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스프] 과학 혁명 이끌었는데 '공산주의 세력'으로 몰린 오펜하이머

[뉴스쉽]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정치

✏️ 뉴스쉽 네 줄 요약

· 오펜하이머가 활약했던 때는 미국에서 공산주의가 융성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 당시 미국 민주당은 '뉴딜 연합'을 통해 20년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 원자폭탄 투하가 전범국 일본에 '피해자 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 원폭 투하 이후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핵 군축'을 바랐다.

스프 뉴스쉽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전쟁승리를 가져온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엔 수소폭탄 개발은 위험하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그로 인해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원자폭탄의 이중성만큼 그 스스로가 복잡하고 양면적인 면을 가진 인물이다. 핵무기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 것일까, 파멸을 앞당긴 것일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복잡한 인물에 대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만들었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영화 오펜하이머의 배경이 되는 맥락을 살펴보려 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결말은 알려져 있지만, 영화의 내용과 줄거리가 글에 일부 담겨 있다.
 

오펜하이머는 왜 공산주의자로 몰렸을까

"나는 뉴딜 민주당원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부인하는 대사가 나온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소련에 원자폭탄 기술을 넘긴 스파이로 의심받아 청문회를 받았다.

미국은 공산주의가 성행하기 힘든 나라다. 프로테스탄티즘을 기반으로 세워져 자본주의와 자유의 상징이 된 미국과 공산주의는 대척점에 있다. 소련과 냉전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더욱 미국에서 발붙일 수 없는 조건이 됐다.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이 1919년부터 100년 넘게 존속하고 있지만 현실정치에 의미 있는 진출을 한 적은 없다.

그런 미국 공산당이 세가 그나마 강했던 유일한 시기가 있었다.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부터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전까지다. 이때가 바로 오펜하이머가 활동했던 시기다. 역사적으로 불황과 전쟁은 공산주의를 키우고 혁명의 불씨를 가져온다. 1차 대전으로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에서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났다.

대공황과 전쟁이 가져온 1930년대의 '붉은 물결'은 미국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상징적인 사건이 스페인 내전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을 장악한 프랑코의 파시즘에 대항해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뒤섞여서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형성해 맞서 싸운 사건이다. 인민전선에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고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목에 총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종군기자로 스페인 내전을 기록했다.

젊은 시절의 오펜하이머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도 공산주의가 활발하게 유행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주의 대학교가 좌파의 요람이 되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를 3년 만에 졸업한 뒤 유럽으로 가 영국 캠브리지와 독일 괴팅겐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UC 버클리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다. 캘리포니아 주와 버클리는 미국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1930년대엔 대학 교수나 과학자들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됐다. 오펜하이머도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는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흑인 인종차별 폐지와 노동권을 지지했고, 스페인 내전 중인 반파시스트 세력에 돈을 지원했다. 아내 키티는 공산당원이었고, 애인이었던 진 또한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스스로 공산당원이 된 적은 없었다.

에드거 후버가 이끌던 FBI는 캐비닛에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교수들을 뒷조사한 자료를 모아놓았다. 오펜하이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오펜하이머가 거론됐을 때 FBI 자료를 바탕으로 군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군부 책임자 그로브스는 실용주의자였고 오펜하이머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판단했다.

스프 뉴스쉽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좌파'로 묶인다 해도 모두가 생각이 일관되진 않다. 당시에는 특히 소련 공산당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크게 달랐다. 소련의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있었고, 공산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조를 만들 권리를 주장하고 불평등 해소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펜하이머 또한 공산당원은 아니었고 노조 조직화를 지지하거나 주변에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는 정도의 의견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930년대 당시에는 공산주의 혹은 공산당을 지지했었더라도 이후에 스탈린의 숙청이나 러시아 중심주의 같은 소련 공산당의 행태에 크게 실망하고 강력한 비판자로 돌아선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한 조지 오웰은 소설 〈동물농장〉과 〈1984〉로 '반공작가'로 인식되어 왔지만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의 정체성과 소련,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양립 가능한 문제였다. 미국에서 1950년대부터 진행된 냉전과 매카시즘은 이런 성향의 이들까지도 싸잡아서 '소련의 스파이'로 규정지었고 감시하거나 처벌하고 명예를 빼앗아갔다. 오펜하이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어떻게 20년 집권에 성공했나

