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선물' 김연아


요즈음 모임을 가면 제게 가끔 친구 또는 지인들이 묻습니다.

"아니 뭐 50 넘어서도 재미있게 사네. 당신이 김연아 관련 뭐 하는 거 TV에서 보고 깜짝 놀랐네."

지난 5월 한 방송에서 내보낸 김연아 다큐에 제가 잡힌 후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좀 겸연쩍기도 했지만 요즈음엔 이렇게 받아칩니다.

" 자네도 아는 거 보니 김연아 다큐 (재방송이라도) 보는구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있구먼 허허"

그렇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코 지금 김연아라는 이름은 아마 대한민국 국민에게 인지도가 100%에 가까울 것입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매일 2~300개의 기사가 쏟아지고, 경기가 있던 없던 매일 TV에 광고가 나오고, 출근시에 듣는 라디오 에서는 프로에 상관 없이 김연아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꼭 이런 이야기가 따라 붙습니다.

"오늘도 김연아 선수 때문에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김연아라는 선수가 뭐가 대단해서, 피겨 스케이팅이 언제부터 인기 종목이었다고, 온 국민이 이 19세 '초보 숙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자신의 행복을 같이 거는 것일까요?

1. 나라의 힘, 그리고 서구 문화의 전통 속에서나 가능했던 종목 피겨 스케이팅

저는 1986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각종 스포츠 중계를 빼놓지 않고 챙겨봤습니다. 그 때 저는 당시 우리 나라의 최고 인기 종목이던 프로 복싱을 원없이 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TV가 주로 중계하는 것은 그들의 메이저 스포츠인 야구, 농구와 미식축구 외에 피겨 스케이팅, 체조, 골프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미국에 머무르던 10년 간, 저는 피겨 스케이팅 중계를 빼놓지 않고 보면서 이 스포츠의 명암과 많은 스타 선수들의 삶의 여정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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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피겨를 즐겨 보던 90년대 초반, 최초의 동양계 올림픽 챔피언이 된 일본계 4세 크리스티 야마구치 선수를 보면서 우리 나라에도 저런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머리를 흔들고 만 기억이 있습니다.

'안 돼, 저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야…문화적 바탕과 다양한 훈련이 있어야만 하는데 우린 그럴 여유가 없어'

그렇습니다.

피겨 스케이팅은 단순히 얼음 위에서 점프를 뛰는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이라면 뼈를 깎는 훈련으로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음악과 함께 호흡하는 댄스'라는 피겨의 본질, 그리고 정해진 시간 내의 프로그램을 통해 관객에게, 또 심판에게 스토리와 이미지를 전달하는 마임 연기와 그것을 아름답게 표출하는 안무에 그 생각이 이르자 다양한 서구적 문화적 전통이 이 스포츠를 받쳐주지 않으면 좋은 선수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느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스포츠를 사랑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남의 스포츠'였습니다. 2006년 김연아 라는 선수의 연기를 보기 전 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또 가슴을 졸이며 김연아 선수의 성장을 지켜보았습니다.

여자 선수의 경우, 주니어 월드 챔피언이 1976년부터 33명이나 배출되었지만 이 중 시니어에서 월드 챔피언이 된 선수는 고작 9명, 올림픽 챔피언이 된 선수는 크리스티 야마구치 하나 뿐입니다. 그처럼 성장기의 절제와 고통이 따르는 스포츠 이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고 지켜 보았습니다.

더구나 판정 스포츠라는 속성을 가진 이 스포츠는 겨울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며 서구적 문화 전통을 가진 강대국들의 외교 각축장이기도 했습니다. 2002년 올림픽의 그 유명한 판정 스캔들 덕분에 주관적이기만 했던 채점 제도가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심판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할 수 없기에 국력이 모자라 받는 설움을 느끼게 될까 또 소심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피겨 스케이팅 국제 연맹의 역사는 117년, 1908년부터 올림픽에 포함된 역사 깊은 이 종목은 초기에는 유럽 국가의 독무대였습니다. 그러다가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캐나다가 득세하고 1960년 구 소련이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냉전시대의 동서진영 경쟁의 대표적 스포츠가 됩니다.

