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그렇게 기레기가 된다

SNS, 거친 무의식의 시대

이경원 기자 leekw@sbs.co.kr

작성 2018.12.03 10:26 수정 2018.12.03 10:3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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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북미회담 프레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지난 6월,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 때였습니다. 진행 PD 자격으로 싱가포르 출장을 갔던 터라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현장 취재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우리 언론사도 현장에서 있었다."는 생색내기가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했던 취재원은 하나둘 올라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트럼프의 트위터로 공표되고 있었습니다.

● 트럼프와 SNS

전부터 그랬습니다. 북미 정상회담이 연기될 거란 내용, 김정은 위원장이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통해 친서를 건넸다는 소식 등 중간중간 굵직한 내용을 전했던 건 뉴욕타임스도, CNN도, AP도 아닌 트럼프 자신의 트위터였습니다. 트럼프 트위터는 미국 정가 제1의 통신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언론은 트럼프의 트위터를 받아쓰기 바빴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우리 시대 미디어 환경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이 느슨한 과점 형태로 정보 시장을 나눠 가졌던 시대, 트럼프는 결코 주목할 만한 정치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언론 입장에서는 히스패닉 같은 외집단에 대해 직설적인 발언을 쏟아 내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트럼프를 주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있는 미국 주류 언론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정치인은 두 가지 갈림길에 놓입니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잠시나마 자신의 성향을 누그러뜨려 주류 언론과의 화해를 도모할 것인가. 야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보통은 후자를 택합니다. 주류 언론과 척을 진 정치인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제3의 길을 택했습니다. 바로 SNS였습니다. 주류 언론이라는 거대 유통망을 건너 뛰고, 대중과 SNS로 직거래하며 소통했습니다. CNN과 뉴욕타임스 같은 주류 언론을 믿지 못할 '가짜 뉴스'라고 거세게 비난하면서.

그의 선택은 기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불법 이민자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무슬림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그의 트위터 메시지는, 외집단에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던 대중의 거친 무의식과 교묘히 결합하며 호응을 얻었고 입소문을 탔습니다. 기존의 주류 언론과 주류 정치인들이 도덕적 이유로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한 말들을 수면 위에 꺼내 들며 상승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주류에 대한 거부감, 나아가 외집단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숙주로 트럼프의 체급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불렀습니다.
트럼프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선택의 기로에 놓인 건 역설적이게도 주류 언론이었습니다. 늘 그래왔듯 트럼프를 기사에서 배제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 현상' 혹은 '트렌드'란 레테르를 붙여 트럼프를 기사화할 것인가. 언론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트럼프라는 정치인은 이미 SNS를 통해 거물의 반열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물론 그 톤은 주로 비판적이었지만, 그 자체로 트럼프는 '논란'이 됐고, 더 기민하게 소비됐습니다. 아니, 오히려 대중은 주류 언론의 '비판'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에게 트럼프는 할 말 하는 정치인이었고, 주류 언론은 도덕과 윤리를 들먹이며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트럼프는 여전히 자신의 SNS로 대중과 직거래하고 있고, 또 여전히 거친 말을 주고받으며 주류 언론과 싸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언론은 트럼프 트위터에 제1의 통신사 자리를 내주며 트럼프가 생산해내는 텍스트를 받아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기존 웹사이트가 제공하지 못했던 풍속도였습니다. 1990년대 인터넷의 등장은 정보의 지형을 바꿔 놨습니다. 누구나 웹사이트에 접속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류 언론의 게이트키핑은 강력했습니다. 웹사이트는 인터넷을 하는 누구에게나 접속권을 주었지만, 정작 중요한 자산을 구식 배급 플랫폼과 공유했습니다. 영향력은 과거보다 덜했지만, 주류 언론이 기사의 방향을 정하고 풀어내는 데 큰 장애가 없었습니다. SNS 시대, 그 지형이 또 달라졌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조 보그스라는 사람의 개인 홈피나 뉴욕타임스의 홈피나 똑같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조 보그스가 전 세계의 예비 독자들에게 그의 웹사이트를 인지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셜 미디어가 이 마지막 제약 조건을 약하게 만들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한 사용자가 만든 콘텐츠를 그 사용자와 연결된 모든 사용자가 신속하게 리포스트(re-post)할 수 있다. 콘텐츠에 새로움이나 흥미로움만 충분하다면, 기존에 연결이 거의 없던 사람이라도 단 몇 분 만에 무수한 시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서로 의사소통하는 확산 네트워크를 만듦으로써, 소셜 미디어는 결국 정보 배급의 역학을 뒤바꿔 놓았다.
- 야스차 뭉크, 함규진 옮김, 2018, <위험한 민주주의>, 와이즈베리, 182~183쪽

