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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류승완의 "밀수"는 내 마음에 음악을 깔고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79

영화 "카사블랑카(1942)"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미국영화연구소(AFI)가 뽑은 역대 영화 100선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시민 케인"과 "대부"에 이은 3위.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을 떠나보내며 한 말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란 명대사도 유명하다.

이 영화를 보고 영감을 얻은 버티 히긴스라는 가수가 1982년 "카사블랑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 빌보드 차트에 올려놓았다. 장국영이 이 노래를 "편단(片段)"이란 제목의 광둥어 노래로 번안해 불렀고, 한국에서는 원곡과 같은 제목의 가요로 번안돼 발표됐다.

그대와 같이 본 영화 카사블랑카
어둠 속에 두 손을 꼭 잡고
마음을 전하여 주던 / 따스한 그대 손길이
살며시 떨리는 걸 느꼈네


이렇게 시작하는 "카사블랑카" 번안곡을 부른 가수가 바로 최헌(1948-2012)이다.

1976년 "오동잎"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최헌은 감미로우면서도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로 78년 "앵두", 1979년 "가을비 우산 속" 등을 크게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된다. 특히 "가을비 우산 속"은 얄개 시리즈로 유명한 석래명 감독이 연출한 정윤희, 신성일 주연의 멜로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 오프닝부터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이 흘러나온다.

최헌에게 당시 최고의 가요상이라고 할 수 있는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을 안긴 노래는 "앵두"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발표된 지 45년이나 지나 올여름 텐트폴 한국 영화의 오프닝 곡으로 흘러나올 줄을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NEW
올여름 시장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빅4'는 류승완 감독의 "밀수", 김성훈 감독의 "비공식 작전", 김용화 감독의 "더 문",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이다. 그중 가장 먼저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밀수"는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한 고깃배가 포말을 일으키며 가로지르는 시원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장면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배경으로 깔리는 노래다.

편곡이 좋다.(by 김기표) 70년대 가요 특유의 일렉기타 리프가 이끄는 16초의 인상적인 전주가 끝나면 최헌이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로 약간의 뽕끼를 섞어 노래한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 영원히 잊지를 못해
철 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아이맥스 화면과 사운드로 "밀수"를 보면서 여름, 바다, 경쾌한 기타 리프, 영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설정 숏(establishing shot)으로서 "밀수"의 오프닝 장면은 사실상 최헌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구력은 무시 못 한다고, "밀수"는 액션 오락영화 장인으로서 류승완 감독의 구력을 바다에서도 확인시킨다. 아주 새롭지는 않아도 티켓 값은 한다, 이게 바로 구력있는 감독들이 해내는 일이다. 플러스+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70년대에 잘 어울리는 가요를 전면에 배치하며 자신의 취향을 한껏 드러낸다.

오프닝 씬에서 뿐 아니라 주연 염정아가 혼자서 신세 한탄하며 흥얼거리기도 하는, 거의 "밀수"의 주제가와도 같은 "앵두"를 필두로 "하루 아침(한대수)", "연안 부두(김트리오)", "님아(펄시스터즈)",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김추자)", "밤차(이은하)"처럼 40대 이상 관객들에게 익숙한 노래들이 쉴 새 없이 귓전을 울린다. 산울림 2집에 실렸던, 당시로서는 전위적이었던 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도 조인성과 박정민이 싸우는 액션 씬에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크레딧 상 "밀수"의 음악 감독은 장기하지만 류 감독은 시나리오 쓸 때부터 몇몇 가요들을 이미 점찍어 놨다. 그래서 그런지 "밀수"의 선곡표는 시퀀스 하나 하나에서는 영화와 찰떡같이 붙는다. 하지만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닌 대부분 선곡으로 이루어진 영화라 전편(全篇)을 통틀어 보면 어딘지 모르게 살짝 어수선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때로는 장면이 보이기보다는 노래가 들리기도 한다. 여기 나온 노래의 대부분을 처음 들을 2030 세대는 "밀수"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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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에 정훈희·송창식의 "안개(오리지널 곡은 1967)"를 삽입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60년대 가요에 매료된 사람은 필자뿐 아니었다. 안무가 모니카는 이 노래를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고, 다양한 크리에이터들이 이 노래를 활용해 콘텐츠를 만들었다. 가히 '2022년 여름의 가요'였다.

