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3.1절, 망우리 그리고 한용운

서쌍교 기자 twinpeak@sbs.co.kr

작성 2018.03.01 19:06 수정 2018.03.01 22:18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3.1 민족 독립만세 운동 99주년입니다. 오늘(1일) 오전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한쪽에서도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공원묘지 양지바른 곳에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묘지가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만해 선사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참배 행사입니다.
만해 한용운 묘지선사의 봉분 앞에는 정성들여 마련한 떡과 과일, 식혜 등의 공양물이 차려지고, 향 진한 연기도 피어올랐습니다. 승려였던 스님의 신분에 따라 삼귀의례와 반야심경이 봉독되고, 3.1 독립선언서의 공약 삼장도 함께 울려 퍼졌습니다. 참석자들은 시내 한 대학 동문 동아리 단체로, 1973년부터 지금까지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년 3.1일 만해의 묘지를 찾아 참배해 왔습니다. 올해로 46번째 입니다.
만해 한용운 묘지● 만해의 묘지와 치아사리

만해 묘지에는 선사의 유해와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만해는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9일) 성북구 심우장에서 입적(세수 66)했습니다. 해방을 1년여 앞둔 시점입니다. 그토록 열망하던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입니다.
만해 한용운장례식은 미아리의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불교의 관례에 따라 조촐하게 거행됐습니다. 평소 선사를 경모하던 정인보, 이인, 김병로, 김관호, 박광 등 지기와 후배들이 다비에 참여했습니다. 선사의 육신은 시뻘건 장작불 위에서 회색의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습골을 하던 중에 고스란히 남은 치아가 나왔습니다. 잔뼈, 굵은 뼈가 산산이 소골 됐는데, 오직 치아만은 옥과 같이 하얗고 단단했다고 합니다. 치아 사리입니다.

불가에서는 불타지 않는 치아의 출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관습이 있습니다. 다비와 습골에 참여했던 지인들은 불타지 않는 치아를 두고, 만해가 생전에 쌓은 심오한 공덕으로 나타난 이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조국 광복의 길조라 여기며 슬픔 속에서도 부푼 희망을 안고 합장하였습니다. 수습된 유해와 사리는 둥근 항아리에 담겨져 이곳 망우리 공원묘지에 안장됐습니다.

● 불굴의 기개, 진정한 민족 지도자

1919년 3월1일 오후 1시쯤 종로 명월관에 민족대표 29인이 모였습니다.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는 지방에서 상경하면서 도착이 늦어졌고, 김병조는 해외 독립 운동가들을 접촉하기 위해 상해로 탈출한 뒤였습니다. 당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이를 선포하기로 했지만, 전 날 밤 대표들이 장소를 변경했습니다. 민중들에게 피해가 돌아갈까 우려해서입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의 부탁으로 만해가 독립선언식 인사말(式辭)을 했습니다.

만해는 "정정당당히 최후의 일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싸우자"는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 삼창을 선창했습니다. 만해 등은 선언식이 끝날 무렵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남산 왜성대 총감부를 거쳐, 악명 높은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됐습니다. 혹독한 감옥 생활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일제는 민족 대표들을 내란죄 명목으로 국사범으로 몰고 갔고, 이들에게 사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인사들은 고통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대성통곡하며 불안해 했습니다. 만해는 이들의 민망한 모습에 "이 자들! 그대가 진정 민족대표 이름으로 도장을 찍었단 말인가?"라며 감방 구석에 놓인 오물을 집어 던졌습니다.
만해 한용운만해는 수감생활을 하면서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들이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의 3가지 원칙을 정하고 철저하게 이를 지켰습니다. 내가 내 나라를 찾자는 것인데 누구에게 변론을 받으며, 호의호식 하자고 독립운동 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의 경찰, 검사, 판사의 심문에 항상 의연했습니다. 형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물론이다. 언제까지고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그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라며 민족지도자로서의 의지와 기개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 동지들이 하나씩 변절하고 일제의 기세가 욱일승천할 때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최남선이 아는 체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죽어 장송했는데, 당신이 누구냐?"고  일갈하고, 최린이 자신이 살던 심우장을 찾아오자 일거에 내쳤습니다. 총독부 어용단체인 31본산 주지 회의에서 "송장보다 더 더러운 주지놈들" 이라 호통 친 일화는 유명합니다.
만해 한용운3.1 운동은 나라가 망한지 9년차에 발생한 거족적인 독립투쟁이지만, 민간단체(종교) 주도로 진행됐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 당시 정치가 거의 절종(絶種) 됐기 때문입니다. 종교단체가 3.1 운동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내년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써 광범위하게 준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광복된 조국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오면서 세계 중심의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조국 광복에 온몸을 바친 그들의 희생이 바탕이 됐습니다. 하지만 조국은 여태껏 선사를 외로운 공원묘지에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페이지 최상단으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