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참가자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24일 토요일은 하루 종일 각종 집회가 이어진 날입니다. 요즘은 쇠고기 수입 문제 때문에 약간 뒤로 들어갔지만, 현 정부 공약 가운데 가장 논란거리는 역시 '대운하'였습니다. 2월 숭례문이 불에 탄 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대운하 추진은 생명의 원천인 강을 죽이는 것'이라며 4대강 순례의 대장정에 들어갔습니다. 24일은 그 100일의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날이었죠. 또, 23일 정부가 공공부문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24일 낮에는 서울 곳곳에서 민영화 반대 집회가 계속됐습니다. 교육, 보건의료, 언론, 철도, 운송 등 7개 분야 공공부문 노조가 제각기 집회를 벌인 뒤 여의도 문화마당에 모여 집회를 가졌죠. 저녁 7시엔 청계광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문화제가 열렸습니다.

17번째 열린 것으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민들의 자유발언과 노래 등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8천 명 수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주최인 광우병 국민대책위원회는 3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고, 제가 어림잡아도 2만 명 정도는 되겠다 싶을만큼 참 많은 시민들이 찾아주셨더군요. 촛불 문화제는 또 하나의 축제로 자리를 잡은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고, 2002년과 2004년의 광화문 촛불 집회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현장을 지켜보던 저는 9시쯤 행사가 마무리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다른 사건사고가 있다는 현장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9시 반쯤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촛불 문화제 참석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 중이라는 겁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광화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경찰이 버스로 광화문 사거리를 차단해버렸고, 광화문 사거리 쪽에 있던 시민들이 결국 광화문 우체국 앞으로 오면서 광화문 우체국과 보신각 사이 종로 도로에 수천명은 돼 보이는 많은 시민들이 여전히 촛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가끔 경찰과 시위대가 맞서기도 했지만 큰 부상자나 충돌 없이 시민들은 구호와 노래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쇠고기 수입 장관 고시가 5월 마지막 주엔 시행될 예정이고, 이 날 있었던 다른 집회 참가자들도 많이 참석할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당초엔 24일 촛불집회에 5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할 것이라고들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집회 시작 당시 여의도에 모였던 인원이 그렇게 많이 넘어오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친구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인터넷 커뮤니티끼리 온 사람들이 많았단 뜻입니다. 정당 산하 단체에서 온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만...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의 포위 속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었던 거죠. 이들이 외친 구호는 크게 4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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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시 철폐, 협상 무효'... 촛불 문화제에 모인 가장 직접적인 이유죠. 간간이 '탄핵', '아웃'이란 구호도 눈에 띄었습니다. 4년전 '탄핵 반대'란 구호와 함께 촛불이 밝혀졌던 장소에서 4년 뒤엔 '탄핵'이란 구호가 나오는구나 싶었습니다. 헌법 1조 내용을 노래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란 노래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2002 월드컵을 뒤흔들었던 '대한민국'이란 박수와 구호도 사랑받았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경찰의 포위에 갇힌 이후엔 '독재 타도'란 구호까지 나왔습니다. 민주주의란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고 국민에게 권력이 있다는 정치 체제이므로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을 국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추진하는 건 독재에 다름없다는 게 시위대의 주장입니다.

1시가 넘어가자 경찰은 주최 측에게 언제쯤 행사가 끝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 땐 이미 주최 측도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1시가 넘으면서 돌아갔지만, 250여 명의 참석자들은 밤샘 시위를 벌였고, 4시 반이 넘어 경찰이 강제 진압에 나서면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고등학생을 한 명 포함해 37명이 연행되면서 이에 대한 항의 집회가 또 잇따랐죠.

왜 이들이 촛불을 들고 밤 늦은 시각까지 도로에 앉아있었을까?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20대 대학생, 아이를 안고 나온 30대 부부, 40대 아저씨, 중고등학생, 주최 측, 또 집회 현장을 인터넷 생방송하러 나온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까지... 그들의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17차례나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했지만 진정이 담겼다고 보이진 않았고, 국민을 무서워한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예정된 고시날 직전 마지막 주말이다. 이젠 뭔가 행동을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청와대로 행진을 해서라도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는 겁니다.

하나의 정책을 추진할 때 다수의 국민이 반대한다면, 설사 국민들의 의견이 타당성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들을 설득할 때까진 추진하지 못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끊임없이 국민들과 소통하고 정확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며 자신들의 원하는 국정 방향을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죠.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소통이 부족했다'라고 말했습니다만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시민들은 대통령의 담화 이후에도 여전히 소통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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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유재규 기자는 2005년 SBS 기자로 입사해 국제부를 거쳐 사회2부 사건팀 기자로 취재 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취재로 우리 일상의 사건.사고와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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