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기자는 2주 쯤 전에 경찰청 대변인실이 주관한 견학 행사로 서울과 과천의 경계 어디쯤에 있는 서울경찰특공대에 다녀왔습니다. 특공대장의 간단한 현황 소개와 동영상을 보고 테러진압 모의훈련 시범을 견학한 기자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권총 사격 체험'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찰은 미국 Smith+Wesson의 .38구경 리볼버를 제식 권총으로 채용하고 있는데요, 10년 전쯤 나름대로 다양한 총기를 접할 수 있었던 군생활을 했지만 이 기종은 처음 다뤄보는 것이라서 살짝 긴장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권총'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총기인데도 처음 쏴본다는 생각에 왠지 감개가 남달랐다고나 할까요.
저작권 문제도 있고 하니, 혹시 .38구경 리볼버가 어떤 것인지 보실 분들을 위해 관련 사이트를 하나 링크하겠습니다. (클릭☜) 단, 이 사이트에서는 .38구경을 '남자의 로망'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로망은 '영웅본색'에 수도 없이 나온 M9 Beretta입니다. (혹시, M9 Beretta가 궁금하시면 클릭☜)
총기에 미숙한 기자단을 고려해서, 사대는 정식 기록을 위한 거리보다 약 2m 정도 앞당긴 곳에 마련됐습니다. 영점 사격으로 6발, 완사로 10발, 속사로 20발을 사격했는데, 소리도, 반동도 생각보다 박력이 있어서 놀랐는데요, 오랜만에 맡아본 매캐한 화약 냄새며, 총기 특유의 무게감과 격발시의 야릇한 느낌 때문에 비록 잠시였지만 마치 군 복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II.
어제(27일) 새벽, 인천시 옹진군 영흥도 영흥파출소에서 경찰관의 총기 자살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직근무중이던 45살 박 모 경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는데요, 박 경사의 이력이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은 더해 갔습니다. 박 경사가 이른바 '수퍼 캅'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02년 8월, 인천중부경찰서 도원파출소에서 근무하던 박 경사(당시 경장)는 차량 검문을 하다가 절도차량을 잡아냅니다. 검문에 걸린 차랑절도범은 박 경장을 차에 매달고 5백여 미터를 도주했는데요, 차에 매달려 가던 박 경장은 끝내 땅에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박 경장은 뇌경색을 얻었고, 이후 경찰병원에 한 달에 한 번 이상 통원치료를 다니면서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박 경사는 지병을 핑계로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순간에도 항상 남들보다 앞에 나서는 스타일이었습니다. 2006년 1월, 박 경사는 휴일을 맞아 집에서 쉬고 있다가 2층에 있는 셋방 주인집에 강도가 든 것을 알게 됐습니다. 흉기를 휘두르며 도주하던 강도와 엉켜 싸우던 박 경사는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범인은 잡았지만 이 상처로 박 경사는 다시 2개월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치료를 마친 박 경사는 같은 중부서 관내 영흥파출소로 지원해 근무를 하게 됩니다. 유족에 따르면 영흥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랑 연결되긴 했지만 도심에 비해 비교적 한적한 섬마을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리려 했다고 합니다. 영흥도 근무 2년 5개월만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 취재진이 만난 경찰 동료들도, 유족들도 경찰을 천직으로 알고 우직하게 살아온 박 경사의 갑작스런 죽음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직한 데다가, 사명감도 뛰어나 위험을 접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던 박 경사였습니다.
III.
그러나 '박 경사가 왜 그런 일을?'이라는 질문에 경찰과 유족들은 다른 얘기를 꺼냈습니다.
경찰은 박 경사가 뇌졸중 치료가 길어지면서 처지를 비관해 왔다고 자살 이유를 짧게 설명했지만, 유족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치료하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경찰 생활을 해 왔고, 사고 전날까지 전혀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딸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잘 다녀올게'라고 말하며 당직근무를 나간 박 경사가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가족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용감했던 사람이 고작 지병 치료를 못 이겨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그렇게 심지가 약한 사람이라면 그동안 현장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거짓이라는 말입니까." 유족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기사 한 줄, 인터뷰 하나가 고인의 명예와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기사는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IV.
경찰특공대에서 난데없이 사격체험을 하면서 느낀 차가운 방아쇠의 감각은 아직도 기자의 손 끝에 남아 있습니다. 그냥 멋내기 '여흥'에 불과했던 기자의 사격체험과 어제 박 경사의 죽음을 연결시키는 건 어쩌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취재를 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 기사를 녹음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어도 그때 손에 쥔 권총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늠쇠와 가늠자를 잴 필요 없이,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이, 끝내 자기의 머리에 총구를 댈 수 밖에 없었던 박 경사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심적 동요를 겪었는지, 한 번의 리포트와 몇 번의 전화통화만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토록 절박한 상황으로 박 경사를 몰아간 그 어두운 '무엇'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그렇게 허망하게 스러져간 그의 죽음은 더없이 안타깝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