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을 봉쇄한 경찰을 비판한 클로징 멘트를 놓고 저를 걱정하는 말씀들을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저 괜찮습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클로징 멘트는 전혀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쓴 것이 아닙니다. 기자로서 지켜야 하는 '정치적 중립'의 의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고 난 제 성격이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인 이유도 큽니다. 공교롭게도 기자 일을 시작한 뒤 15년 4개월 동안 다른 취재부서는 두루 다녀봤지만, 기억도 희미한 여러해 전 총선 당시 두 달쯤 파견 근무한 것 빼고는, 정치부에서 취재해 본 적도 없습니다.
대신 검은 것을 검다 하고, 흰 것을 희다 말하는 것이 언론의 정도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지난 4월 27일부터 나이트라인을 맡았습니다. 방송장이로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맡는다는 것은 참 신나는 일입니다.
원래 "나이트라인 마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로 끝나던 클로징을 좀 길게 바꾼 것은 방송장이로서 제 욕심이었습니다.
뉴스앵커는 안방에 허락 없이 찾아가는 손님과 같습니다. 특히 지상파 방송은 일부러 찾아 들어가야 하는 다른 매체와 달리 TV를 켜기만 하면 나옵니다. 게다가 제 뉴스는 한밤중에 합니다.
한밤중에 허락도 없이 찾아온 손님이 딱딱한 뉴스만 줄줄이 늘어놓다가 안녕히 주무시라는 한마디만 하고 사라지면 좀 예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 제 방송을 봐주시는 분들에게 조금은 더 다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뉴스가 늘 그렇듯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고 그걸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운 소식들을 끝으로 잠을 청해야 하는 시청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30초 남짓 '조금 긴' 클로징 멘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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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시작한 다음날 한 클로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 신인배우가 자살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4월 28일>
"신인 여배우의 자살, 동반자살을 미끼로 한 성폭행... 오늘도 자살과 관련된 우울한 소식들 전해드렸습니다. 요즘엔 함께 자살하자는 인터넷사이트도, 유행처럼 번집니다. 목숨은 자신의 것이기에, 타인인 제가,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다면, 그전에 바다에 한번 가보시죠. 폭풍우가 죽을듯 몰아치다가도, 다음날이면 거짓말처럼 평온한 게 바다입니다. 저는 인생도.. 바다와 비슷하다고 믿고 삽니다."
저도 청춘이 있었던 지라 (아직도 청춘이라고 우기며 살고 있기는 합니다) 제 경험이 혹 도움이 될까 해서 했던 말입니다. 다음날 한 대학생이 제게 메일을 보내와 고맙다고 했습니다. 나쁜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는 말에 저도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했습니다.
<5월 7일> (자정이 넘어 방송하므로 실제 날자는 5월 8일 입니다)
"오늘 어버이날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망설임 없이 줄 수 있다는 것. 저도 부모가 되고 나서, 처음 알았습니다. 내리 사랑이라고, 자식 생각하는 것 만큼, 부모님 생각은, 못합니다. 그러나 늙고 병드셨어도, 부모님은, 가장 든든한 언덕입니다. 40 넘은 아들에게, 끼니 거르지 말라고, 아직도 잔소리 하십니다. 고맙습니다. 찾아뵙지 못하지만, 아침에 전화라도 해야겠습니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장례식이 있던 날은 이런말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멘트입니다.
<5월 13일>
"서강대 장영희 교수는 한 학생의 영어회화 학점을, 주저없이 A를 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 노점 노인에게서, 필요도 없는 부채를 두개씩이나 산, 학생의 행동을 훔쳐본 뒤의 일입니다. 불쌍한 노인을 보고 측은하게 느끼는 마음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알아듣는 만국공통어이다. 그 만국공통어를, 그렇게 능숙하게 구사하는 학생은, 회화의 A학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장례식장이, 제자들로 북적였으면 좋겠다던,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 떠났습니다. 내일이 스승의 날입니다. 장 교수 같은 스승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16년째 방송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 미안한 사과도 있었습니다. 정상체격인 어린이들도 자신이 키가 작고 뚱뚱하다고 생각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어린이날 기획기사가 있었습니다.
<5월 5일>
"외모 때문에 아이들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는 소식 전해드렸습니다. 예쁘고 마른 사람만 보여주고, 추켜세우는, 텔레비젼 탓이 큽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만은, 세상이, 티비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쇼. 마르고 예쁜 사람이 불행하기도 하고, 작고 뚱뚱한 사람이 행복하기도 한 게 세상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29주기였던 5월 18일은 관련기사를 넣을 시간이 없어 클로징으로 대신했습니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지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방송을 비롯한 이땅의 모든 언론들은, 그들을 '폭도'라고 불렀습니다. 한 광주시민은 '동포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댄 저들이 폭도입니까, 아니면, 부모형제를 지키겠다고 일어선 우리가 폭도입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배들의 부끄러운 잘못을, 따라하지 않겠습니다."
경찰을 비판하는 말을 했던 날도 푸른 잔디가 아름답게 자란 광장이 버스로 '철통같이' 봉쇄돼 있는 장면이 답답해, 지극히 원칙적인,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 뿐입니다.
<5월 27일>
"경찰의 의무는 시민들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으로 월급 주고, 세금으로 버스도 사줍니다. 시민들 돈으로 월급 받는 경찰이. 시민들이 설치한 덕수궁 분향소에서 천막을 빼앗았습니다. 추모행사를 서울광장에서 열어야 한다는 여론이 70%에 달해도, 경찰은 시민들 돈으로 산 버스로 광장을 봉쇄 했습니다. 슬플 때 슬퍼하는 것도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경찰이 누구를 위해, 왜 존재하는지 실제로 경찰을 움직이는 분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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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저는 '조금 긴' 클로징 멘트를 계속 하려고 합니다.
정치적 이슈가 됐든, 개인적인 생각이든 '논쟁'보다는 '따뜻한 소통'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질책 하셔도 좋고, '이런 클로징 어때요?' 하시며 메일로 보내주시면 별로 좋지 않은 제 머리가 고생을 좀 덜 수 있어 더 좋겠습니다.
제 이메일은 pete@sbs.co.kr입니다.
[편집자주] SBS 마감뉴스인 '나이트라인' 앵커로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는 편상욱 기자는 16년 경력의 중견 방송기자입니다. 경제부 기자로도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 편 기자는 아침 모닝와이드의 5분경제 출연과 생방송투데이 앵커로도 활약했습니다. 최근에는 정감있고 의미있는 멘트로 심야시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