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 하면 암이라고?
4월 말. 한적한 시골 마을의 흉흉한 소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암으로 돌아가신다는 겁니다.
한때는 줄초상 치르느라 '초상도 지겹다'는 말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죽었다 하면 암'이라는 얘기까지.
정말인지 궁금했습니다. 한국인이 암으로 많이 숨지는 건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령시 보건소에 물어봤더니, 집단 암 발병 소문은 처음 듣는 얘기고, OO마을이 어딘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는 OO마을의 인구 통계를 따로 갖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소문만 무성한 상황, 마을이 있는 보령으로 무작정 내려갔습니다.
처음 뵙는 분들에게 어머니, 아버지 해가며 전수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올해 72살의 함성희 할머니. 2001년에 할아버지를 폐암으로 떠나보냈습니다.
6남매 기르느라 고생 참 많이 했다고 하시더군요.
할아버지는 생전에 공사 현장은 물론이고 탄광까지 전전하시면서 '몸뚱이로 벌었다'고 했습니다.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고 좀 먹고 살 만 하니까 암에 걸려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본인이 폐암에 걸린 줄도 몰랐다고 하네요.
왜 몰랐냐고 물어보니까 할머니 말씀이,
"당신 만약에 나쁜 병이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약 먹고 자살해야지 그러더라고. 그러니 거기다 대고 암이라고 할 수가 있어야지. 자기 병 모르고 그냥 죽었어. 암이라고 모르고 그냥", 이러십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아직도 방에 두고 지내십니다.
67살의 최영재 씨. 처음 뵈었을 땐 잿빛 얼굴에 놀랐습니다.
최 씨는 2006년에 직장암에 걸려 지금도 투병중입니다. 항암 치료를 16번이나 받았다고 하네요. 요즘도 끼니마다 항암제를 복용하는데, 부작용 때문에 손발의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신발은 일부러 끈 없는 걸 사서 신고, 신고 벗기도 힘들어 집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십니다. 암에 걸리기 전엔 '동네에서 날렸는데' 지금은 계단 오르기도, 종이 하나 집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니시는 병원에 물어보니, 암 세포가 이미 양쪽 폐에다 뇌까지 번졌다고 하네요. 아저씨는 돈 때문에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항암제만 먹으면서 하루하루 살아내고 계십니다.
68살의 김난자 할머니. 동네에 시집 와서 40년을 살다가 2003년 위암에 걸렸습니다.
암이 하필 위의 가운데 부분에 생겨서, 할머니는 위를 아예 들어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위가 없는 겁니다. 다행히 소장 윗부분이 위 역할을 해줘서 밥을 조금씩은 먹고 살아가십니다. 할머니 표현으로는, 상추쌈 딱 '세 수저'면 식사를 더 못한다고 하십니다.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암에 걸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이젠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암 안 걸리고 좀 살다 돌아가시게, 그렇게 해달라고요.
간암, 위암 한국인 평균의 5배
이렇게 암과 싸우거나, 암에 쓰러져 돌아가신 분을 한 분 한 분 확인했습니다.
이른 새벽 논밭에 나가 밤 늦게 들어오는 분들이 많아서 만나 뵙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걸렸습니다. 마을은 모두 29가구였고, 현재 사는 주민은 72명이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암으로 8명이 돌아가시고, 5명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발병한 숫자를 따지면 10년 간 모두 13명입니다. 위암, 폐암, 간암, 직장암 등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마을 거주기간, 연령대, 성별을 모두 조사해 암 전문의에게 물어봤더니, 간암과 위암은 한국인 평균 발병률의 5배에 달했고, 폐암은 3배가 높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왜 이렇게 발병률이 높을까요.
암이라는 게 식생활, 흡연, 음주, 유전의 영향도 받습니다.
그래서 국립암센터가 개발한 '생활습관 자가진단표'를 갖고 또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암에 걸린 13명 가운데 9명을 조사할 수 있었는데요, 숨진 분들의 경우엔 가족에게 물어봤습니다.
