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전두환 정권은 왜 형제복지원 수사를 방해했나" 32년 만에 드러난 형제복지원의 진실

정윤식 기자 jys@sbs.co.kr

작성 2018.10.14 08:59 수정 2018.10.14 10:0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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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리포트+] "전두환 정권은 왜 형제복지원 수사를 방해했나" 32년 만에 드러난 형제복지원의 진실
'한국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불렸던 부산 형제복지원. 강제노역과 구타, 성폭행, 가혹행위가 이어졌던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513명에 달합니다.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강제수용 당시 12살, 1983년부터 3년 동안 감금)

"맞아 죽은 이를 여럿 봤다. 상처를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기도 했다" (강제수용 당시 12살, 1982년부터 6년 동안 감금)

지난 10일 이 사건을 조사한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은 당시 정부와 검찰 지휘부 등이 형제복지원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외압의 실체가 32년 만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겁니다.

당시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원장의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가해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피해자 보상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은폐하고 희생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던 이들은 누구일까요? 형제복지원 사건을 숨겨 얻은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갔을까요?

■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박인근과 전두환

형제복지원은 지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시 북구에서 운영됐던 수용시설입니다.설립자는 직업군인 출신으로 알려진 고 박인근 원장(1930~2016년)입니다.

보육시설로 설립된 이곳은 '부랑인 보호시설'로 정관을 변경하며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말부터 수감자가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이 시점은 전두환이 실권을 잡은 시기였습니다. 전두환은 대통령에 오른 1981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도시 정화에 나섰습니다. 전두환은 같은 해 4월 국무총리에게 "최근 길거리에서 장애인들의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를 일절 단속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지시 후 불과 열흘 뒤부터 8일간 1,850명이 수용시설에 수감 됐습니다.

당시 2만 명에 가까운 경찰과 공무원이 동원돼 거리의 부랑인을 단속한 근거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였습니다. 부랑인이라고 판단되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용시설에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문제는 수감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는 겁니다.형제복지원 리포트+당시 경찰은 형제복지원에 사람들을 끌고 가는 과정에서 신원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생의 경우 심지어 이름을 다른 걸로 쓴 뒤 고아로 처리하기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넣었다"…경찰은 왜 그렇게나 단속에 열을 올렸나

조사단은 당시 경찰의 근무 평점제도에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당시 경찰이 부랑인을 조사해 유치장에 넣는 '구류'를 선고받게 하면 2~3점의 근무평점을 받았는데 형제복지원에 입소하게 하면 5점을 받았습니다.형제복지원 리포트+1986년 기준으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전체 인원 3,975명 가운데 3,117명이 경찰의 단속에 의해 수용됐습니다. 당시 지역 구청 공무원의 단속으로 형제복지원에 가게 된 사람(253명)의 12배가 넘는 숫자입니다. 이런 불법 감금과 강제노역, 수시로 자행된 구타와 학대 속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복지원 설립 3년째부터 급격히 늘기 시작한 사망자는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른 이듬해부터는 한 해 50명을 넘어섰습니다.형제복지원 리포트+당시 기록된 주된 사망 원인은 '정신박약, 쇠약, 암 추정'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사단은 거짓으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수의 피해자들이 목격했다는 구타에 의한 사망을 의도적으로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실제로 1985년부터 이듬해까지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의 사망 진단을 가장 많이 기록했던 의사 정 모 씨는 사망진단서를 허위로 적은 사실이 인정돼 형사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 "썩지 않은 곳이 없었다"…검찰, 정부, 시·구청까지 형제복지원을 옹호했다

인권침해 논란이 커지자 당시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한 검사가 복지원이 위치한 산 중턱 작업장에 감금된 수용자들을 목격하고 수사를 진행했고 마침 35명이 집단 탈출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사는 외압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김용원 검사는 1987년 작성한 내부 정부 보고서에 이렇게 남겨놨습니다.

"명에 의하여 형제복지원 원장 박 모 씨에 대한 업무상횡령의 점 수사를 중단하였음"

"39회에 걸쳐 국고보조금 중 11억 3천540만 원을 횡령한 내용을 명에 의하여 6억 8천804만 원으로 공소장을 변경"

수사를 지휘했던 부산지검 차장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책임자이자 가해자인 박 원장을 석방해 불구속으로 기소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 전 검사는 박 원장에 대한 구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검찰총장의 지시가 내려와 20년에서 15년으로, 다시 10년으로 구형량이 줄어들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썩을 대로 썩은 건 정부와 시청, 구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복지원 리포트+박 원장이 구속되자 당시 보건사회부장관과 정무수석 비서관이 "검사 하나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훌륭한 원장을 구속했다"고 보고했고, 전두환은 법무부장관에게 "검찰이 쓸데없는 일을 했다. 원장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고 조사단은 밝혔습니다.

박 원장은 실제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부랑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을 관리·감독해야 할 부산시는 구청에 감독권을 모두 넘겼고 구청 개발국장은 박 원장에게서 받은 6천5백만 원의 돈으로 자기 땅을 샀습니다.

형제복지원 관리부장을 지냈던 사람은 당시 조사에서 "10년 동안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처리했다"고 털어놨습니다.

■ "죽음으로 덮을 수 없는 것"…1천억 원대 형제복지원장 일가 '재산 환수해야' 목소리 고조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 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가가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대검찰청은 이에 대해 "인권침해의 중대성과 국민들의 높은 관심과 염려를 잘 알고 있다"며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이 사건에 대해 다시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청구하면 재판이 다시 열릴 가능성이 커지고, 이에 따라 박 원장의 무죄 판결도 파기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나 유족의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탄력받게 됩니다. 부산시도 과거의 관리감독 소홀을 인정하고 피해자 지원과 관련한 실무 협상에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멉니다. 1차 가해자인 박 원장이 지난 2016년 숨져 마땅한 법적 처벌을 받게 할 방법은 없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우선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킨 대가를 어떻게든 받아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박 원장은 당시 매년 10억~20억 원의 국고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지난 2011년 박 원장 소유로 알려진 호주의 골프장과 대형 스포츠센터 등 자녀들의 재산을 현지에서 추적하기도 했습니다. 박 원장의 아들과 사위 등 가족들은 당시 부동산 구입비 출처에 대한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시민사회단체는 박 원장 일가의 국내외 재산을 약 1천억 원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피와 땀을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운 셈입니다.

지은 죄에 맞는 마땅한 처벌과 확실한 보상, 그것만이 30여 년간 악몽에 시달리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위한 진정한 위로일 겁니다.

(그래픽 : 감호정, 화면 출처 : SBS '그것이 알고싶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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