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 영등포 경찰서 기자실에 한 장의 보도자료가 배포됐습니다. 제목은 이랬습니다.
"어린이를 이륜차로 충격 후 현장 구호조치 없이 도주한 뺑소니 피의자를 끈질긴 수사로 검거"
잡기는 정말 잘 잡는 대한민국 경찰
현장에 떨어진 오토바이 나사못 1개를 근거로 정밀하게 수사해 피의자를 결국 자수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사못을 분석해 사고 오토바이 기종을 알아냈고, 관할 구청에서 그 기종을 등록한 소유자 명단을 파악한 뒤, 소유자들의 집을 일일히 방문해 결국 압박을 느낀 피의자가 자수를 했다는 겁니다.
경찰은 취재하는 기자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직접 수사했던 경찰관을 사고 현장에 기자들과 동행까지 시켰습니다. 가벼운 뺑소니 사고로 넘겨버리기 쉬운 일을, 끈질기게 추적해 붙잡은 것. 참 잘한 일이죠. 그 날 저녁 지상파 방송 3사 메인 뉴스 리포트도 모두 경찰의 끈질긴 수사를 칭찬하는 논조로 보도됐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도했습니다.
(위에 있는 "작은 나사못 하나로…9살 여아 친 뺑소니범 잡았다"는 [8뉴스]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의자에 앉은 채 소변' 본 사실 공개한 경찰
그러나 경찰이 정성을 기울여 피의자를 붙잡았다는 내용은 이 사태의 절반의 진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취재파일을 씁니다.) 경찰이 자랑스럽게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좀 길어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용의자가 겁을 먹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와, 그 곳은 지나간 적이 있으나 사람은 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경찰서에 자진 출석시켜,
당시 행적에 대한 알리바이를 추궁하자 의자에 앉은 채 소변을 보며 범죄 사실 시인, 검거함." (서울 영등포경찰서 보도자료-
아래에 파일이 첨부돼 있습니다.
이 사건의 피의자는 우리 나이로 61살의 학원 버스 운전기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경찰에 자수 의사를 밝히고 제 발로 경찰서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범행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나는 당시에 사람을 친 줄 몰랐다. 그래서 도망갔다. 당시 내가 그곳을 오토바이로 지나간 것은 맞으니, 내가 쳤나보다.' 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이 노인을 상대로 경찰은 강하게 압박하고 추궁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소변을' 볼 정도로요.
백 번을 양보해 이 과정에서 아무런 강압도 없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누군가 경찰 조사에서 '의자에 앉은 채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언론사에 알리는 것이 '인권을 생각하는' 경찰이 해야할 일일까요? 경찰이 뺑소니 용의자를 수사를 잘해서 검거했다는 것과, 피의자가 '의자에 앉아서 소변을 봤다'는 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뺑소니를 했으니 나쁜 사람이니 '의자에 앉아서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공개해도 되늘 것일까요?
경찰들이 수사 실적을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실제로 수사를 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의자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61살이나 되는 피의자의 망신스런 개인적 상황까지 보도자료까지 뿌려가며 공개하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 아닙니다.(근본적으로 경찰이 '오버'하게 만드는 이유는 언론 보도 실적을 인사 평가에 반영하는 현재 경찰 인사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검거 능력 하나는 세계 1등이라는 대한민국 경찰, 인권 보호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오버하지 않는 경찰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