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손예진의 연애시대

SBS뉴스

작성 2018.04.16 14:1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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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스브수다] 손예진의 연애시대
#1."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안 마시면?"
"볼 일 없는 거지. 죽을 때까지."

철수(정우성)는 수진(손예진)의 술잔에 소주를 가득 부은 뒤 말한다. 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 마시면?"이라고 묻는다. 철수는 "볼 일 없는 거지. 죽을 때까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수진은 술잔 가득 담겼던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러자 철수는 수진의 입술을 훔친다.

2004년 11월 5일 개봉해 전국 256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명장면 중 하나다.
이미지#2. "어쨌든 아직은 확실한 사이는 아니란 거죠?"
"아직은 그렇죠." (이때 테이블 아래로 진아가 준희의 손을 잡는다.)

2018년 4월 7일,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3회의 엔딩이자, 4회의 오프닝 장면이다. 절친 경선(장소연)의 4살 어린 동생 준희(정해인)와 썸을 타고 있던 진아(손예진)는 잠재적 경쟁자인 세영(정유진)이 추파를 던지자 테이블 아래로 사인을 보낸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누군가의 조언을 실행에 옮기는 한 방이었다.

손예진은 멜로 장르에서 일가를 이룬 여배우다. 20대 중반에 일찌감치 '클래식'(2003),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라는 히트작을 내며 '멜로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안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혼 남녀의 현실 멜로를 그린 '연애시대'(2006)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선사했다.

멜로는 여성 판타지를 자극하는 장르다. 대체로 여성 중심의 서사가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손예진의 멜로는 끊임없이 남성 판타지를 자극해왔다.
이미지현재 안방극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여성의 판타지를 한껏 자극한다. 남친에게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라는 의미의 '곤약같은 여자'라는 말은 듣고 차인데다 회사에선 '예스걸'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윤탬버린'으로 불리는 진아가 연하의 멋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30대 중·후반 여성의 정신 승리라는 대리만족을 가능케 한다.

사랑이라는 건 나이와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 20대의 사랑과 30대의 사랑이 다르고, 40대와 50대의 사랑이 각자에게 가지는 의미도 다르다. 하지만 누구나의 내면에 '불같은 사랑'에 대한 욕망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랑은 쉽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해 결국엔 대체재를 찾으려는 관성이 쉽게 작동해버린다. 때문에 윤진아의 사랑이라는 본질에 집중한 사랑이 30대 여성 시청자에게는 큰 희망이자 대리 만족이 된다.

사랑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만드는 기묘한 힘을 발휘한다. 윤진아는 삶의 의욕과 자신감을 얻고, 수동적 인물에서 능동적 인물로 변화한다. 남녀 관계는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 작품이 달달한 멜로 드라마인 동시에 데이트 폭력, 직장 내 성추행, 프랜차이즈 갑을 문제 등을 다룬 사회 드라마라는 것을 생각하면 윤진아의 변화는 드라마 중반부의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곤약이 과일 젤리로, 탬버린이 심벌즈가 됐다. 
이미지손예진은 최근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인터뷰에서 "세월이 드는 건 어떻게 하겠는데 세월을 거스르는 건 어떻게 안 되겠더라."고 20대 초반의 캐릭터를 직접 소화한 소회를 밝혔다. "풋풋함이 없어진 나인데 억지로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거라 고민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특유의 겸손일 뿐 연기에 억지는 없었다. 드라마 역시다. 특히 30대 중반의 여성이 겪는 삶의 희로애락을 현실감 높은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데뷔 초반의 인기는 빼어난 외모의 지분이 컸다면 현재는 인기는 그녀의 공감지수 높은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손예진의 연기는 홀로 빛나지 않는다. 상대 배우와의 화학작용이 상당히 좋다. 신인에 가까운 정해인의 연기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손예진과의 앙상블 때문이다.

손예진은 촬영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배우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줘도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 번 더'를 부탁하는 배우다. 이런 열정은 상대 배우들에게도 시너지를 낸다. 

리액션의 미학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배우다. 특히 폭발하는 감정신이나 결정적 멜로 장면보다 좋은 것은 덤벙거리고 어수룩해 더욱 사랑스러운 윤진아의 성격이 보이는 일상적인 연기다. 리듬감과 템포 조절이 탁월하다.     

"'클래식'과 '내 머리속의 지우개'를 찍을 때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나에 대한 고민은 많이 했지만 잘 모르고 어설펐어요. 대신 풋풋함이 있었고요. 잘 모르는 신입사원처럼 그저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었달까요. 지금은 좀 더 큰 크림을 보게 된 거 같아요. 여유로워지기도 했고요. 기술적인 부분은 많이 터득됐지만 예전과 같은 날 것 그대로의 풋풋함은 없을 수도 있어요. 부딪히면서 거칠고 서툴렀던 연기가 다듬어졌으니까요. 반면 지금 할 수 있는 걸 그땐 못했겠죠. 너무 넘쳐서 보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되, 이입할 수 있는 연기를 하려고 늘 고민하고 노력해요."
이미지'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인기에는 김은 작가의 공감지수 높은 극본과 안판석 감독 특유의 '오감의 촉수'를 건드리는 섬세한 연출이 큰 원동력이 됐다. 안 감독은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부터 여주인공에 손예진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안판석 감독님이 저를 두고 드라마를 기획하신다고 하셔서 관심이 갔어요. 게다가 제가 멜로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보통 드라마가 많아 봐야 4부 정도 대본이 나온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는데 이 작품은 16부까지 나와 있었어요. 그걸 다 보고 출연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난 행운이었죠. 대본을 봤는데 설정이 억지스럽지도 않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정말 내 나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랄까요. 30대 여성의 직장 생활과 사랑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있었거든요. 드라마 현장이 힘들 거라는 예상 때문에 하지 않기에는 후회할 것 같았어요. 게다가 감독님이 절 만나신 자리에서 노트를 꺼내 '나와 함께 했을 때 지켜질 수 있는 사안' 같은 걸 적어주셨어요. 이를테면 '최소 수면 시간', '최대 촬영 시간', '화장실 찾기 어려운 현장은 가지 않겠다' 이런 것들이에요. 가장 기본인데 드라마 현장은 이런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배우나 스태프들이 차에서 쪽잠 자고 김밥 먹으면서 촬영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감독님이 먼저 이런 걸 이야기해주셔서 고마웠죠. 드라마는 찍어내기 바쁜데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 현장이랍니다."

손예진은 올해 37살이 됐다. 그러나 나이가 배우에게 제약은 아니다. 손예진은 "몇 년 더 지나면 20대 캐릭터를 맡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이가 든다는 게 슬프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전까지 제가 안 해본 걸 해볼 수도 있으니 나쁜 건 아니에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해 한해 더 소중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무려 2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멜로의 대명사로 손예진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관객에게나 시청자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물론 드라마 바깥의 현실에서 "니가 손예진이냐", "너도 정해인 아니거든!"이라는 푸념이 넘쳐나지만, 두 사람이 선사하는 멜로 판타지에 취하는 건 오롯이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만의 특권이다.

'손예진의 연애시대'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SBS funE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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