어쩌면 트럼프는 미디어의 흐름을 잘 읽어냈던 꽤나 영악한 미디어 학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보 배급의 판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마셜 맥루한의 익숙한 선언은, SNS 시대, "메시지는 미디어"로 대체돼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트럼프 트위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거친 감정의 시대, 저널리즘

그간 언론은 힘센 권력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언론은 때때로 저널리즘의 본령에 반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2016년의 촛불은 우리 언론이 권력과 자본에 얼마나 유착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우화에 가까웠습니다. 언론 스스로 자초한 거라는 비판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기레기가 됐습니다.

SNS는 그사이 대안 공론장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광장과 온라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정치적 전위를 창조해 낸 마중물과 같았습니다. 개개인의 생각은 SNS라는 발 빠른 천리마를 통해 급속도로 유통됐고, 그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 욕망이 됐습니다. 우리 시대 민주주의는 분명 SNS에 부채가 있습니다.

하지만, SNS가 기민하게 연결해줬던 건 공공선(公共善)만이 아니었습니다. 개개인의 편견의 조각들, 그 거친 무의식까지 얽히고설키면서 전에는 없던 거대한 집단 상상력을 만들어냈습니다. 외집단에 대한 증오, 다른 성(性)에 대한 편견과 같은 혐오는 SNS를 타고 사회 현상이 됐습니다. 촛불 이후 혐오 담론이 급속도로 퍼진 건 우연만이 아닐 겁니다.

언론은 이 지점에서 방향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SNS에서 주조된 집단 상상력을 어떻게 판독하고 선택할지의 문제였습니다. 대차게 비판해야 할지, 아니면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이런 현상도 있다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할지, 아예 SNS에 편승해 그 무의식을 지지해버릴지. 마치 트럼프에 열광하는 대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했던 미국의 주류 언론처럼.

선택은 쉽지 않았습니다. 언론사의 게이트키핑 과정은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SNS에서 만들어진 담론과, 언론사의 게이트키핑을 통해 드러난 담론의 차이를 쉽게 대비시킬 수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게이트키핑을 하는지 나름의 시각을 갖고 훤히 들여다볼 망원경이 생겼습니다. SNS 담론과 언론사가 만든 기사의 간극이 크면 '허위', '과장', '조작', '선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제주 난민을 향해 SNS에 소환됐던 '미개한 이슬람주의자', '잠재적 성범죄자', '테러리스트' 같은 표제어들은, 일부 언론의 팩트 체크 대상이 됐습니다. 난민 혐오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보도가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대중의 생각에 반하는 언론 엘리트의 도덕적 우월감으로 읽었습니다. 트럼프에 대한 미국 주류 언론의 비판이 비판받았었던 것처럼. 또 그렇게 기레기가 됐습니다.

저는 일 년 반 가까이 뉴스편집부에서 진행 업무를 맡았습니다. 뉴스 아이템을 솎아내며 느낀 건,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기사를 받아쓰는 '거친 권력의 시대'는 한숨 돌린 것 같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한데 모인 거친 무의식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즉 SNS를 통해 누증된 집단 감정의 문제가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닫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면 호되게 비판하면 된다는 저널리즘의 공식이 있지만, 대중 감정의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좌와 우의 진영 논리로 단순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중을 향해 '악(惡)하다'며 손가락질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혐오 현상은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단죄할 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게이트키퍼들의 회의를 참관하면 이게 늘 딜레마였습니다. 신중하게, 최대한 팩트만 압축적으로 풀어내자는 식으로 정리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예민해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과거에 그랬던 대로 당신들의 편견은 기막히게 악하다며 윤리적 훈계 따위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존심 버려버리고 SNS에서 만들어진 사나운 말들을 적절히 받아쓰기해야 하는지, 또 아니면 이런 이슈들 다 회피해버리고 모두가 손가락질할 수 있는 흉악범이나 찾아 헤매는 게 맞는 것인지. 뉴스편집부를 떠나 현장으로 돌아가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입니다.

권력 말고 감정도 견제해야 하는 시대. 아니, 어쩌면 감정도 권력이 돼버린 시대. SNS 시대 저널리즘의 본령은, 힘센 자들에 대한 견제뿐만이 아니라, 거칠게 분출하는 집단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또 그렇게 기레기가 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시청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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