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北 엄포 뒤 南 "저강도 연합훈련"…또 '나쁜 선례'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작성 2018.06.04 11:12 수정 2018.06.04 11:17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취재파일] 北 엄포 뒤 南 '연합훈련 저강도북한이 어제(3일) 오전 또 한미연합훈련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멀찍이 여름에 열리는, 태평양 연안국 해군의 연합훈련 ‘림팩’과 하반기 한미연합훈련 을지 프리덤 가디언입니다. 노동신문의 개인 필명 해설이라는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건들지 않기로 했던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명백한 언어 도발입니다.

북한의 이런 위협은 처음이 아니니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정오 쯤 돼서 한미 군 당국이 “북미 정상회담 여건 조성을 위해 한미연합훈련을 로키(low key) 즉 저강도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로키 발언의 당사자는 송영무 국방장관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이 보기에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하니까 한미가 곧바로 꼬리 내린다”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이 한미연합 공군 훈련 맥스선더(Max Thunder)와 전략폭격기 B-52 전개 계획을 비난하자 문정인 외교안보특보가 “송영무 장관이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B-52를 한반도에 전개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고 공개 석상에서 말했습니다. 실제로 B-52는 한반도에 오지 않았습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기침하면 한미가 주춤하는 고약한 선례가 굳어질까 우려됩니다. 북한이 생떼 쓰고 한미가 받아주는 모양새가 반복되면, 그것도 가장 비타협적이어야 할 군부가 그런 헐렁한 모습을 자주 보이면 북미 정상회담에 하등 도움이 안됩니다. 치열한 샅바싸움 과정에 북한에게 괜시리 헛바람만 들게 하는 꼴입니다.
그제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 회담● 로키 합의를 하이키로 공개한 송 장관

그제 한미 국방장관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외교적 노력을 우선하고 군사력은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북미 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지금 뿐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늘 견지했던 미국 정부의 스탠스입니다. 외교적으로 북한을 압박했는데도 북한이 꿈쩍 안하면 최후의 수단으로 압도적 무력을 동원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변함없는 전략입니다.

이에 송영무 장관이 “한미연합훈련 홍보를 로키로 하자”고 맞받은 모양입니다. 훈련은 훈련대로 하되 민간인들 모르게 조용히 하자는 취지입니다. 훈련은 계획대로 해서 훈련 성과를 얻고 대외 홍보만 자제하자는 뜻이니 매티스 장관도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미 국방장관이 그렇게 합의했으면 조용히 실천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봄에 실시된 한미연합훈련도 한미가 조용히 합의해서 로키로 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송영무 장관은 한미의 ‘로키 합의’를 대단한 성과인 양 '하이키(high key)'로 언론에 공개를 해버렸습니다. 훈련을 홍보하지 말자는 약속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입니다.

길목을 지켜서고 있었다는 듯, 북한 노동신문이 어제 오전 “림팩과 을지 프리덤 가디언은 판문점 선언을 역행하는 행위”라고 비난한 것과 맞물려서 어제 오후 보도된 ‘한미연합훈련 로키 합의’는 한미가 알아서 북한에게 꼬리를 내리는 꼴이 됐습니다. 국방장관이 공개적으로 ‘로키’를 운운한 것은 송영무 장관이 처음일 것입니다. 송 장관의 과도한 말들이 일을 그르치고 있습니다. 이번 역시 설화(舌禍)입니다.

● 북한은 오판 마시길…

지난 달 16일 북한이 맥스선더와 B-52 전개 계획을 비난하자 B-52가 일본의 방공식별구역에서만 훈련했습니다. 북한의 비난과 B-52의 일본 훈련 사이에는 “송 장관이 B-52의 한반도 전개를 막았다”는 취지의 문정인 특보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북한 무서워서 B-52가 한반도로 오다가 멈춘,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됐습니다.

사실, 시차가 절묘했을 뿐입니다. B-52는 한반도에서 훈련할 계획이 분명히 있었지만 북한이 반발하기 훨씬 전에 이미 계획을 바꿨습니다. 북한이 반발했든 안했든 B-52는 지난 달 한반도로 날아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군 관계자는 “문 특보의 발언으로 북한의 위협에 B-52 전개 계획을 취소한 것처럼 비쳐졌다”며 “이제 와서 사실 관계를 밝히기도 우스워서 모른 척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송영무 장관의 한미연합훈련 로키 계획도 어찌 보면 별 일 아닙니다. 훈련은 훈련대로 한다니까 한미 연합 전력의 실력 향상에 계획대로 기여합니다. 송 장관이 가벼이 누설하지만 않았어도 만사가 평안했습니다. 북한이 앞으로 “엄포를 놓으면 한미가 움츠린다”고 오판할까 걱정됩니다. 또 그런 오판의 빌미를 자꾸 대한민국 안보의 대표들이 제공하고 있어서 걱정됩니다.      
페이지 최상단으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