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는 지난 10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혁당 사건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상반된 두개의 판결이 존재하는 만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논란이 가열되자 최근 인혁당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증언들도 나오고 있지 않느냐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급기야 인혁당 유가족들까지 당사로 뛰어와 재심에서 무죄로 판명이 났는데도 박 후보가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등 희생자와 유가족을 욕보였다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특히 박 후보의 발언이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혼동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당내에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홍일표 대변인은 수습 차원에서 박근혜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밝혔다. 홍 대변인은 당의 발표를 박 후보도 알고 있다고 말해 사과가 박 후보의 뜻을 반영한 것임을 시사했다. 하지만 홍 대변인이 사과한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상황은 급반전됐다.
박근혜 후보가 당의 사과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이를 전면 부인한 것이다. 박 후보는 자신의 일정에 동행했던 이상일 대변인을 통해 "홍 대변인과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며 당의 사과가 자신의 뜻과 무관하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발단은 이랬다.
홍일표 대변인이 어떻게든 빨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과 문안을 문자로 비서실장인 최경환 의원에게 보냈다.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최 의원이 행사장에 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 대변인은 최 의원에게서 답장이 오자 박 후보와 조율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고 이를 공식 발표했다.
재선 의원으로 대변인 3명 가운데 가장 선임인 홍 대변인이 그렇게 중요 사안을, 후보 본인이 아닌 비서실장과, 그것도 전화 통화도 아닌 문자로 의견 교환을 했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뒤늦게 보고 받은 박 후보가 이를 내부적으로 수습하기보다, 측근인 또 다른 대변인을 통해 당의 내부 혼선을 스스로 폭로하는 브리핑을 기자들에게 하게 한 점이다. 적어도 정상적인 당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새누리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뭘까?
◈ 후보 생각, 며느리도 모른다?
박근혜 후보가 비주류이던 시절, 다소 신비주의적 냄새까지 풍기던 그의 행보에 대해 기자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일정은 대부분 비공개였고 기자간담회나 발언도 늘 갑작스럽게 잡히기 일쑤였다. 이런 데 대해 기자들이 불만을 제기할 때면 친박계 인사들이 늘 하던 말이 있다.
소위 측근 인사들은 박 후보, 당시로는 "박근혜 전 대표가 누구보다 열려 있는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무런 당직이 없는 상태이고 이명박 대통령이 직을 수행하는데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언급을 자제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또 "박 전 대표가 언뜻 막힌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직에 들어가면 공적 기구와 계통, 절차를 통해 의견을 전달받고 수렴하며 또 그에 대해 견해를 밝힐 건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던 시절 당시 그의 활동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박 후보가 지난해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총선에서 승리하고 대선 경선을 거쳐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까지 그런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모든 일에 '보안'이 강조됐고 특히 인사 같은 주요 정보는 몇몇 사람들에게 한정됐다. 어떤 때는 출입처가 정당인지 정보기관인지 헷갈릴 만큼 정보 통제가 심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혹은 후보의 생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주변 측근 몇 사람으로 한정됐다. 의원 대부분은 저마다 박 위원장 혹은 후보의 생각은 이게 아니겠냐는 '해석'을 내놓았을 뿐, 딱 이거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심지어 친박계라는 의원들도 상당수가 박 후보의 발언을 토대로 그의 뜻을 추측만 할 뿐이었다.
주요 정보와 의사 결정이 특정 그룹에게 한정되면서 공적 조직인 당 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직에 있는 사람들조차 당내 돌아가는 사정에 밝지 못했고 일각에서는 당이 비선에 의해 움직인다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 새누리당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지난달 27일 출범한 대선기획단이다. 당초 대선기획단은 대선을 책임질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을 맡은 기구라는 점에서 당 안팎의 관심이 높았다.
특히나 대선기획단이 담당하게 될 선대위 인선은 향후 당내 역학관계 재편과도 직결돼 있어 실세가 단장을 맡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단장 자리를 놓고 친박 핵심인 서병수 사무총장과 최경환 캠프 총괄본부장이 동시에 거명되면서 한때 실세간 힘 겨루기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 이름 뿐인 당 기구… 의사결정은 누가?
