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계 은어 '자서'란 말을 아십니까? 자필서명의 줄임말인데요, 이 말은 건설사가 아파트 미분양 물량을 해결하기 위해 자사 직원들을 상대로 분양받은 것처럼 자필 서명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건설업계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오늘 P건설사의 노조위원장이 자사의 전 직원이 미분양 떠안기, 이른바 자필서명을 했다가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모두 파산위기에 몰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2007년과 2008년 부산과 신탄진에서 발생한 대규모 미분양 물량을 해결하기 위해 사측이 전 직원 650여 명에게 각자 할당량을 배분하고 분양계약을 사실상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P건설사는 중도이자는 사측이 대납하고 추후 회사가 되사갈테니 직원들에게 끼칠 피해는 전혀 없다고 서류 상으로 서약까지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직원들의 명의를 빌려 허위 분양자를 만들어내면 그만큼 금융권으로부터 추가 대출을 받아낼 수 있고 그래야 사업을 원활히 진행해 추가 분양이 가능하다는 게 사측의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견 건설업체들의 오랜 관행대로 P건설사 직원들은 모두 3억 원에서 최대 18억 원에 달하는 새 아파트를 여러 채 분양받는다는 계약서에 '자필'로 '서명'합니다.
하지만 지난달 문제가 터졌습니다. 채권단 중 일부 은행들이 추가자금지원을 돌연 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면서 부도가 나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법원이 회사의 자산가치를 따져 회생할지 청산할지 주도하게 된 상황. 직원들의 미분양 떠안기는 명백한 불법 분양으로 운영주체가 법원이 된 이상 사측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또 일반 피분양자와는 달리 대한주택보증으로부터 계약금을 돌려받지도 못하고, 이제는 어디서든 수억 원을 구해 자신의 명의로 계약한 아파트의 중도금과 잔금을 치르고 소유하는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당장 사측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6백 5십여 명의 직원들은 이달 말 금융권으로부터 중도금과 잔금에 대한 이자를 독촉당하고 있습니다. P건설사의 노조위원장은 "나도 10억 원 넘는 돈을 구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당장 이달 말까지 4백만 원의 이자를 내야 하고, 못 내면 신용카드가 정지되고 연체이자가 붙으며, 석 달이 지나면 채무불이행자가 돼 개인파산도 피할 수 없는 처지"라고 말했습니다.
당장 지난달 월급도 체불된 직원들은 상환은 커녕 이자도 못 낼 상황에 몰려 현재 개인파산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2010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S건설사도 20여 명의 임원들이 미분양 떠안기를 감행했다가 사측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법정관리중인 I건설사도 직원들이 떠안은 아파트를 결국 15% 할인된 가격에 넘겨줬지만 해당 아파트는 대부분 그 할인된 가격에도 팔리지 않아 직원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민주노총 전국건설기업노동조합 관계자는 "전체 건설사 중 직원들에게 미분양 떠안기를 사실상 강요하는 업체가 최소 3분의 1이나 된다"면서 "불경기로 중견건설사들이 점점 부도 위기로 몰리고 있는데 이 경우 미분양 물량을 떠안은 직원들의 집단 파산사태가 곧 벌어질 조짐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중견 건설사 뿐 아니라 직원들까지 엄청난 피해가 벌어지고 있는데 정부는 나몰라라 한다"며 "결국 전 국가적인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