수십 가지 질문을 던지고, 점수를 매기고, 결과를 내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앞서 소개한 최영재 씨의 담당의에게도 물어봤는데, 역시 알 수 없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암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높은 발병률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주민들은 암의 공포에 질려있고, 투병자는 죽음을 준비하는 마을.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자는 게 주민들의 푸념이었습니다.
지하수가 의심스럽다
힌트를 얻기 위해 마을 위성사진에서 발병자의 집을 표시해보기로 했습니다. 마을의 '암 지도'가 되겠네요. 귤색은 암으로 돌아가신 분들, 연두색은 발병한 분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신기하게도 '암 라인'이 그려집니다. 라인을 따라 8집에서 줄줄이 암에 걸린 것입니다.
마을에 가보면 저 라인을 따라 군부대 펜스가 설치돼 있습니다. 펜스 너머는 수송부 자리인데 사진 속 빨간색 지점이 유류저장소입니다.
혹시 기름이 지하수에 스며들어 암을 일으킨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기름 속에는 벤젠과 같은 발암물질이 들어있으니까요.
'암 라인' 8집을 다시 찾아다녔습니다.
8집 모두 예전엔 지하수를 먹으면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온 건 1999년쯤입니다. 그 전까지는 30년, 40년 지하수를 마셨습니다. 8집 가운데 5집에서는 아직도 지하수가 나왔습니다.
청소할 때나 밭에 물을 줄 때 쓴다고 하더군요. 주민들께 여쭤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전엔 지하수에서 기름 냄새가 엄청 났다고 합니다. 바닷가 근처 마을이라 지반이 모래로 되어 있는데, 옛날에 모래를 파면 어르신들 표현으로 '기름이 펑펑' 났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유전인 줄 알고 좋아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대체 유류저장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유류저장소 부지는 1991년부터 현재까지 우리 공군이 쓰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는 미군(1960년대~1981년)도 주둔했고 우리 육군(1981년~1991년)도 머문 적이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부대 주인이 계속 바뀌었지만, 그 자리에는 늘 기름 탱크가 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일단 공군 측의 협조를 받아 부대 내부 유류저장소를 둘러봤는데요. 실내등유, 휘발유 등이 4만 리터 넘게 보관돼 있었습니다.
바닥은 1990년대 초반에 콘크리트 공사를 마쳐서, 기름이 토양에 스며들지 않도록 처리돼 있었고, 배관도 지상에 설치돼 누출 사고를 사전에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환경단체 전문가도 이 정도면 '비교적 깔끔하다'고 말했습니다.
2001년부터는 특정토양오염시설로 시청에 신고돼 매년 부대 지하수 검사도 받았는데, 유류 성분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하수 흐름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암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거지"
취재 도중 보령시청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마을 실상을 설명해줬더니 시청 직원이 한다는 말이, 촌에서 어르신들이 암으로 돌아갈 수 있지, 새삼스럽게 뭘 그러느냐는 식입니다.
지하수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또 한다는 말이, 기름이 둥둥 떠서 보이는 건 아니니까,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담당 과에서 하는 말 치고는 좀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일 방송된 프로그램에도 이 말이 나갔습니다만, 이건 취재진이 고의적으로 그 부분만을 편집한 게 아니었습니다.
대화 내내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시청에서 '암 라인' 가운데 4집에서 지하수를 검사한다고 물을 떠갔다는 겁니다. 확인해보니, 4월 27일에 충남보건환경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더군요.
지하수 검사 항목은 47가지인데 이 중에는 유류 성분과 발암물질도 포함돼 있습니다.
