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 현란하게 풀어놓는 꿈과 기억의 이미지


 이명세 감독의 신작 [M]의 기자시사회장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 마음가짐을 다졌습니다. 이미 제작과정에서부터 "이전 작품보다 미학적으로 더 나아가 어렵다더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올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을 때 평론가들은 극찬을 했지만 일부 관객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유명하다고 소문 날대로 난, 하지만 무지하게 어렵고 졸린 심오한 예술영화를 접할 때처럼 "그래! 내가 돈내고 즐기러 온게 아니지. 이건 엄연히 업무의 일부야!"하며 나름 비장한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결론은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감을 활짝 열고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즐기면 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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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탄탄한 글 실력에 멋진 외모까지 갖춘 젊은 작가 민우(강동원)는 요 며칠 누군가 쫓아오고 감시하는 시선을 느낍니다.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며 자주 깨어나는 등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출판사에 납품해야할 새 소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며 괴로워하는데 출판사 편집장은 '금보다 더 비싸다는 다금바리 회'를 접대하며 집요하게 독촉합니다. 어느 날, 꿈인지 생시인지 넓은 대로에서 무언가에 이끌려 들어간 좁은 골목길에 있는 루팡 바를 찾고 거기서 자신을 훔쳐보던 의문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첫사랑이었던 미미(이연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민우는 미미의 실체를 알기 위해 고향에서 벌어지는 동창생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루팡 바를 다시 찾기도 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잣집 딸로 민우와 곧 결혼을 앞둔  약혼녀 은혜(공효진)는 불안한 시선으로 이런 민우를 지켜봅니다.

줄거리는 작가인 남자 주인공이 현재의 약혼녀와 과거의 첫사랑 여인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단순한 삼각 멜로의 공식으로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합니다. 이명세 감독은 주인공 민우의 심리를 따라가며 꿈과 현실, 환상과 회상,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조를 풀어냅니다. 어느 것이 꿈이고 현실인지, 왜 그런 꿈을 꾸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또 원래 꿈이라는 것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초반에는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이야기 전개를 중요시하고 전후 사정, 인과 관계에 대한 친절한 설명에 익숙한 관객들이 관습적으로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는 관람방식을 고집한다면 당혹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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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면 한 장면이 치밀한 미학적 계산에서 나온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여름 길거리 장면과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이 전개되는 과거 미용실 앞 골목 등은 관객의 눈을 압도합니다. 미용실 앞에서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카메라에서 멀어지면서 반대 방향, 즉 카메라 쪽으로 연막소독 오토바이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인물과 물체의 움직임과 방향, 뭉게뭉게 피어나는 인공적인 흰 연기의 움직임에서 시각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운드의 활용도 독특합니다. 장면마다 사용되는 음악과 음향은 장면이 전환될 때도 매끄럽게 이어지고, 선풍기 바람에 찌그러지는 사람 목소리도 상당히 실험적인 시도지만 효율적으로 사용됩니다. 복잡한 민우의 집과 단순한 구조에 신비스런 조명으로 힘을 준 루팡 바, 액자속 액자 그림으로 연결되는 단순한 구조의  일식집은 그 폭이 점점 줄어들기도 합니다. 영화의 품격을 신기술 개발이나 도입 여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M]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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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인공미라는 것은 눈부신 햇살이나 첫사랑의 아련함 같은 요소에서 특징적인 부분을 잡아내 과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인공미가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도드라진 부분을 추출하고 그 부분을 강조하는 인공미이기에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거나 회상할 때 언제 어디에 가서 어떻게 했다는 식의 이야기 줄거리를 기억하는 것보다는 ‘그 때 그녀와 손잡고 걷다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은 참 파랬고 햇살은 참 눈부셨었지!’ 하는 식으로 이미지의 편린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M]은 관객을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다가 시각과 촉각, 청각을 살살 자극해 결국 감정의 재채기를 하게 만드는 특이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꽃미남 스타 강동원은 검은 뿔테 안경에 독특한 M자형 머리를 하고 나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젊은 작가를 연기합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한없이 가볍게 과장된 억양의 연극적 대사도 뿜어냅니다. 깜찍하고 청순한 용모의 이연희도 유령과 과거를 오가는 미미 모습을 잘 연기하고 가장 현실적인 인물인 은혜역의 공효진도 균형을 잘 잡아나갑니다.

이런 인공미와 계산된 연기 등을 통해 이명세 감독은 인간이라면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 첫사랑의 강렬한 기억과 추억, 그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는 점입니다. 꿈속에서 울었는데 깨어보니 실제로도 울고 있었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뒤죽박죽 혼란스럽지만 정서적 울림이 강한 아름답고 아픈 꿈을 꾸고 난 것 같습니다. 영화가 음악, 회화, 사진, 디자인 등 다른 예술 장르를 녹여내는 종합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명세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여러번 나오는 정훈희의 30년전 노래 [안개]가 요즘에도 전혀 구리지 않은 세련된 명곡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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