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룸] 북적북적 150 : 미래의 한 명이 '마지막 한 명'에게 - 김숨 '한 명'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18.08.12 07:31 수정 2018.08.16 09:2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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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금복 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금을, 동숙 언니를, 한옥 언니를, 후남 언니를, 기숙 언니를.....그이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영화 <허스토리> 제작사 수필름 대표님께 몇 가지 여쭤보기 위해 최근에 전화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대표님이 이런저런 얘길 해주시다가, "민규동 감독을 말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도 해주셨습니다. 이른바 '위안부 영화'를 한다면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민 감독님이 "나 아니면 누가 이 영화를 하겠느냐"고 강한 의지로 추진해 완성된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허스토리>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감독이라면 그렇게 얘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아직 <허스토리>를 보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봐주십사 이 기회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잊혀진 '관부재판'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되살리는 일이 바로 이 제작진의 손에서 이뤄진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정말 좋은 영화,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이 이른바 '위안부 영화'를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대개 그런 거겠죠. 들어본 얘기 아냐. 늘 나오는 얘기 아냐. 우리 '그거' 뭔지 다 알잖아. '위안부' 소재의 다른 영화도 있었잖아...

그런데… 우리는 정말 알고 있나요?

<한 명>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오직 한 명이 남은 미래의 언젠가를 가정한 소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의 피해 사실을 지금까지 세상에 공개한 238분 가운데 한 분이 남게 됐을 때를 생각한 이야기입니다.

2018년 8월 12일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7명입니다. 지난해에만 8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여든 분, 쉰 분을 헤아리던 때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너무나도 빨리 이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 네덜란드 인 등 세계적으로) 20만 명을 헤아립니다. 20만 명입니다. 나는 '위안부' 피해자다, 세상을 향해 고발하고 나선 분들이 오히려 극소수였다는 것부터 우리는 많이 잊었습니다. 독일이 유태인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을 교과서 역사로 배우고 있는 것은 지당한 일이지만, 일본이 위안부 강제모집과 유린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상황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웅성대는 지금, 일본의 유네스코 로비로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조차 무산된 이 2018년, 아니다, 우리는 '위안부 피해'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해 여전히 조금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는 생각을 점점 더 절실하게 하게 됩니다.

<한 명>의 주인공은 세상에 드러난 238명 중 마지막이 될 그 한 명이 아닙니다. 끝까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고 돌아가셨을, 나머지 20만여 명 중의 한 명입니다.

"마지막 한 명이 혹시나 그이가 아닐까. 수년전 티브이에 나와 그 한마디를 듣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말하던. 신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 한마디를. 그 한마디를 평생 기다렸다는 이가 그녀는 아무래도 군자 같다. 침묵하던 그이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면서. 맨몸뚱이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이는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마저 훌렁 벗더니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동숙 언니를 태운 곳에 가보았다. 금복 언니와 분선이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금복 언니가 잿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금복 언니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은빛이 도는 재가 아련하게 일었다. 새벽빛을 받은 금복 언니의 허벅지는 핏줄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창백했다. 금복 언니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뭔가를 주워들었다. 희끄무레하고 둥근 그것은 동숙 언니의 머리뼈로, 새벽빛을 받아 기묘한 흰빛을 발했다. 금복 언니가 손으로 머리뼈에 묻은 재를 털었다. 금복 언니는 머리뼈를 광목천으로 감싸 가슴에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따뜻해....... 심장 같아."

"금복 언니는 동숙 언니의 머리뼈를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 옷가지들을 넣어두는 궤짝 속에 넣었다. 1년쯤 뒤 위안소를 떠날 때 금복 언니는 광목 보따리를 싸면서 머리뼈를 가장 먼저 챙겼다. 살아서 돌아가면 동숙 언니의 고향땅에 머리뼈를 묻어주겠다 했다."


이 책을 쓴 김숨 작가는 이 이야기가 정확히는 소설이라기보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습니다. 묘사가 너무 참혹해서 그 글자들 자체를 보는 눈을 자꾸 질끈 감아버리게 되는 대목마다, 이 얘기들이 소설가가 상상해 낼 수 있는 수위의 내용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듯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중 누가 어디에 한 증언을 인용한 것인지, 빼곡한 주석이 책 뒤에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참혹한 부분들 뿐 아니라, 그녀들이 그 참혹한 현실 안에서 인간성을 지키지 위해 몸부림치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보살피고, 사무치게 고향을 그리워한 부분들도 모두,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실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엮은 겁니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곳이 위안소라는 것을 몰랐다. 일본 군인을 받는 곳으로만 알았다. 중국인 마을에 갔다가 보았던 3층 벽돌집도 군인을 받는 곳으로만 알았다. 위안소니, 위안부니 하는 말을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다. 그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곳을 그저 창녀굴 같은 곳으로 알았다. 그곳이 위안소였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군인을 하하는 손님이라고도 했다. 군인들이 몰려오면 소녀들에게 손님 받아라 하고 말하고는 했다. 만주 위안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소녀들은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은 특히, '위안부 피해의 역사'에 대해 교묘하게 부정하는 일본이나 일부 여론에 대해 답하는 당사자들의 증언들을 심혈을 기울여 싣고 있습니다.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자발적인 성매매였다, 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핏대를 올려 밀고 있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은근히 동조하고 싶어하는 얘기죠. 그러나 일본군이 '위안소 운영' 핵심에 깊숙하게 연관돼 있음을 증명하는 증언들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반복적으로, 서로 합치하도록, 장기간에 걸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 세상에 나오신 것이 2차 대전 당시로부터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1991년인데도 그렇습니다. '한 명만이 남은 시간'이 아프게도 멀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과거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점점 더 위력이 강해지는 현재의 농간에 대한 피해 당사자들의 절규와 냉엄한 추궁을 그 어느 때보다도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녀는 마침내 그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그이를 만나는 게 평생을 벼르던 일 같다. 전날 그녀는 그이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는 방법을 서울미용실 여자에게 물어 알아두었다. 그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우연히도 여자가 정기검진을 다니는 대학병원이었다. 그녀는 그이가 자신과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이가 입원한 병원 또한 다른 도시에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가까이에 그이가 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던 탓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그렇게나 만나고 싶어 했으면서도 막상 그이를 만날 생각을 하자 그녀는 두렵고 떨린다."

김숨 작가는 2016년에 이 책을 쓰고, 올 7월에 신간 <흐르는 편지>를 냈습니다. 신간 <흐르는 편지>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일제강점기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그들의 내면에 좀더 밀착된 목소리를 내는 작품입니다. 사업을 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며 인생 경로가 완전히 달라져버린 <허스토리> 주인공의 실제 모델,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부터, "나 아니면 이 영화를 누가 하겠느냐"며 뜻을 굽히지 않은 민규동 감독, 그리고 <한 명>을 쓴 뒤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소설을 잇따라 펴내고 있는 김숨 작가까지... 이 역사를 대면한 뒤,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희망을 봅니다.

8월 14일은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입니다. 1991년 8월 14일, 광복절을 앞두고 김학순 할머니가 우리나라 처음으로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언했습니다. <한 명>을 읽으면서, "내가 피해자요"라고 세상에 나선 그 첫 순간들의 그녀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나서지 못한 20만 명의 마음을 아주 미약하나마 알 수 있을까, 조금은 무력감과 함께 고민해 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회가, 우리의 미래가,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일, 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낭독을 허락해 주신 출판사 '현대문학'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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