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한해 동안 4백여 편의 국내외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하루에 한편씩 봐도 1년 내에 못 볼 많은 물량이네요. 저는 그 가운데 한 150편 정도 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올 한해 좋은 영화 많이 보셨나요? 지난해에는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외면으로 초라한 흥행성적을 거둔 아까운 영화들을 뽑아봤었는데 올해는 주제넘게 그냥 제 맘대로 국내외 영화 가리지 않고 베스트 20을 뽑아봤습니다. 완성도나 미학적 성취, 산업적 의미 등을 떠나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객의 입장에서 감동 받거나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니 그냥 흥밋거리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올해 개봉된 영화들을 쭉 되짚어보 영화 감상에도 때가 타는 건지 시사회를 놓치고 남들이 좋다는 입소문 듣고 개봉 후에 본 영화들은 감흥이 덜 했다는 특징이 있더군요. 올림픽 경기도 아니고 순위를 매기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대략 개봉일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올 한 해 본 영화 가운데 어떤 영화가 제일 좋았는지 한번 정리해 보시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좋은 영화 많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래된 정원
극장 흥행에서 쪽박을 찼지만 제게 올 초 제일 처음 큰 울림을 주었던 영화였습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게 시대적 명제가 된 요즘, 8, 9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과 거기에 동조하거나 거부하거나 상관없이 흘러온 불행한 세대를 훌륭하게 성찰했습니다. 주인공 현우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다가오는 시대의 상징처럼 차려입은 자신의 딸과 눈 내리는 도심거리에서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우아한 세계
사회에서는 무한도전이 아닌 무한경쟁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갈수록 치솟는 사교육비 대느라 허덕이는 이 시대 가장의 자화상을 잘 표현했습니다.
타인의 삶
무미건조한 듯 하면서 영화에 집중하게 만들고 결말까지 완벽한 영화였습니다.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도 훌륭했습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감독의 나이는 50대인데 영화에서 느껴지는 재기발랄한 감각은 20대 못지않았습니다.
우리 학교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일교포들이 피와 땀으로 세운 일본 내 조선인 학교를 중심으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재일교포들과 부모의 뜻에 공감하고 그 길을 따르는 맑고 밝은 자녀들의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캐리비안의 해적
올 한해 할리우드 시리즈물 가운데 가장 고전적인 차원에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스틸라이프
지아장커 감독은 30대 후반의 나이지만 70대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갖고 있는 통찰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담
몇 년 전부터 공포영화가 여름 한철 장사된다니까 너도나도 붕어빵 찍어내듯 양산해 자멸하고 있었는데 올해 공포영화 가운데 단연 돋보였습니다. 사랑에 기초한 슬픈 공포를 처연하게 그려냈고, 아역배우 고주연의 깜찍한 공포연기와 '중얼 귀신'은 심장까지 멎어버리게 만들만큼 무서웠습니다.
트랜스포머
애니메이션으로나 가능했던 거대 변신로봇을 실사로 구현했고 러닝타임 내내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것 같은 어지럼증을 선사했습니다. 장난감도 무척 비싸더군요.
라따뚜이
올해 선보인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밀양
이창동 감독의 치열한 장인정신에 전도연, 송강호의 완벽한 연기조화가 화학적으로 결합해, 국적이나 민족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주제를 잘 다뤘습니다.
뜨거운 녀석들
각종 패러디와 코미디, 액션이 어우러진 훌륭한 영국 영화였습니다.
마이 파더
편안하고 익숙한 스타일로 잔재주 부리지 않고 부자간의 정을 깊게 그렸고, 다니엘 헤니가 연기자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레인 오버 미
영화치료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한국영상응용연구소(KIFA)가 선정하는 올해 최고의 치유영화로 뽑혔습니다. 저도 많이 치료(?)받았습니다.
본 얼티메이텀
핸드 헬드 촬영의 흔들림과 편집, 음악의 템포가 거의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고 폼생폼사 첩보원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 내지는 시스템에 맞서는 고독한 첩보원상을 세운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명품 블록버스터입니다.
파프리카
불가해한 꿈의 세계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에 감탄합니다.
M
영화 속에 풀어놓는 현란한 이미지에 운 좋게 제가 주파수가 맞았습니다.
세브란스
뻔한 예상과 관습을 깨부수는 이야기 전개에 '뭐야~~'하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재미있게 본 코믹 공포영화입니다.
색, 계
리안 감독의 세공 솜씨와 양조위, 탕웨이의 연기, 극장 내부 온도를 높여놓는 살색의 향연
스카우트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대비되는 역사적 현실과 허구를 잘 버무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안타까운 영화입니다.
새해에는 베스트를 뽑을때 너무 많아 고민할 수 있게, 재미있고 의미있는 영화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