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서울시만 모른다

'과정의 불공정'이 '고용 세습' 논란의 시작과 끝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작성 2018.10.29 09:3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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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량진에 한 번이라도 가 봤다면 안다. 이 나라 청년들이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공공부문 취직을 갈구하는지. 한껏 꾸미고 뽐내며 다니고 싶은 나이의 그들은 엇비슷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3천 원짜리 컵밥과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이들이 젊음을 저당 잡혀가면서까지 공공부문을 꿈꾸는 이유는 하나다. 그곳이 '공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말 그대로 개념에만 머무르는 요즘, 안정된 신분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그곳에선 학벌도 부모 재력도 따지지 않는 정의가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무너진 게 '서울교통공사 고용세습' 논란의 본질이다. 서울시가 밝힌 대로 "전수에 가까운" 1만 7천54명 가운데 사내 친인척이 있는 직원만 1천912명, 11.2%에 달했다. 무기계약직에서 일반직으로 전환된 직원 1천285명 중 112명이 기존 직원과 6촌 이내 친족이란 사실 앞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셈'이었다. 가장 공정해야 할 서울시 산하 공기업이 실은 가족끼리 얽히고설켜 일하는 곳이었음이 드러난 순간 서울시가 먼저 할 일은 '사과'와 '전수 조사 약속'이어야 했다.

이걸 "구의역 사고 이후에 들어온 건 70여 명에 불과하다"거나 "공사 직원이 실제 가족 채용 과정에서 위법을 저질렀어야 비리 아니냐" 강변하다 보니 걸음이 꼬였다. 심지어 비판자들을 상대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윽박지른 대목에선 '내가 곧 정의'라는 오만함마저 묻어났다. 어쨌건 정규직이 된 건 교통공사 직원의 자녀와 친척, 그리고 친구다.
서울교통공사 고용세습 논란압권은 언론과 국회가 "을과 을의 싸움을 조장하고 있다"고 목청 높인 데 있었다. 오늘날 청년에게 '공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 그런 소릴 해선 안 됐다.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은 그저 공정한 링에서 당당히 자기 실력을 겨루고 싶은 출전자일 뿐이다. 이들이 진출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건 서울시의 의무지 '을'에게 베푸는 시혜 같은 게 아니다. 단지 공정을 바라는 청년들을 '을'이라 일컫는 전근대적 정신 상태야말로 '보건 시혜' 대상이란 비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논란을 종식할 방법으로 서울시가 감사원 감사를 드는 것도 우스운 얘기다. 공사 직원 1만 7천여 명 모두한테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받아 대조할 것인가. 그조차 직계 존비속 관계 말고는 알 수가 없다. 서울시가 주장하는 '비리'의 요건, 즉 실제 위력을 행사한 채용이었는지는 더욱 밝힐 수 없다.

어차피 이 사안은 수사 기관이 아니면 전모를 못 밝힌다. 서울시 스스로 자체 조사할 의지가 없음을 공공연히 밝히며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였던 것도 '개인 정보'다. 이 핑계로 국회와 언론의 자료 요구도 회피했다. 그러고는 사안을 입체적으로 접근한 언론 보도와 국회 의혹 제기는 가짜뉴스로 규정했다. '밀리면 끝장', '버티면 된다'는 고집만 보인다.

서울시와 일부 노동운동가는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 일자리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 열악한 처우로 공개 채용 자체가 어려웠다고도 말한다. '친족 채용의 불가피성'을 들먹이며 '고난에 대한 보상'이 무슨 문제냐는 투인데, 냉정한 토론을 방해하는 사고다. 그런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로 전환하는 것과 기존 피고용자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게 이번 논란으로 확인된 국민의 인식이다.

양질의 일자리로 전환됐다는 직군의 고용 장벽이 오히려 높아질 거란 지적도 귀 담아 들을만하다. 차량기지 식당 조리사나 지하철 보안관 같은 직군은 주로 경력단절 여성이나 고용시장 탈락자들이 문을 두드려 온 영역이다. 이 영역이 무기계약직이란 이름의 고용 보장을 넘어 '공사 일반직'이 되면 경쟁이 심화되고 자격요건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벌써 교통공사 노조는 식당 조리사 자리가 "전국 대학 조리학과 출신이나 전문학원 전공자"가 바라볼 양질의 일자리가 됐다고 자평한다. 상대적으로 비숙련·저학력 노동자라도 유연하게 취업 가능했던 공공부문 일자리가 사라진 셈이다.
1∼8월 30·40대 취업자 15만2천명↓▶ [단독] '가족 채용 비리' 112명 말고 더 있다…못 믿을 발표
▶ [단독] "가족 30% 뽑아" 서울교통공사 용역사 채용 주먹구구

지난 24일에 보도했듯 교통공사 채용 논란은 이제 교통공사 출자회사와 용역업체에서 이뤄진 가족 채용에까지 옮겨갔다. 과거 지하철 구조조정 과정서 일감을 받는 조건으로 상당수 공사 퇴직자를 '낙하산' 채용한 용역사에서 주먹구구 가족 채용이 이뤄졌고, 이들이 훗날 출자회사로, 교통공사로 정규직 입사한 사례가 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6개 출자회사 4천500여 명과 용역사 임직원의 관계를 전수조사하면 그 규모가 상당할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다. 서울시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다행인 건 이번 논란이 생산적 토론 가능성도 남겼다는 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논의의 장이 열린 거다. 비정규직은 과연 절대 악인지, 노동 유연성이란 개념은 무조건 철폐 대상인지, 합리적 차별의 한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따위 이슈의 심도 깊은 논의 말이다. 여기서 확실한 건 적어도 공공부문의 대규모 '비경쟁 채용', 다시 말해 특정 집단에 대한 '기득권 인정'은 이제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직 과정의 불공정. 이것이 이번 논란의 처음이자 끝이다. 노량진 청년들도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와 과정의 평등을 바란다. 그 바람을 공공부문만큼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었기에 묵묵히 공부했다. 그래서 "비리가 아니다"라는 서울시의 해명은 그들 귀에 가닿지 않는다. 시혜를 바라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서울시가 끼친 상처가 크고 깊다. 그걸 서울시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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