이주영 의원의 단장 임명은 그런 점에서 의외였다. 이 의원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정책위의장을 맡아 총선 공약을 성공적으로 기획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역시 친박 핵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 주변에서는 실세간 자리 다툼을 막기 위한 인선이라는 말과 함께 대선기획단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실제로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대선기획단에서 인물 인선과 관련해서는 거의 관여를 못하고 있다. 조직은 짜는데 기구는 짜는데 사람을 누굴 넣을지에 대해서는 후보 쪽에서 직접 한다"고 말했다. 또 "(대선기획단 위원들이) 후보의 생각을 잘 모른다. 핵심적인 기구인줄 알았는데 전권을 쥐고 딱딱 구성하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히려 선대위원장 인선 같은 핵심 사항은 후보 비서실 쪽에서 맡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비서실장은 이른바 '왕보좌관'으로 불리는 박근혜 보좌관들과 지난 2007년 때부터 함께 일했던 최경환 전 캠프 총괄본부장이 맡고 있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모든 현안에 대해 박 후보가 이른바 왕보좌관들하고만 의논하고 결정한다. 지난 대선기획단장 발표도 바로 전날 저녁에 이들하고 회의한 뒤 결정했다는 것 아닌가. 이대로 가면 설령 대통령 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당과 후보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속칭 '왕보좌관'을 비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박 후보가 이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이들이 권력을 전횡하는 일은 없다는 게 당 안팎의 설명이다. 오히려 이들에게 가혹할 만큼 업무가 몰린다며 안 됐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왕보좌관'들의 업무수행이 문제라기보다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역량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가 더 문제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 핵심 공약…해석도 제각각
새누리당은 이번 대선의 핵심 공약인 경제민주화를 놓고도 정리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리된 입장은 고사하고 당의 정책 공약 입안을 책임진 김종인 국민행복특위위원장과 공약의 입법화를 책임진 이한구 원내대표가 틈만 나면 공방을 벌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5일 이한구 원내대표는 예산 관련 당정협의를 시작하면서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정치판이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와 포퓰리즘 경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보니 기업의 의욕이 떨어지고 국민이 불안해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민주화 논의를 주도해온 김종인 국민행복특별위원장을 겨냥한 말로 풀이됐고 김 위원장도 발끈하고 나섰다. 김 위원장은 "자기 당 대선 후보가 한 얘기를 정체불명이라고 말하는 건 상식 밖"이라면서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이들 두 사람은 앞서 지난 7월에도 "경제민주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재벌 이해를 대변한다"며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두 사람간의 신경전이 노선갈등으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자 박근혜 후보가 직접 진화에 나섰다.
박 후보는 두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경제 주체간 공정 경쟁으로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면서도, 대선을 앞두고 너무 혼란스럽게 비치면 안되는 만큼 조만간 새누리당의 경제 민주화 입장을 확실히 정리해 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후보는 지난달 20일 후보로 선출된 직후에도 경제민주화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내놓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내에서 논란이 계속되는데도 한 달 가까이 교통정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종인 위원장의 경제민주화와 이한구 원내대표의 성장론 효과를 동시에 누리기 위한 고도의 정책적 판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과 이 원내대표의 대립은 단순한 노선 갈등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다.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오가는 마당에 그런 효과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오히려 경제민주화라는 핵심 공약에 대한 진정성만 의심스럽게 만들 뿐이다.
◈ "새누리, 당이 아니무니다"
정당은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하지만 지금 새누리당의 모습은 이런 정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권을 잡겠다는 생각은 있을지 모르나 경제·복지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민주화'를 놓고 정책 사령탑끼리 설전을 벌이는 마당에 정치적 주의·주장이 같다고 말하는 건 무리다.
또 당의 대선 후보와 대변인이 같은 사안을 놓고 다른 소리를 하는 모습도 건전한 당의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당의 후보 개인의 의견이 당의 의견이 되는 1인 정당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이번 사태를 겪은 뒤 한 5선 중진 의원이 "(후보) 개인의 판단과 인식이 당 전체의 인식으로 오인될 수 있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박 후보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박 후보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후보의 주장과 견해만 있을 뿐 당 차원의 의견 수렴과 당론은 없는 새누리당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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