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여야가 충돌할 때마다 격한 몸싸움과 고성이 전파나 인쇄매체를 타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특히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TV가 없어도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현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미디어법이 처리되던 지난 22일, 대다수 사람들은 '오늘도 조용히 지나가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전날 여야 원내대표의 협상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임시국회 회기가 아직 사나흘이나 남아 있던 터라 막판에는 결국 결렬되더라도 며칠 더 줄다리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평온했던 수요일 아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오전 의원총회 직후 미디어법 협상 결렬을 선언하면서 국회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통상 협상결렬은 양측이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최종 입장을 확인한 뒤 협상장을 나와 선언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민주당도 협상이 최종결렬된 게 아니라며 당일 아침에도 계속 이견을 조율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민주당쪽이 협상에 더 매달리는 인상이었다. 보통이라면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여당이 야당에게 더 매달리기 마련이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혼란스러움은 더 했다.
한나라당은 협상결렬 선언 직후 본회의장으로 몰려가 의장석을 점거했다. 야당의 점거에 대비해 의장석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야당의원 10여명이 본회의장에 있었지만 10배에 달하는 여당의원들에 밀려 망연자실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도부 회의중이던 민주당이 뒤늦게 의원들을 소집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곧이어 나온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발표는 여야 충돌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야당의원과 보좌진들이 본회의장 앞을 의자와 탁자 같은 집기류로 봉쇄한 가운데 맞은편 예결위회의장 앞에는 한나라당 의원 보좌진과 사무처 직원들이 자리를 폈다.
중앙홀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양 진영의 모습이 황산벌 전투를 연상시켰다. (민주당은 호남기반, 한나라당은 영남기반이어서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2시부터 시작된 충돌은 한마디로 공성전(攻城戰)이었다. 민주당은 본회의장으로 들어가는 8개문을 모두 봉쇄한 채 최후의 저지선을 폈다. 국회 본청으로 들어오는 10개 출입구에도 인력을 배치해 여당의원들의 추가진입에 대비했다.
중앙 출입구에서 2, 3백명이 뒤엉켜 싸우기를 몇차례. 돌파에 실패한 한나라당은 중앙홀 바로 윗쪽에 있는 휴게실쪽으로 사람들을 모아 작전회의까지 했다. 하지만 늘 지키는 쪽이 더 처절하게 마련이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번번히 진입에 실패했다.이윤성 국회부의장도 국회의장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진입을 시도했지만 옷까지 찢기는 수모를 당한 끝에 물러났다.
일견 처절해 보이는 이 공방전에서 웃지 못할 헤프닝도 계속됐다. 민주당쪽에서 "언론악법, 결사저지"! 하고 외치면 한나라당쪽 여성 당직자들은 "폭력정당 물러가라!"고 외쳤다. 또 한쪽에서 "민주당!"하고 외치면 다른쪽에서는 "한나라당 모이자!"는 외침이 들렸다. 마치 대학 라이벌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응원전과 비슷한 양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1시간이 흘렀다.
민주당쪽에서는 잘하면 오늘(22일)은 넘길 수도 있겠다는 희망섞인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언론노조 조합원 50여명이 경찰저지선을 뚫고 본청진입에 성공하면서 야당의 기세는 한껏 달아올랐다. 하지만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출입구 8개를 모두 지키기에는 사람이 모자랐다. 한나라당 보좌진들이 수비가 허술한 작은 출입구들을 수시로 공략하면서 본회의장 의원수도 점차 의결정족수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육군 대령출신의 한나라당 김성회 의원을 필두로 한나라당 보좌진들이 본회의장 정문 우측 출입구로 일제히 몰려들면서 양 진영의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참의 줄다리기 끝에 민주당 당직자들이 하나 둘씩 끌려나오기 시작했고 김 의원이 괴력(?)을 발휘해 문을 뜯어내면서 입구 확보에 성공했다.
이 출입구를 통해 이윤성 부의장과 한나라당, 친박연대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하나 둘씩 들어갔다. 결국 수성(守城)에 실패한 민주당은 작전을 바꿔 본회의장 진입을 결정했고 민노당 의원들과 합세해 표결 저지에 나섰다.
이후 사정은 TV나 신문을 통해 보도된 그대로였다. 끈질긴 여당의 표결강행과 처절한 야당의 저지 속에 결국 22일 본회의는 미디어법 등 4건의 안건을 처리한 채 끝났다. 본회의장 안에서 펼쳐진 45분간의 사투도 막을 내렸다. 지난 3월 불안한 합의로 파행이 예견됐던 6월 임시국회는 그렇게 끝났다.
야당은 당 대표까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갔다. 야당을 설득해야할 여당은 국정발목잡기라며 비난에 더 열중하는 모습니다. 예견된 파행은 끝났지만 또 다른 파행이 국회를 가로막고 있다. 미디어법을 놓고 여야는 모두 소신을 앞세워 끝까지 싸웠다. 정치인의 소신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소신이 정말 국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여야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편집자주] 예리한 시각과 꼼꼼한 취재가 돋보이는 남승모 기자는 2000년 SBS 공채 8기로 입사해 사회부,경제부를 거쳐 정치부 정당 출입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특유의 적극성으로 활발한 현장취재를 통해 복잡한 정치 현장의 맥을 짚어주는 기사들을 전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