1960년 이래 지금까지 피겨 스케이팅의 13회의 올림픽에서 종목을 통틀어 49명의 금메달리스트가 나왔는데 러시아(소련 포함)가 24개, 미국이 9개, 독일 4개, 영국 3개, 캐나다 2개며 나머지를 5개국이 하나씩 차지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활약하는 여자 싱글의 경우는 13회 중 미국이 6회, 1980년대의 전설 카타리나 비트의 독일이 3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일본이 1개씩 금메달을 차지했으며 그 외에 캐나다, 러시아, 체코, 중국이 하나라도 메달을 딴 경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2. 차마 밝힐 수 없는 우리 나라의 피겨 선수층

1985년 우리 나라에 세계적 피겨 선수들을 이끌고 방문하여 시범 경기를 주관했던 구 소련의 피겨 연맹 부회장은 소련의 피겨 선수가 약 3만 5천명이며 소질을 보이면 국가가 지원하여 합숙 훈련을 시키고 연령별로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웃 일본은 1992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미도리 이토 선수 이후 그녀의 후계자를 기르기 위해 '얼음 폭풍 프로젝트'를 구상, 선수 층의 확보와 후원 체계, 국제적 심판진과 코치 육성, 스포츠 외교 등을 지원한 결과 지금은 거의 1만명에 이르는 선수층을 갖고 있지요. 미국에서는 국내 선수권에 출전하려면 두 차례나 지역 예선을 거쳐 지역 대회 상위 입상자만이 나올 수 있을만큼 그 선수층이 두텁습니다.

우리 나라는 어땠을까요?

제가 미국 있던 10년 동안 단 한 차례 한국 선수의 경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1994년 올림픽에 출전했던 교포 선수 이윤정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중하위권이었지만 중계를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했었습니다.

이윤정 선수의 코치는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국가대표 선발전에 다녀 온 경험을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말하는데 선수와 관계자 빼고 관중은 자신을 포함해서 딱 세 명이었다고 했답니다.

2007년 월드에서 충격적인 시니어 데뷔를 한 김연아 선수에게 외신 기자들이 우리 국가 대표 선발전의 규모를 물었는데 김연아 선수는 약 열 명 정도라고 답했었지요. 우리 피겨 선수 층은 아직도 엷습니다. 가장 최근에 열렸던 올림픽 선수 선발전을 겸했던 회장배 랭킹전에는 총 50명의 선수가 출전했고, 그 중 올림픽 출전이 가능한 연령대의 선수는 불과 15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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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스케이팅은 이처럼 서구 문화적 전통이 강하고 체계적 지원과 넓은 선수층 하에서만 세계적 선수가 나올 수 있었던 문화 스포츠이며 강대국의 입김이 강할 수 밖에 없는 판정 스포츠입니다.

3. 하늘의 선물, 소중히 가꿔야 다음의 행복도 온다

대체로 우리 나라의 피겨 스케이팅 팬 층은 김연아 선수의 등장 시기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저같은 올드 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든 이유로 해서 그저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종목이라 생각하고 올림픽 때나 중계를 접할 수 있는 그저 부럽기만 한 스포츠였습니다.

그리고 저같은 나이 든 세대에게는 무엇보다 경제적 여유를 갖는 일이 급했고, 스포츠를 문화의 한 유형으로 생각하는 데에 익숙치 않았습니다. 스포츠 선수 하나가 이렇게 우리의 삶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어떤 종목이든 세계 챔피언이 하나 나온다면 마치 우리 자신이 그러한 영광을 얻은 듯, 동일시의 효과를 누리며 자긍심을 갖지만 그 밤이 지나면 다시 팍팍한 현실 속에 파묻혔습니다.