5월 7일에 결과가 나왔고, 8일에 보령시청으로 전달됐습니다. 시청에 거듭 요구한 끝에 5월 12일, 지하수 검사 결과를 보여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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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웃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하수는 4집에서 가져가놓고 검사 결과는 달랑 하나만 내놓는 겁니다. 4집 지하수를 섞어서 의뢰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유류 성분과 발암물질은 하나도 안 나왔고 당연히 먹는 물 기준에 적합 판정을 받은 곳입니다. 적합 판정을 받은 집이 어디냐는 물음에도 일절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나머지 3집도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그렇게 알라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정말 성의 없더군요. 헌데 보령시청의 코미디는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주민들께 여쭤보니 지하수를 재검사하기 위해 한 집에서 물을 또 떠갔다는 겁니다. 왜 또 가져갔냐고 보령시청에 따져 물으니, 이번엔 "필요에 따라 그럴 수 있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들의 코미디는 사실 예상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취재팀도 이미 5월 7일에 지하수를 채취해 한 대학에 분석을 의뢰한 상태였습니다.
(방송엔 나가지 않았습니다만) 여기서도 미묘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취재팀이 지하수 분석을 맡긴 대학이 어디인지 군부대 측이 알아버린 것입니다. 대학 측도 처음부터 분석 자체를 좀 부담스러워한 터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미덥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방송이 일주일도 안 남았던 5월 14일, 작전을 변경했습니다.
부리나케 두 집의 지하수를 다시 채취해 환경오염 전문 분석기관에 의뢰했습니다.
결과는 방송을 하루 앞둔 19일에 나왔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지하수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다
복잡다단한 이름 '테트라클로로에틸렌'이라는, 간단히 말해 PCE라는 물질이 나온 것입니다. PCE는 국제암연구소(IARC)가 인정한 발암물질입니다. 검출된 양도 기준치의 3배에 육박했습니다.
이 물질은 드라이클리닝에 주로 쓰이지만, 자동차의 금속 부분을 세척할 때도 쓴다고 합니다. 미군이든, 육군이든, 공군이든 누군가가 수송부 차량을 관리하다 PCE로 토양과 지하수를 오염시켰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석유의 첨가제로 쓰이는 MTBE라는 물질도 미국 기준의 10배까지 검출됐습니다.
앞서 대학에 맡겼던 지하수에서도 (발암물질 벤젠과 흔히 같이 검출되는) '톨루엔' 성분이 미량 검출됐습니다. PCE, MTBE, 톨루엔 모두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생기는 물질이 아닙니다. 어디선가 흘러와 지하수를 '발암 지하수'로 오염시켰다는 뜻입니다.
검사 결과를 갖고 보령시청에 다시 따졌습니다.
발암물질 나왔다고 하니 잠시 침묵. 지하수에 전혀 이상 없다던 말은 쏙 들어가고, 이젠 '기준치 이하'로 검출돼 문제없다고 하더군요. 검사 결과를 숨길 생각 전혀 없고, 취재진의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문서로 공식 통보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담당 직원은 무슨 서류 결재 받아야 된다고 전화를 그냥 뚝 끊어버리더군요.
아마 정말로 공식통보가 온다면, 보령시청이 다시 퍼간 지하수의 결과가 이상 없이 나온 뒤가 아닐까, 생각 듭니다.
보령시청, 지하수 검사 결과를 은폐 엄폐하는데 대단한 수완을 보여줬습니다.
마을에 2주 동안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죽는 건 뭐 어쩔 수 없는디 이유는 알고나 죽어야 되지 않겄슈…"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충청도식으로 그냥저냥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대체 왜 암에 걸린 지도 모르고, 왜 아픈 지도 모르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
닥쳐올 죽음에 '누군가의 책임'이 묻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차게 한번 따져 묻지도 않은 순한 사람들입니다.
뭘 자꾸 숨기고 암 환자를 외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아픈 분들에 대한 전면 조사와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
무엇보다, 암에 걸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는 분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편집자주] "세상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짜디 짠 소금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 !" 핸섬한 외모의 박세용 기자는 2005년 SBS 보도국에 입사해 사회부 사건팀을 거쳐 기자들이 만드는 시사고발 프로그램 '뉴스추적'에서 활약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