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한국은 아랍에서 '친한파'를 놓치고 있다

임태우 기자 eight@sbs.co.kr

작성 2018.05.13 11:06 수정 2018.05.14 13:4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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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겠습니다. 한국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즉 어떻게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변해왔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히잡을 쓴 채 강단에 오른 아랍 여대생인 알라 까띠따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랍어가 아닌, 한국어로 말이죠. 발표 주제는 '한강의 기적'이었습니다. 6·25 전쟁을 겪고 난 이후 최빈국으로 추락했던 한국이 어떻게 짧은 시간에 오늘날의 경제 대국으로 다시 성장할 수 있었는가가 화두였죠. 걸프 지역 아랍 국가들처럼 석유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닌데도 맨몸, 맨땅으로 발전을 이룬 한국은 아랍인인 그녀에게는 커다란 수수께끼였던 겁니다. 그녀는 한국 전쟁 이후 현대사의 흐름을 짚어가면서 자신이 생각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요약했습니다.
지난 4월 26일 이집트 아인 샴스 대학에서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사진=이집트 한국문화원 홈페이지)"한국은 (서방의) 지원을 통해 수출 산업을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발 산업이나 옷 산업은 다른 산업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국의 실업률은 감소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국인들은 교육에 투자를 많이 했고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난달 26일 이집트 아인 샴스 대학에서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알라는 아랍과 아프리카 각국에서 온 17명의 참가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요르단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부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는 3학년 학생입니다. 대회 준비를 위해 요르단 대학교 한국어과 교수의 지도하에 한 달 전부터 한국어로 된 원고를 준비했고, 매일 말하기 연습을 했습니다. 위 동영상에서 보시는 것처럼 3분가량 발표하는 동안 정확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했고, 이를 경청하던 한국인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 대회는 참가자들의 실력에 따라 초·중·고급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알라는 가장 어려운 고급 레벨에서 2등을 차지하는 쾌거를 일궜습니다.

알라는 왜 한국어 말하기에 관심을 가졌던 걸까요? 발단은 한국 드라마였습니다. 아랍의 한 케이블 TV에서 '학교'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우연히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됐고, 드라마 안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10대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사로잡았던 겁니다. 거기서 알라는 한국 학생들이 유난히 입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 땐 노래방에 가는 모습이 신기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참고로 요르단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수능과 같은 전국적인 시험을 봅니다. 하지만, 고등학생일 때 바짝 공부할 뿐 우리나라처럼 초·중·고교에 걸친 학업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알라의 관심은 한국어 공부로 옮겨갔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국어를 부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랍 학생들에게 한국어는 굉장히 어려운 언어입니다. 어순이나 문법이 전혀 다를 뿐 아니라, 발음조차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알라는 'ㅂ·ㅃ·ㅍ', 'ㅈ·ㅉ·ㅊ'처럼 된소리와 거센소리의 구분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아랍어에는 그런 소리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에 대한 사랑으로 난관을 하나씩 극복했고, 한국어 대회를 준비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알라의 꿈은 한국에서 국제 정치학을 공부해 석사 학위를 따는 것입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이를 위해선 한국 정부나 대학이 주는 장학금을 반드시 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국어 실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요르단 대학교 한국어과 3학년생 알라는 한국에서 국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따는 게 꿈이라고 말했습니다.아랍에서는 알라 말고도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교육이 가장 활발한 곳은 이집트입니다. 이집트 아인 샴스 대학은 아예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규 학과를 두고 정예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요르단과 모로코, 아랍에미리트의 일부 대학은 한국어를 부전공 등으로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을 두고 있습니다. 이 밖에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공공 교육 기관인 세종학당이 아랍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들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아랍 학생들은 대부분 알라처럼 K-POP이나 한국 드라마가 계기가 돼 한국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한국으로 건너와 취업하거나 한국과 관련한 일을 하는 걸 꿈꿉니다. 한국과 아랍권이 문화적 괴리감이 큰 상황에서 이들은 두 문화권을 잇는 중요한 자원들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입장에서는 이들을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전략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아랍 현지에서는 이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이 더 많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요르단 대학교 이정애 교수는 "중국의 경우 아랍 시장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아랍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교육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중국어를 공부하려는 아랍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장학금과 각종 연수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겁니다. 요르단 대학교에서만 한 해 중국 정부로부터 장학 혜택을 받는 학생 규모가 우리나라의 10배 이상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는 다음번에 또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나간다면 한국의 남북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물론 양국의 국력이나 자금 동원력에서 차이가 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거칠게 표현하자면 중국어를 배우는 아랍 학생들은 중국 정부가 뿌리는 돈의 힘에 이끌리는 거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K-POP 등 한국 문화의 매력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선택한 학생들이 많다는 겁니다. 비록 한국어를 배우는 아랍 학생 수는 적더라도 문화적 충성도는 훨씬 높다는 걸 뜻합니다. 문제는 이런 그들을 계속 방치하다간 한국을 선호하는 아랍 인재들을 '친한파'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쉽게 놓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남북 관계에도 관심이 많다는 요르단 학생 알라. 자기도 한반도 평화를 바란다는 그녀의 말에 아랍이 그리 멀지만은 않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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