저 어려운 환경 하에서 세계가 찬양할만한 성적과 기량, 그리고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보여 준 소녀다운, 그리고 꾸밈없는 사랑스러운 모습과 각종 기부를 통한 나눔의 행복을 실천하는 이 젊은 숙녀의 모습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선물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이제 여러 종목에 많은 세계 챔피언이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력 성장 만큼이나 스포츠 부문의 국제 경쟁력도 놀랍도록 나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 스포츠 전체를 놓고 보자면 우리의 위상은 아직도 주변국입니다. 양궁, 태권도 등의 종목을 우리가 휩쓸고 있지만 그것은 소위 메이저 혹은 중요 스포츠 종목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일반인에게 피겨 스케이팅이 잘 알려져있지 않았을 뿐, 피겨 스케이팅은 전성기인 90년대보다는 그 인기가 하락했다고는 하지만 세계적인 올림픽 역사가인 데이빗 왈레친스키가 얼마 전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말했듯이 세계 여자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챔피언은 누구나 알게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유명 종목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여자 싱글의 올림픽 챔피언은 아이스 쇼와 광고 출연, 방송 및 영화 출연 등으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 왔습니다. 영원한 카르멘 카타리나 비트(1984, 1988년 금메달)는 동독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약 380만 달러의 연간 계약을 맺고 미국 순회 공연에 나섰고 1992년 금메달리스트 크리스티 야마구치, 1994년 금메달리스트 옥사나 바이율 역시 1년에 2~3백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들 피겨 챔피언들은 또한 사회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단을 설립하거나 세계 골다공증 협회, 아동 구호 협회, 특이병 환자 돕기 협회 등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인 공인으로 많은 어린이의 꿈이며 역할 모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렇게 세계에 우리의 '문화적 산물' 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피겨 스케이팅 월드 챔프 겸 강력한 올림픽 챔피언 후보 김연아 선수를 갖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 스포츠의 오랜 팬으로서, 열심히 운동에 전념해 준 선수와 지도해 준 코치님들 그리고 이렇게 잘 자라게 해 준 부모님들께 감사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동계 올림픽에서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아직 미개척이던 종목에서 큰 성과가 나올 것 같다 라는 차원이 아니고 직업상 국제 학술 대회에서 만나는 여러 외국인 학자들에게 우리도 이런 챔피언이 있다고 화제를 꺼낼 것이 새로 생겨서만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단순히 지독하게 열심히 일해서 후진국에서 이런 경제 성장을 거두었다 라는 단순한 일벌레 이미지에서 문화를 같이 논할 만한 국가가 되었다는 세계적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많은 세계적 예술가를 갖고 있고 우리 영화가, 우리 드라마가 동남아를 비롯, 세계적 입지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세계의 일반적 인식은 아직도 '일벌레'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문화적 자긍심으로 표출될 중요한 순간에 와 있기에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준 김연아 선수를 격려하고 환호하며 이런 훌륭한 자산을 하늘의 선물이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욕심을 내어 봅니다.

첫 번째 선물은 하늘에서부터 와서 그 선물의 주변과 자신의 노력으로 탄생되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선물은 우리 자신이 만들 수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과정이 곧 행복이요 희망이 아닐까싶기도 합니다. 행복을 찾아 멀리 떠돌다가 집에 와 본 파랑새가 바로 찾던 그것이었음을 일깨워 주던 어릴 때의 동화처럼…. 그 우리 작은 행복의 새싹들이 자라는 것을 돕고 즐기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그것이 이 하늘의 선물이 가장 바라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15년 전에는 선수나 관계자 외에도 관중이 세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 대회 빙상장에 마련된 좌석의 두 배가 넘는 300여 명이 몰려들어 다음 세대의 김연아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그 김연아 선수를 보며 스케이트를 신기 시작하는 여러 새싹들이 있고, 김연아 선수의 활약 소식을 들으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십대들이 있고습니다. 또한 그 자랑스런 소식에 일상의 고단함과 정치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하루의 미소를 저축하는 많은 기성 세대들이 있습니다.

잘 가꾸면 됩니다. 이 하늘의 선물과 그녀가 가져다 주는 꿈과 행복을….

1960년대 한국 남자 농구에는 신동파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여자 대표팀 감독으로서 1984 LA 올림픽에서 은메달도 따 내고, 농구협회 부회장을 지내시기도 했던 신 선수는 당시 아시아 권의 라이벌이었던 필리핀에서 국내에서보다 더 유명했다고 합니다. 저 선수만 아니면 우리가 아시아 챔피언인데 라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미워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동파!"라는 말은 필리핀에서 "좋다" 또는 "잘 끝냈다"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김연아'라는 단어를 "행복해"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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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헌 SBS U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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