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때 처음 대학에 들어가면 운동권 선배들이 권해주는 책은 유시민 전 의원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습니다. 이른바 '좌경화' 코스의 입문서와 같은 것이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책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예찬, 옹호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교과서에서,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가 얼마나 지배자의 논리였는지를 깨닫게 해줄 뿐입니다. 국가라는 존재가 민중에 대해, 또 강대국이 약소국에 얼마나 추악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몇가지 역사적 에피소드로 소개만 합니다. 그런데도 '거꾸로…'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탁월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 알고 있던 것,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가져다주죠. 마치 영화 메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가상 현실에서 빠져나와 실제 지구의 참상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빨간 약'과 같았습니다.
그만큼 당시 우리 교육은, 특히 역사와 사회, 국민윤리 등은 체제 옹호적인 내용 일색이었습니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아젠다를 세팅했고 체제 순응적인 가치관을 갖도록 유도했으며, 심지어 객관적 사실 조차 체제의 입맛에 걸맞게 변조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반민주적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국정 교과서 체제가 검인정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다양한 관점과 사고 방식, 가치관을 폭넓게 교과서에 수용해서 좀더 학생들에게 주도적인 사고력과 객관적인 판단력을 길러주자는 취지입니다. 단순히 국가가 정해준 지식을 습득하고 암기하기 보다 스스로 걸러서 판단할 수 있는 민주적 시민의 소양을 키우도록 하자는 시도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으면 학생들이 대학교에서 여러 분야의 새로운 관점과 가치관을 접하더라도 훨씬 유연하게 반응할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그런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하고 있습니다.
지난 6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검인정 체제로 출간되고 있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되돌리자는 주장이 여당 의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지금 교과서들이 우리 역사의 공보다는 과를 지나치게 부각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객관적 사실 위주로 드라이하게 쓰면서 남한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아픈 지적을 많이 한다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북한 교과서 내용을 일부 인용하고 있다며 북한의 역사관과 동일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는 여당 의원들 개인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재계, 국방부·통일부 등의 정부 부처, 보수적인 시민단체, 일부 학계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역사학계가 나섰습니다. 역사학계의 양대 단체인 한국사학회와 한국사연구회를 위시해 20여개 관련 단체들을 망라해 성명서를 냈습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여당을 비롯한 수정론자의 주장에 대해 뿌리 깊은 '레드 컴플렉스'에 의한 착시 현상이라고 논박했습니다. 워낙 하얀 세계에서 살다보니 연분홍만 되도 '시뻘겋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은 이미 그 정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는데 구세대가 스스로 혼란스럽다보니 호들갑을 떠는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설사 교과서 수정론자들의 문제 제기에 일부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검인정제를 다시 국정으로 되돌리자는 주장은 마치 출애굽을 이끈 모세에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항의하는 우매한 이스라엘 민족의 행태라고 지적합니다. 아니! 지금의 근·현대사 교과서에 그렇게 문제가 많다면 이를 수정한 교과서를 내면 되지 않냐, 그러면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이 선택할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더 큰 불만은 교육과학기술부의 태도에 쏟아졌습니다. 이번 교과서 논쟁은 김도연 전임 장관이 사실상 촉발시켰습니다. 대한상의나 교과서포럼 등에서 꺼낸 좌편향 시비를 장관 개인이 '일리가 있다'며 '교과서를 고치겠다'고 나섰습니다. 역사 교과서 문제에 있어 전문가들인 역사 학자들의 의견은 아예 묻지도 않고, 가장 권위 있는 판단 기구인 '국사편찬위'도 도외시됐다고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게다가 이번 역사 교과서 논란은 이미 지난 2004년과 2005년 일부 언론과 보수 단체, 당시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에 의해 크게 불거졌던 사안이었고 이미 그때 '현재 교과서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던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로 교육부에 의해서 말이죠. 이미 검증을 해서 결론을 내렸던 사항을 정권이 바뀌고, 그 정권의 코드가 달라졌다 해서 하루 아침에 말을 바꾸는 행태를 보이니 '공무원은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 받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전문가는 역사 학자들이고 역사 교육을 어떻게 시킬지에 대해서는 역사교육학자들이 가장 많이 알 것입니다. 나머지 세력의 왈가왈부는 훈수일 뿐입니다. 어떤 역사교육이 가장 바람직한 지에 대해 학문적으로, 교육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단순히 정권 입맛에 맞는지로 접근한다면 우리 역사 교육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정 체제를 통해 역사에 분칠해 교육시키는 것이 우리 학생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까요?
[편집자주] '보도국의 신사'로 불리는 우상욱 기자는 1995년 SBS 공채로 입사해 사회, 정치,경제부를 두루 거치며 지금은 사회1부의 교육담당 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성실한 취재로 전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