"헤어질 결심" 안개 뮤직비디오 with 모니카 중 한 장면 / CJ ENM
"안개"는 박찬욱 감독이 4살 때 나온 곡이고 "앵두"는 류승완 감독이 5살 때 발표된 곡이다. 당시만 해도 히트곡의 수명이 지금보다는 훨씬 길었고, 히트했다 하면 전국 방방곡곡 남녀노소에게 세대불문하고 영향을 미쳤다.

소년 박찬욱, 소년 류승완을 자극했던 음악적 인자가 각각 사십 여 년, 오십 여 년 뒤에 영화에서 부활한 것이다. 자신의 피와 살이 됐던 노래를 자신의 영화에 깔고, 그 노래가 영상과 딱 붙을 때 느끼는 쾌감은 그 어떤 쾌감과도 견주기 어려울 것이다.

박 감독과 류 감독은 10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밀수"의 OST에게 공히 집어넣었다.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지금 세대의 10년은 과거보다 훨씬 긴 시간일 것이다) 류 감독은 박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될 뻔했던- "3인조" 연출부 출신이다.

얼마 전 올여름 한국 영화 빅4 중 마지막으로 개봉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제작진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영화계를 이끄는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박찬욱, 봉준호, 윤제균, 최동훈, 류승완 등의 감독과 이병헌, 송강호, 이정재, 정우성, 김혜수, 전도연 등 50대들이 여전히 한국 영화계에서 막강한 티켓 파워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을 이어나갈 빅 네임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들이 부단히 작품을 내놓으며 잘하고 있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찬사가 필요하다. 다만 이들처럼 작품성과 흥행을 함께 담보할 수 있을 만한 차세대를 만들어 내고 있느냐는 한국 영화계가 생각해 볼 문제다.

이후 세대가 아직 젊지 않느냐는 말도 길게 보면 잘 들어맞지 않는다. 앞서 열거한 이름들은 2, 30대부터 빅 스타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제작한 클라이맥스의 변승민 대표는 조승우가 "타짜", "말아톤" 등에서 주연을 맡았을 때가 그의 나이 20대 중반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범죄의 재구성(2004)", "타짜(2006)"를 연출했을 당시 최동훈 감독도 30대 초중반에 불과했다.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었을 때가 37살,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2003)"을 찍었을 때가 33살이었고, 송강호가 "쉬리"에 나왔을 때가 32살, 이병헌이 "공동경비구역 JSA"에 나왔을 때가 서른 살이었다. 류승완 감독도 30대 중반부터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독립영화계에서 나름의 색깔과 실력을 인정받아 왔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하면서 이제야 대중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엄태화 감독은 42살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엄태화 감독은 빅4 영화감독 중 유일한 80년대 생이다. 빅4 중 유일하게 사회성 짙은 이야기를 선택했고 예술적 야심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은 엄 감독의 영화도 성공하면 좋겠다. 여러모로 한국 영화(계)의 다양성에 기여하게 될 테니까.

엄태화 감독도 박찬욱 감독의 조연출이었다.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 현장에서는 붐 마이크를 들었다고 한다. 이병헌이 나오는 롱 테이크씬에서 25번 째만에서야 겨우 박 감독의 오케이가 떨어져서 스태프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는데 모니터하다 자신이 붐 마이크를 거꾸로 들고 있는 걸 발견하는 바람에 결국 31번째 테이크까지 가게 돼 곤혹스러웠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 엄태화 감독을 지원하러 "콘크리트 유토피아" 관객과의 대화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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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서 야심 차게 선택했던 "안개"는 1970년 동경 국제가요제 입상곡이다. 류승완 감독이 "밀수"의 엔딩곡으로 고른 "머무는 곳 그 어딘지 몰라도"도 1978년 동경 국제가요제 수상곡이다.

오프닝 곡인 최헌의 "앵두"가 "밀수"를 리드미컬하게 열어 젖혔다면, 엔딩곡 박경희의 "머무는 곳 그 어딘지 몰라도"는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지며 또 다른 맛의 감상(感想)과 감상(感傷)을 남긴다. "앵두"만한 선곡이 없다고 여겼다가 객석을 나서며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갈 곳도 없이 떠나야 하는가
반겨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꿈 길을 가듯 나 홀로 떠나네
미련 없이 떠나가네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다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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