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 을씨년스러운 아침이었습니다.
강남경찰서 기자실로 수서경찰서 관계자 분들이 찾아왔습니다.
*엠바고를 걸 사안이 있다며, 사건을 설명하더군요. (* 엠바고란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금지한다는 말입니다. 취재대상이 기자들을 상대로 보도자제를 요청하거나, 기자실에서 기자들 간의 합의에 따라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자제하는 행위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용인즉슨 수백억대 자산가가 80일 전에 납치가 됐다가 풀려났는데 이 사람을 납치한 십여명의 일당 중 아직 1명만 검거가 됐기 때문에 범인 검거를 위해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납치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풀려나기 전까지 모든 언론사가 엠바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피해자가 이미 풀려난 데다 주범은 이미 필리핀으로 달아났고, 오후에 영장신청을 할 예정이어서 일반적인 엠바고 사안으로 보기 어렵다는 일부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한 언론사가 엠바고를 받지 못하겠단 입장을 밝혔고, 오후 1시쯤 연합뉴스에 기사가 떴습니다.
특정 언론사에서 먼저 취재를 한 내용도 아니고 자신들이 먼저 와서 설명했는데 엠바고를 안 받는 게 어디있냐며 수사에 차질이 있다고 수서경찰서 측은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습니다.
수서서의 주장에 동의하는 기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엠바고를 받지 않겠다는 상부 방침이 불만인 해당 언론사의 기자도 이래저래 입장이 난처한 모양이었습니다.
어쨌든 통신, 인터넷, 신문 순으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방송사들 역시 제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화가 단단히 났던 수서서는 이왕 기사가 난 상황에서 쓸데없는 오보를 막기 위해 느지막히 브리핑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브리핑 내용, 기자들의 질의응답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곳저곳 보도에 담기지 않은 내용들도 있을 겁니다.
@ 자작극 가능성은?
= 일단 연합 보도에 자작극 냄새난다는 취지의 보도가 있는데 이는 100% 잘못됐습니다. 김 씨는 100% 피해자가 맞습니다. 용의자 김 씨가 피해자 부동산 담보로 78억을 불법 대출받고, 이 중 10억 2천이 동창 이 씨에게 건너갔습니다.
@ 이 씨는 피해자 김 씨가 풀려난 것을 어떻게 알고 자진 출석했나?
= 아직 확인이 안됐습니다. 이 씨와 용의자 김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피해자가 몸이 안좋아서 기초사실이 확인이 안됐습니다.
@ 이 씨와 피해자 김 씨는 언제부터 동거했나?
= 둘은 대학 동기인데, 동창들이 모의해서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약 투여한 뒤 납치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동거했는지는 확인해봐야 합니다. (브리핑 후반 작년 5개월 정도 함께 살았다고 설명)
@ 이와 피해자 김 씨 원래 친하던 사이였나?
= 친하니까 같이 살았겠죠.
@ 납치 당시 술자리엔 몇명 있었나?
= 압구정동 쭈꾸미 집이었는데 3명 있었습니다. 필리핀으로 달아난 김모 씨와 이 씨 그리고 피해자 김 씨.
= 이태원에 다 도착해서 어느 업소 앞인데.. 이 씨가 음료수를 사오겠다고 내리고, 그렇게 내리자마자 김모가 운전을 했답니다. 10미터 앞으로 가는데 갑자기 두명이 타서 그때부터 감금했다고 합니다.
@ 이가 피해자 김과 같이 살게 된 경위?
= 이 씨가 경제 여건이 안좋아서 딱해서 데리고 왔다고 진술했습니다.
@ 납치에 쓰인 차는?
= 달아난 김 모 벤츠 추정 차량으로 납치된 걸로 보입니다.
@ 회수됐다는 BMW는 뭔가?
= 피해자 차량입니다. 사건 접수 이후 실시간 위치 추적을 했더니 논현동 쪽에서 신호가 왔다갔다 해서 호텔 이용했지 않았을까해서 호텔 수색했습니다. 피해자 차가 5월 중순 호텔에서 발견됐다.
@ 호텔은 어디?
= 밝힐 수 없습니다.
@ 마약은 뭔가?
= 피해자 진술이 정확히 안됐다고했는데, 풀려나기 한 3-4일전부터 일체 불상의 약물을 투여한 것 같더라고 진술했습니다. 마약인지는 모발 검사 해봐야 합니다.
@ 주사로 투약했나?
= 아직 확인 안됐습니다.
@ 불법대출 이해가 안가는데.. 피해자 본인이 안가고 어떻게 대출 받아?
= 그부분도 수사대상인데.. 본인이 안간 것 맞습니다.
@ 대출 받은 시기는?
= 대출은 4월말에 이뤄졌습니다.
@ 30억 예금 빼간 것은 계좌이체?
= 진술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4월 중에 다 이뤄졌습니다.
@ 78억/30억 지금 행방은?
= 인출 된 다음날 피해자 법인(부동산 관리회사) 명의로 돼 있는데, 그 계좌로 입금된 뒤 용의자 김 모 통장으로 이체됐습니다. 나중에 혐의 확인하고 출금조치 했고요. 용의자 김 씨 통장엔 4억 남아있었고, 오늘 영장 청구한 이모 씨 계좌로 달아난 김모씨에게서 입금.
@ 김 씨, 언제 출국?
= 달아난 김 씨는 5.15 밤 10시 대한항공 편으로 필리핀으로 출국했습니다.
= 경찰은 5.16일 불법대출 확인하고 통장에 지급정지 했습니다. 출금해놓고 보니 이미 출국했습니다.
= 용의자 김 씨가 피해자 행세를 하고 은행기관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 용의자 김 씨는 절도 등 전과 있고, 이후 사기 전과 등 10범 / 이 씨는 사기 등 2범 입니다.
@ 일당은 몇 명?
= 일당은 7-8명인데 4명은 정확히 관여했고, 나머지 3-4명은 불법대출 관련 부분입니다. 인원은 더 늘수도 있고 줄수도 있습니다.
@출금은 몇 명?
= 5-6명 정도입니다.
@ 용의자 김 씨와 이 씨는 어떻게 안 사이?
= 확인이 더 필요한데, 피해자가 경기도 용인 땅을 매도하려고 했는데 매수자와 가격 차이가 났다더군요. 이 씨가 20억 차이(240억 정도)나는 부분 해주겠다며 용의자 김 씨를 소개해줬다고 합니다.
@ 가족과는 얼마나 자주 통화?
= 가족과 통화기록은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했다고 합니다. 신고 경위는 피해자가 아침에 전화를 잘 안하는 생활리듬이 있는데 자꾸 아침에 전화해서 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브리핑 내용을 보고도 궁금한 내용이 여럿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궁금증들이 꼬리를 잇긴 기자들도 마찬가지니까요. 시간이 지나고 수사가 진행되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겠지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면 한 번 더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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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겸손과 존중'이 취재의 좌우명이라는 김요한 기자는 2006년 SBS 보도국에 입사해 사회2부 사건팀에서 활약 중입니다. 섬세하고 끈질긴 취재력과 함께 수준급 실력의 '드럼' 연주까지 보도국의 팔방미인으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