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전기도둑' 셋톱박스, 5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이유

김수형 기자 sean@sbs.co.kr

작성 2018.09.03 17:35 수정 2018.09.05 16:1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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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의 260배, 5년 전 보도했던 '전기 먹는 하마' 셋톱박스
 
올여름 유난히 더워서인지 에어컨을 틀면서도 전기요금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마 전 국민이 전기요금에 올해처럼 신경을 많이 썼던 해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가동 전력이야 소비자들이 전자제품을 사용하고 있다고 인식을 한다지만, 대기 전력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거라 더 아깝습니다. 그게 무시할 만큼 적은 액수라면 모를까, 꽤 큰 액수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5년 전 취재했던 '전기 먹는 하마' 셋톱박스 보도를 다시 살펴보게 됐습니다. 지난 2013년 한국전기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일반 가정집에 설치된 전자제품의 대기 전력을 측정했었는데, 셋톱박스 수치는 놀라웠습니다. 42인치 LED TV의 대기 전력은 0.065W였는데, 셋톱박스는 17.39W였던 겁니다. 수치로 260배 넘게 나왔습니다. 해당 가정집에 나온 전기요금 구간에 적용해보니 셋톱박스로만 한 달에 2,850원을 냈습니다. 전자레인지, 전기밥솥, 에어컨도 대기전력에서는 셋톱박스에 상대가 안 됐습니다. 당시 국정감사를 앞두고 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셋톱박스의 대기전력을 입수해 보도했고, 정부도 이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관련기사 바로가기 : '전기 먹는 하마' 셋톱박스…TV의 260배

● 전원 안켜도 전기요금 '줄줄'…변한 게 없는 셋톱박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만큼 셋톱박스도 업그레이드 되면서 대기전력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았을까 예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나가 실측해보니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5년 전 취재와 똑같은 방식으로 가정집에 설치된 가전제품의 대기 전력을 실측했습니다. 셋톱박스는 15W가 나왔습니다. 에어컨은 7W, 세탁기는 2W, 전자레인지는 3W로 측정됐습니다. 집안 곳곳에 있는 전자제품 대기 전력을 합쳐보니 30W가 넘었는데, 절반이 셋톱박스에서 나왔던 겁니다. 셋톱박스 대기전력으로만 한 달 3천 원꼴입니다. 일 년 환산하면 4만 원 정도는 그냥 허공으로 사라지는 셈입니다. 
셋톱박스[취재파일]'전기도둑' 셋톱박스, 5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이유/결과이번에도 자유 한국당 박대출 의원실을 통해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셋톱박스의 대기전력을 입수해 비교해봤습니다. CJ헬로비전의 한 셋톱박스는 대기전력이 24W를 넘었고, 딜라이브의 셋톱박스도 20W 넘게 대기전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케이블 방송사 셋톱박스 57개를 살펴보니 8개를 제외한 49개 모두 대기전력이 10W를 넘었습니다. 평균을 내보니 IPTV 셋톱박스의 대기전력만 조금 낮아졌고, 케이블 방송은 거의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5년이 지났는데도 전기도둑 셋톱박스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 "전력 기준 넘기면 시판 금지"…초강력 규제에 숨겨진 구멍

 그동안 업계와 정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취재하면서 상당히 강력한 규제가 들어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15년부터 셋톱박스에도 최저소비효율기준을 도입해 대기 전력에서도 일정 전력 기준을 넘기면 시판을 금지했습니다. 위반시에는 2천만 원 이하 벌금까지 부과할 수 있습니다. 고시를 찾아보니 케이블방송은 16W, IPTV는 12W, 위성은 13W였습니다. 하지만 전수 조사한 결과만 봐도 기준을 넘기는 셋톱박스는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판매 금지에 벌금을 부과해야 하는 건데 버젓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또 다른 기준이 있었습니다. 절전모드(고시에는 수동대기모드라고 표현돼 있습니다.)에 대한 전력 상한선을 따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절전 모드는 셋톱박스가 자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마트폰도 안 보이지만 백그라운드에서 앱을 자동으로 업데이트를 하는데, 셋톱박스도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하지만 절전모드로 바꿔놓으면 그런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전원을 뽑지는 않았지만, 거의 비슷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 기준은 3W입니다. 문제는 이 기준을 충족하면 다른 기준은 적용받지 않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정문은 들어가기 어렵게 만들어놓고 옆문은 활짝 열어놓은 것과 비슷합니다. 업체들은 대기전력 기준을 피하고, 절전모드 기준을 충족시켜 셋톱박스를 출시해왔던 겁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두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면 비용이 엄청나게 올라간다"며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절전 모드로 기준을 통과시켜 유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쉬운 기준, 어려운 기준 두 개를 주고 안 지키면 못 판다고 엄포를 놓기는 했지만, 그 기준을 무서워하는 업체는 없습니다. 어차피 요금은 소비자들 호주머니에서 잘 모르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형식적인 기준만 만들어놓으면 업체나 정부 모두 행복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에너지효율등급
● '대기전력의 왕' 셋톱박스에만 빠진 5단계 에너지 등급 마크

전력 소비가 많은 가전 제품 대부분에는 에너지소비효율등급 마크가 붙어 있습니다. 5등급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품이 몇 등급인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월간소비전력량과 CO2배출량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연간 전기요금이 얼마인지 알 수 있어 편리합니다. 등급이 낮으면 선뜻 손이 안가기 때문에 업체들이 앞다퉈 등급이 높은 걸로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셋톱박스에는 에너지 효율등급 마크가 없습니다. 유료방송을 신청해서 셋톱박스를 설치해줄 때 이 제품이 전력을 얼마나 소비하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수준이라면 4등급 5등급 제품이 즐비할 텐데 이런 걸 가져와서 설치하겠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 소비자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기 덜먹는 걸 가져오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셋톱박스는 이런 소비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원천 봉쇄해놨습니다. 셋톱박스 전력 자료를 보면 편차가 상당히 큽니다. 에너지 효율이 낮은 셋톱박스가 우리 집에 배정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는 다시 거론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대책이 나오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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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셋톱박스 전력 현황(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실 제공)
유료방송 셋톱박스 전력 현황(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실 제공)1유료방송 셋톱박스 전력 현황(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실 제공)2유료방송 셋톱박스 전력 현황(자료 : 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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