공산주의는 미국 상원과 하원 안으로 진출하지는 못 했다. 다만 개혁과 진보의 흐름이 미국 정치를 재편했다. 자본주의와 국가를 "뒤엎자"는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는 방식의 개혁이 힘을 받았다. 그 중심에 미국 민주당과 '뉴딜 연합'이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을 지시한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번을 연임했다. 그가 시작한 뉴딜 연합으로 민주당은 20년을 장기집권하게 된다. 1930년대 이전의 미국 정치는 공화당이 30년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896년 이후 북부와 중서부 산업 지대의 도시 노동계급이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농장주들이 지지 기반이었다. 1896년부터 1930년까지의 민주당은 확장성이 없었다. 이 30년 동안 공화당은 9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7번을 집권했고, 의회 선거 18번 중 17번을 이기며 다수당을 차지했다. 공화당 일변도였던 미국 정치에 새로운 균열을 내 완전히 다른 정당 체계로 '재정렬(realignment)' 한 것이 루스벨트와 뉴딜 연합이었다.

뉴딜 연합은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새롭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루스벨트와 민주당은 남부 백인 지주 중심의 정당을 도시 노동자, 이민자와 흑인, 유대인, 가톨릭교도 그리고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으로 만들었다. 특히 급격하게 인구가 성장하는 도시의 노동자가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 됐다. 공화당은 기업가와 전문직의 지지를 받았지만, 인구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20년 간 집권할 수 없었다.

스프 뉴스쉽
민주당과 루스벨트는 어떻게 이들을 결집하게 만들었을까. 민주당은 계급 이슈를 정치의 한복판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택했다. 대공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해서 대규모 토건 사업을 벌여 공공 일자리를 만들었다. 미국을 복지국가로 만드는 여러 개혁 법안도 통과시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조 만들 권리를 명문화하는 노동법(Wagner Act)과 노령연금, 실업보험을 도입한 사회보장법이다. 루스벨트는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라디오를 통해 직접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식은 화롯가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편안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노변정담'으로 불렸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이라는 위기를 맞은 시기에 집권해 미국을 개혁한 루스벨트는 단순히 대통령을 뛰어넘어 국민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마무리되기 전 루스벨트가 갑작스럽게 숨지면서 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 유럽에서 연합군 승리가 임박할 무렵이었고, 태평양 전쟁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기 116일 전이었는데, 그제야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극비로 진행되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원자폭탄을 지시한 건 루스벨트였지만 실행한 건 트루먼이었다.

스프 뉴스쉽
루스벨트와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20년 장기집권은 1950년대에 제동이 걸린다.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고, 매카시즘으로 불리는 마녀사냥이 이뤄졌다. 반공주의가 1930년대부터 이어온 붉은 물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공산 전체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중심으로 국가 운영이 이뤄졌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민은 적과 내통하는 스파이로 의심받고 감시당했다. 1960년대 존 F. 케네디가 당선되고, 흑인 민권 운동과 베트남전 반전 운동으로 대변되는 학생들의 '68 운동'으로 새로운 흐름이 다시 피어나기 전까지 미국 진보의 암흑기는 이어졌다.

1950년대 반공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집권한다. 새롭게 집권한 공화당 행정부와 군부는 미국의 핵 능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시기 '원자폭탄의 아버지'에서 '군축의 아버지'로 변모한 오펜하이머는 미국이 핵무기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수소폭탄 개발에도 반대했다. 정부 정책에 비판의 목소리를 낸 대가로 오펜하이머는 애국심을 의심받았고, 청문회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검증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일본은 피해자인가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쌍둥이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했는데, 2차 대전 당시 일본 이오지마섬 전투를 그린다. 〈아버지의 깃발〉은 섬을 점령하는 미국 군대의 모습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필사적으로 이를 막는 일본군의 입장을 담았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팻 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오펜하이머〉는 한쪽의 고민만을 그린다. 영화에서는 일본과 일본인을 보여주지 않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폭탄이 투하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성공적이었다는 전화를 받은 오펜하이머와 환호하는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만 보여준다. 영화에서 담기지 않은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스프 배너
이 콘텐츠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하단 버튼 클릭! | 스브스프리미엄 바로가기 버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