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나리군.
더운 날씨에 잘 지내고 있는지요?
혹시 후세 타츠지 변호사에 대해 알고 있는지요?
아마도 잘 모를 것 같습니다만... 후세 변호사는 일제 시대에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강력히 옹호했고, 박열 열사를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변호 활동을 활발히 벌인 분입니다.
특히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과 관련해서도 후세변화사의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야스나리군은 잘 모르지 않을까 싶은데, 관동 대지진으로 당시 14만명이 죽었습니다. 대혼란이 벌어지고 민심이 사나워지자 이를 달래기 위해 일본 경찰을 중심으로 조선 사람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라는 전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했습니다.
흥분한 우익 청년들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의 인간 사냥에 나서고 일본 경찰은 이를 방조하거나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인간사냥에 희생된 사람이 6천 명을 넘습니다. 그 때 조선인 학살을 막기 위해 나선 일본 사람이 후세 변호사를 비롯한 자유법조단 변호사들입니다.
후세 변호사는 조선인 학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은 물론 이후에는 그 사건의 진상 규명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한국 신문에 일본인의 죄상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사과문까지 냈습니다.
후세 변호사의 활동이 꼭 조선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한 책자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아무도 변호해주지 않는 가난한 사람,전과자,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후세 변호사의 활동은 군국주의 일본 정부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두 번의 구속, 세 번의 변호사 자격 박탈은 군국주의 일본 정부에게서 받은 훈장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1953년 73살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후세 변호사는 일본의 양심을 대표하는 분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야스나리군.
그런데 저도 이 후세 변호사에 대해서 2007년까지 전혀 몰랐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시사를 다루는 분야에서 일을 하는 제가 모를 정도면, 후세 변호사를 아는 한국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제가 그 분을 알게 된 계기는 지난 2007년 극단 '前進座'가 무대에 올린 '살아도 죽어도'라는 연극이었습니다. 이 연극은 후세 변호사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해서 제가 처음으로 취재한 아이템이 후세 변호사의 일생을 다룬 이 연극이었지요.
저는 그 때 내심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인물을 왜 내가 몰랐을까?
그 분의 일생을 간단히나마 알고 난 제 느낌은 마땅히 알아야 될 사람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깊은 은혜를 베푼 사람을 잊고 있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기록을 보니 2004년에 한국 정부는 후세 변호사에게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을 추서했더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분에 대한 빚을 다 갚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여전히 저는 후세 타츠지 변호사에 대해서는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분을 아는 한국 사람이라면 저와 비슷한 심정일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는 일본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후세 변호사의 일생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 중이고, 그 영화 제작 발표회가 있는데 가 볼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달 31일 메이지 대학에서 열린 후세 타츠지 변호사 일대기 영화 제작 발표회에 다녀왔습니다.
제작 발표회 현장은 초라할 만큼 한산했습니다. 아사히 신문에서 취재를 나온 것은 빼고는 일간지 기자는 보이지 않더군요. 방송사 카메라 취재팀은 SBS가 유일했습니다. 후세 변호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해서 다소 마음이 씁쓸했습니다만, 고바야시 전 일본변호사협회 회장을 비롯한 제작위원들의 면면은 화려했고 열정도 만만치 않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감독을 맡은 이케다 감독(야스나리군의 부모님과 마침 성이 같네요)이 이 영화를 제작하려고 마음먹게 된 동기를 소개했는데 그 이야기가 사뭇 감동스러웠습니다.
그 이야기를 야스나리군에게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후세 변호사가 태어난 미야기현 이시마키시에는 오나가와 제 4중학교가 있습니다. 3학년 학생 수가 9명으로 전교 학생수가 21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 학생들이 4년 전부터 후세변호사의 '인류애'를 배우기 위해 후세 변호사 연구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후세 변호사의 일생을 다룬 '미래로의 가교'라는 제목의 연극까지 만들어 상연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국제교류와 인권학습의 여행' 이라는 테마로 후세 변호사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한국 서울로 3박4일의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학교 홈페이지를 보면 지난 3년간 후세 변호사 배우기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벌여온 활동 성과가 선배들의 졸업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야스나리군.
후세 변호사는 1953년이 타계했지만 그 후손들은 건재합니다. 오나가와 중학교 학생들이 후세 변호사의 후손입니다.
저는 정말 진심으로 후세 변호사,후세 변호사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는 일본 사람들, 그리고 후세 변호사 배우기에 나서고 있는 오나가와 중학교 학생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후세 변호사 관련 영화는 내년 3월 한일 동시 개봉 예정입니다. 그 영화가 정말 대박이 터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일본 사람이 후세 변호사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영화에도 나올 것이라고 하는 오나가와 중학교 학생들,졸업생들의 이야기가 야스나리군을 비롯한 일본 청년들,그리고 제가 아는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두 나라의 바람직한 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