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새해, 어떻게 살까 -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19.01.06 07:39 수정 2019.01.06 19:0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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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71 : 새해, 어떻게 살까 –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명제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93세 되는 가을, 나는 자다가 깨어나 메모를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새해를 여는 첫 '북적북적'의 선택은 '백년을 살아보니'입니다. 올해 기해년으로 100세가 돼 요즘 여러 미디어에서도 화제인 철학자이자 수필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 2016년에 펴낸 책입니다. (한국식 세는 나이 기준. 이 글에서 이하 나이 기준은 모두 세는 나이로 통일) 이 책을 쓰셨을 땐 사실 97세였는데, 올해 정말 문자 그대로 100세가 되셨습니다.

2019년, 100세가 된 한국인에게 그 숫자가 의미하는 시간들은 무엇일까요.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김형석 교수는 윤동주 시인과 동급생이었고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그의 마지막 강연을 직접 들은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김일성 주석 집에 초대받아 가서 아침을 함께 먹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몇 해 전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세무사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를 만난 세무사가, 자기 사무실로 오다가 혹 손기정 옹을 뵈었으냐고 물었다. 못 보았다고 했더니, 조금 전에 그 사무실을 다녀가셨다고 얘기하면서 이제는 많이 늙으셔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 어른깨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보다도 연세가 높았기 때문이다.

세무사는 그 분을 보내드리고 나서 자기 마음이 무거운 반성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다. 손 옹이 찾아와 "최 선생, 바쁘지 않으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내가 요사이 어디서 상을 받은 것이 있는데, 상금도 생겼다고. 그래서 공짜로 생긴 돈이니까 세금을 먼저 내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는데,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라고 한 것이었다. 세무사가 "선생님은 연세도 높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고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지금까지 한평생 얼마나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살았는데. 세금을 먼저 내야지. 내가 이제 나라를 위해서 도움을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 세무사가 그러면 도와드리겠다고 말하고, 계산해 보여드렸다. 그 계산서를 살펴본 손 옹은 "고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적은 돈이면 내나 마나지. 좀더 많이 내는 방법으로 바꿀 수는 없나?" 요청해왔다. 세무사가 다시 법적으로 가장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방법으로 계산해드렸더니 그제야 만족해하면서 "됐어, 그만큼은 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라면서 정리하고 돌아갔다는 설명이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스스로를 봅니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 더, '아 어른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절실하게 갖게 되기도 합니다. '어른이 없는 사회는 위험하다'라는 말에 대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책은, 김형석 명예교수님도 책 앞머리에 밝히시고 있듯이, 저나 지금 '북적북적'을 즐겨 들으시는 대다수의 분들이 아직 가닿지 않은 연령대인 노년들을 위한 책입니다. 결혼이나 가족관을 비롯해서, 요즘의 시선으로 보자면 '옛날 생각이다'라는 얘기를 들을 만한 대목들도 있고요. 제가 바로바로 공감할 수 있는 얘기들만 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진정한 어른'이 쓰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시대가 다를지언정, 저 뿐 아니라 누구와도, 앞으로 백년 뒤에 태어날 사람과도 대화하고 조언해 주실 수 있는 어른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점보다 '우리가 서로 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라는 것을 점점 더 깊이 깨달아가게 되는 가운데 만난, "먼저 걸어가 보시니 이런 건 어떠셨어요" 찾아뵙고 여쭙고 싶은 어른을 뵙고 조언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치과 치료를 받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은 전부 다른 사람이 준 것이다. 모자도, 양복도, 신발도 그렇다. 어떤 것은 호주의 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양을 쳐서 보내준 것이고, 미국 텍사스의 어떤 사람이 목축을 해 보내준 가죽도 있다. 또 모자와 옷을 만들기 위해 수고해준 수많인 사람들 덕분에 살고 있다. 안경을 만들어준 기술자, 치과에서 도움을 베풀어준 의사와 간호사, 병들었을 때 사랑을 베풀어준 여러분들,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했고, 이렇게 살게 해준 모든 사람들의 혜택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학문도 모두가 스승과 다른 학자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생명과 인생 자체가 부모, 가족과 더불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많은 분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르치는 일 한 가지만 하면 된다. 또 그 한 가지를 열심히 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 온다. 얼마나 아름답고 착한 세상인가. 그 한 가지만이라도 정성껏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뜻과 운명은 누구도 모른다. 철없을 때 친구들은 추억마지 사라지고 철들었을 때의 친구들은 헤어질 운명이었던 것 같다. 역사가 안겨준 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우리들의 우정은 사회적 공감을 얻으면서 오래 남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과 그 의미는 어떤 섭리에 따른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직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은 그 일 때문에, 또 일을 성취해나가는 기간에, 어떤 인간적 에너지 같은 것이 작용해 건강을 돕지 않았는가, 하는 좁은 경험에서 얻은 현실이다."

"그날 나는 좀 색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흔히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다고 말한다. 예절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최근에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누구나 걱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만 나무랄 필요가 없다. 우리 젊은이들은 보고 배운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이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버스나 택시를 타고 내릴 때는 반드시 기사들에게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라든가 "수고하십시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간단한 인사다. 그 기사들이 불친절하다든가 불만스럽다고 불평하기 전에 나부터 친절해지고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교통부 장관 떄문에 기쁘다거나 즐거움을 얻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나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사분들 덕분에 편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갖고 대해주지 못하는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김형석 교수님이 이 책을 통털어서 가장 강조하시는 바를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다.' 그리고, '사회와 이웃을 위해 일을 사랑하며 일하는 것이 노동의 가치일 뿐 아니라, 인생의 가치이다'라는 겁니다.

격동의 한국사 100년을 살아온 노철학자가 '100년을 살아봤더니 그렇더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마음 깊이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100년을 살고 돌아봐도 그렇더라, 면, 인생은 태어나 보는 것, 한 번 살아보는 것이 그래도 역시 참 좋은 일이 아닐까요.

저도 여전히 '오늘은 뭘 하지' '내일은 뭘 하는 날이지'.... '무엇'에 허덕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무엇'들 앞에... 자, 어떻게 살 것인가. 연초에 참 어른을 모시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을 통해 얻었습니다.

100년을 지금 말할 순 없어도, 올해 어떻게 살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올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출판사 '덴스토리'의 낭독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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