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Wind of change?

러시아 국민들은 진정 변화를 원했을까?

지난 주 러시아 대선 취재차 모스크바에 다녀왔다. 대선 이틀 전에 도착한 모스크바는 국내에서 외신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전날까지만 해도 크렘린 궁 주변을 가득 메웠던 시위대는 온데 간데 없었다. 알고 보니, 정부 당국에서 대선 이틀 전부터는 시위를 금지했다고 했다. 참 어지간히도 정부 말을 잘 듣는 '반정부 시위대'다 싶었다.

대선은 예상대로 '돌아온 차르', 푸틴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득표율이 무려 63%를 넘었다. 출구조사 예측치를 5%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개표 초반부터 줄곧 60% 이상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자 개표를 시작한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아 푸틴은 지지자들이 운집한 붉은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대선 전 러시아 야권은 선거 이튿날부터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선거 다음날, 우리는 취재비자도 없이 관광객으로 위장해 취재를 간 터라, 사뭇 긴장한 채 예고된 시위현장-푸쉬킨 광장으로 갔다. 위험하다며 가지 말자던 현지 코디를 겨우 설득해서 나선 취재길이었다. 오후 6시가 되자 푸쉬킨 광장에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에는 17% 득표로 이번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한 러시아 최대 야당 공산당이 주최한 반정부 시위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번 세게 붙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을 가득 메우리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나마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쪽에는 사람들이 좀 왔다. 하지만 반대편 공산당 주최의 집회 장소는 썰렁하리만큼 텅 비었다. 100명 남짓한 주최측 인사들이 전부였다. 취재진 숫자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대선 직후, 야권에서는 수천건이 넘는 '부정선거'의 증거를 잡았다며 역대 최악의 부정선거라고 악악댔다. 대선 직전까지 집회마다 푸틴의 3선을 반대했던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의 가슴에 다시 불이 붙을만했다.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다 어디 갔어, 이거?

워낙 압도적인 표차이다보니 '반정부 시위대'의 맥이 빠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일견 가능하다. 그러나, 몰랐을 리 없다. 푸틴의 3선, 게다가 압도적인 승리까지 대선 한참 전부터 예견됐던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변화를 원했던 열망이 10만이 넘는 시민들을 매번 거리로 이끌었던 것이라고 믿었다. 2번의 대통령에, 총리에, 다시 대통령. 푸틴의 전제군주적인 집권이 이역만리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저 지켜볼 뿐인 내게도 지겨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고요함이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후 귀국길에 오르기 전까지, 너무도 조용해져버린 모스크바의 길거리에서 난 변화의 열망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푸틴을 반대했던 올가와 세르게이, 러시아 취재 동안 만났던 그들이 푸틴을 반대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변화'였다. 그들은 정말 변화를 원했던 것일까?

모스크바 시민들을 인터뷰하면서 신기한 점이 있었다. 푸틴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장,노년층이었다. 그들은 푸틴이 지겹다고 했다. 푸틴이 집권하는 동안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만난 2,30대 젊은이들은 거의 예외없이 푸틴을 지지했다. '강한 러시아'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도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인들은 '변화'를 원했고, 젊은이들은 '강한 러시아'를 원했다. 아이러니다.





냉전이 끝나가던 1991년, 독일의 5인조 메탈그룹 스콜피온스는 모스크바의 변화를 'Wind of change'라는 제목으로 노래했다.

"I follow the Moskva down to Gorky Park Listening to the wind of change..."

스콜피온스는 당시 모스크바 시내의 고르키 파크를 걸으며 변화의 바람을 들었다. 20년이 지난 뒤, 나는 똑같은 고르키 파크를 귀를 쫑긋 세우고 지나갔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르'가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