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더니 요 며칠 동안은 밖에 나가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네요..
여름이 되면 뉴스에도 여름과 관련된 내용이 꼭 들어갑니다.
날씨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더위를 어떻게 피하는 지, 더위와 관련된 어떤 물건이 잘 팔리는 지.
매년 맞는 여름 뭐 새로울 게 있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 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더라고요.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항상 새로 맞는 여름은 이전의 여름보다 더 덥게 느껴지지요.
기자들은 계절 아이템을 한 번 더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요.
사실 올해의 경우, 더운 것도 더운 것이지만 날씨가 아니더라도 우리같은 서민들을 열나게 만드는 게 있죠.
한없이 어려워져만 가는 경제말입니다.
누구나 다 힘든 시기지만, 특히 조금 더 힘든 사람들은 올 여름을 어떻게 보낼까..
단순히 그들의 생활만 들여다 보는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고물줍는 노인'이었습니다.
동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분들이죠.
요즘 부쩍 그 수가 늘기도 했고요.
도대체 얼마나 벌길래 저리도 열심히 하실까..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하루동안 따라다녀보니 정말 '대단하시다'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낮 기온이 32도 넘게 올라갔던 지난 29일, 저는 아현동 재개발 예정지에서 혼자 사시는 72살 양순용 할아버지의 일과를 취재했습니다.
양 할아버지는 벌써 5년 째 고물줍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
<72살 양순용 할아버지의 하루 >
08:00 기상. 간단한 아침(지난해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혼자 차려드십니다)과 출근(?) 준비
09:00 어젯밤 모아둔 폐지와 고물을 리어카에 실어 폐지수집상 차가 오는 시장 입구에 갖다놓은 뒤 집 근처 아현시장에 가서 가게들에서 나온 상자 정리 (과일가게, 슈퍼마켓에서 나온 상자를 모두 편 다음 수십 개 씩 모아 한 짐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할아버지는 달랑 상자만 챙겨가면 안된다며 아무 수당도 없는데도 시장 주변 청소도 도맡아 하셨습니다.)
13:00 집에 들어가 간단한 점심, 휴식
14:00 다시 시장에 나와 상자 정리, 근처 상가를 돌며 버려진 상자와 고물 수집
15:00 시장 입구에 온 고물수집상에 고물을 가져가 팔기 (이 시각이 되니 양 할아버지같이 고물을 주워온 노인 십여 명이 우루루 나타났는데요. 대부분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들이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카트에서부터 리어카에 실어 오기도 하고, 푸대에 넣어 질질 끌고 오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 폐지, 과연 얼마나 할까요?
신문이냐, 상자냐에 따라 다릅니다.
신문은 1kg에 130원, 상자는 1kg에 110원입니다. 신문이 좀 더 비싸게 팔리는거죠.
그래서 요즘 지하철에서 노인들 사이에 무가지 수집 경쟁이 치열한 거랍니다.
@ 그럼 가장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건 뭘까요?
바로 고철입니다. 종이류보다 100원 정도 더 얹어팔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부피는 작지만 무게도 종이보다 많이 나가고요.
그래서 양 할아버지를 비롯한 노인들은 이사를 들고나는 곳에서 나오는 고철을 발견하는 날이 운수 좋은 날이랍니다.
가격이 이렇다보니, 몇백 킬로그램을 짊어지고 와야 간신히 2~3만 원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만 원 안팎의 돈을 받을 뿐이고요.
있는 사람들한테 쌈짓돈일테지만, 이 분들께는 정말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만 원을 쥐고 나가는 노인들은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셨을 정도니까요.
17:00 고물수집상 1톤 트럭 2대가 노인들이 모아온 고물로 꽉 차서 떠나면, 다시 고물 수집 돌입
18:00 집에 돌아가 간단한 샤워와 저녁 식사
19:00 다시 시장에 나와 영업이 끝나는 11시까지 상자 정리
23:00 시장 영업이 끝난 뒤 리어카를 끌고 시장과 동네를 돌며 다시 고물 수집
02:00 귀가
*********************************************************************************
양 할아버지는 이렇게 하루 24시간 가운데, 17시간을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도 상자를 뜯고 접고 하다보니 할아버지의 손톱은 시커멓게 변해버렸습니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니, "전혀 아프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일 하시는 중간중간 "오늘 왜이렇게 더워" 한 마디는 던지셨지만, 다른 불평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겨울엔 추워도 일을 하면 몸에 열이 나서 견딜만한데, 여름엔 축축 쳐진다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하지만, 겨울엔 난방비를 걱정해야 하는데, 여름엔 창문만 열어두면 시원해서 전기요금이 적게 나온다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십니다.
(부끄럽게도 같이 따라다니며 가끔 할아버지 일을 도와드린 취재팀이 먼저 지쳐버렸습니다. )
할아버지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였습니다.
슬하에 2남 2녀가 있지만, 모두 넉넉지 못한 형편에 자식들을 키우고 있는데, 거기에 또 하나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물줍기를 해서 하루에 얼마씩 현금으로 받으면, 용돈하고, 공과금 내고, 가끔 손주들 용돈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 돈 들이지 않고 온전히 노력만으로 이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다"고도 하십니다.
발품만 좀 팔면 길거리에 널려있는 고물을 주울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몸이 따라주기만 한다면 계속 고물줍기 일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봤습니다.
"내가 이제 나이가 70이 넘으니까.. 내가 그냥 이렇게 있다가..딸이고 아들이고 새끼들한테 신세 안 지고, 저녁밥 먹고.. 잘 먹고 그냥 초저녁에 돌아가시는 게 그게 내 소원이야..."
[편집자주] 권란 기자는 2005년 SBS 보도국에 입사해 사회부 검찰 출입기자를 거쳐 현재는 사회2부 사건팀에서 경찰서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꼼꼼하고 성실한 취재로 계속해서 좋은 기사를 전해드리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