로 독도를 지킬 무기와 장비를 구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3년 4월 20일 울릉도 청년 45명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홍순칠 대장 아래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2개조의 전투대와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으로 편성됐다. 이들 45명 가운데 42명이 모두 6·25전쟁 참전 용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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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는 경기관총 2정을 비롯해 M1 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t 보트 1척 등이었다. 나중에 박격포 등을 추가로 구입했고, 의용수비대원 가운데 자의로 빠진 사람을 빼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대장 홍순칠을 포함해 모두 33명이었다.

◈ 日 해상보안청 순시선과의 '첫 전투'

홍순칠 대장은 의용대를 조직하자마자 보트를 타고 독도에 도착해 경비를 시작했다. 의용대는 그해 6월, 독도로 다가오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다음달, 7월 12일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경기관총으로 집중 사격해 격퇴했다. 의용대의 첫 전투였다.

첫 전투에서 장비의 보충이 시급함을 깨달은 홍순칠 대장은 다시 육지로 나가 어렵게 M2 2정과 박격포 한 문을 구입했다. 이어 8월 5일에는 동도(東島) 바위 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새겨 넣었다. 지금도 독도에 가면 이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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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대첩'… 日 순시선 3척과의 교전

1954년 8월 23일,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격퇴한 뒤, 그해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과 항공기 1대를 총격전 끝에 물리쳤다. 이 전투로 일본 측에서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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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칠 대장이 남긴 수기의 내용을 보면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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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1월 21일. 이날 역시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섬 주위를 돌아보는데, 전방 1km 해상에서 일본 함정이 독도를 향해 오고 있지 않은가. 좌우를 보니 오른쪽, 왼쪽에도 일본 함정이 보였다. 하늘에는 비행기. 이것들이 완전히 포위 상태에서 독도를 공격하는구나.

막사 안에 뛰어들어 "비상"을 외치고 쌍안경을 들어 확인하니 1천t급의 일본 함정 세 척이었다. 우리 대원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명령만 기다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일본 함정. 긴장된 얼굴의 대원들. 누구 하나 말없이 응시하는 눈빛. 일본 함정은 700m에서 600m로 다가오고, 마침내 소총 사거리에 들어왔다.

'탕' 한 발의 권총 신호와 함께 독도가 떠나갈 듯 총성이 울려 퍼지고, 6·25전쟁 때 명사수였던 특무상사 출신 서기종이 쏜 박격포 제1탄이 한 척에 명중되어 뱃머리에서 몇 사람이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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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상을 입은 일본 함정은 동쪽으로 사라져 가는데, 비행기만은 계속 독도를 선회하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한 눈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고 대공전 자세로 완벽을 기하자 사태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비행기도 동쪽 하늘을 향해 사라져 갔다. 일제히 일어선 대원들은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부둥켜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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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는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갔다.

◈ 식지 않는 '진실 논란'

위에 기술한 내용은 홍순칠 대장의 수기와 그를 바탕으로 한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해 1966년 홍순칠 대장에게 5등 근무공로훈장을,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각각 수여했다. 또  30년 뒤인 1996년에는 홍 대장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홍 대장이 무기를 구입한 내용이나 총격전 부분을 놓고 진실 공방이 가시지 않고 있다. '전시라지만 민간인이 총기를 구입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당시 의용대가 갖고 있던 무기는 울릉도 경찰이 빌려준 것이다', 또 '일본 순시선을 격퇴한 것은 울릉경찰서 독도순라반이다'라는 등의 반론이다.

실제로 감사원은 지난 2007년, 1950년대에 활동한 독도의용수비대 생존대원 11명의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실제 독도에 가서 활동한 대원은 33명 가운데 17명뿐이고 나머지 16명은 독도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이 독도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홍순칠 대장의 수기를 사실로 인정해 민간인인 의용대가 독도를 지킨 것으로 인정되면, 한국전쟁 직후 정부가 독도를 실효적 지배를 하지 못했다는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행적이 얼마나 과장됐는지는 알 수 없다.하지만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 만큼은 전란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떨쳐 일어섰던 옛 선조들과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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