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월드리포트] '니들은 주지 마!'…미, 반도체 보조금 '내로남불'

[월드리포트] '니들은 주지 마!'…미, 반도체 보조금 '내로남불'
미국 정부가 지난해 발효된 반도체 과학법에 따라 매년 1억 달러씩 5년간 총 5억 달러, 우리 돈 6,500억 원을 들여 국제기술안보혁신기금(ITSI Fund: The International Technology Security and Innovation Fund)의 운용 계획을 밝혔습니다. 다른 나라와 협력을 통해 반도체 공급망과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안보를 강화하는 게 목적인데,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중국 견제에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한 해외 협력 기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이 기금을 설명하기 위해 현지시간 15일 워싱턴에 있는 외신센터를 찾았습니다. 브리핑에 나선 라민 툴루이 미 국무부 경제기업담당 차관보는 ITSI 기금 지원 분야 중 하나로 외국과의 반도체 정책 대화 확대를 꼽으며 특히 미국의 파트너 및 동맹국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강조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거액의 협력 기금을 내걸고 수출 통제와 기술 안보 같은 미국 주도의 중국 견제에 동참해달라는 취지였습니다.

'됐고, 반도체 보조금 어쩔 건데?'

미국, 반도체 중국 수출 통제

하지만 질의응답에서는 '사실상 중국 배제가 목적 아니냐', '미국 반도체법 자체가 한국, 타이완 유럽연합 등 미국의 파트너와 동맹국들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데 어쩔 거냐' 같은 비판적 내용이 주를 이뤘습니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초과 이익 공유와 공장 접근권, 중국 투자 제한 같은 과도한 반도체 보조금 조건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미 당국자는 반도체법과 기금의 취지가 다른 나라와 상호 보완적이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미국과 동맹, 파트너의 공동 목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과도한 반도체 보조금 조건 문제에 대해서는 "보조금에 대한 접근과 다양한 관련 규정의 적용은 보조금을 신청하는 미국 기업과 외국 기업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북미 지역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도록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달리, 반도체법의 경우 보조금 관련 조건이 국내외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해, 인플레이션 감축법 때처럼 한국과 유럽연합 같은 동맹국들이 강력 반발하는 사태를 막고, 혹시 있을지 모를 차별 논란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풀이됐습니다. 이 당국자는 과도한 요구조건이 대미 투자 매력도를 떨어뜨릴 수 있단 우리 정부의 지적에 대해서도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외국 기업들의 투자 발표가 있었다며 에둘러 반박했습니다.

미, 51억 원 보조금 내걸어 놓고…"보조금 경쟁 피하고 싶다"

반도체법 우려에 미국 해명

'과도한 보조금 조건'이 국내에서 크게 이슈가 됐던 터라 우리 언론 보도도 주로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제 관심을 끈 건 그다음 발언이었습니다. 이 당국자는 반도체 협력과 관련해 국무부가 추구하는 여러 가지 외교적 방법이 있다면서 이런 대화의 핵심 목표로 2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반도체 생산 촉진을 위한 관련국 간 정보 공유, 둘째 공급망 파괴를 식별해 차단할 수 있는 국가 간 협력이었습니다.

특히 정보 공유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①"미국이 하고 있는 일을 파트너들이 잘 이해하고, 미국 또한 파트너들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②"우리는 특히 미국과 파트너, 동맹의 정책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③미래에 더 다양하고 안전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고자 하는 우리 목표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민간 분야에 대규모 지원을 하는 보조금 경쟁 상황은 피하길 원한다"고 밝혔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나요?

얼핏 '어~'하고 지나치기 쉬운데 정리를 하자면, ①'당신 나라들에서 어떤 반도체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②'미국이 추진 중인 정책과 충돌하는 일은 하지 않길 바란다', ③'(공급 과잉을 낳을 수 있는) 민간 분야 보조금 지원은 지양했으면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한 면은 있지만 근본적 맥락은 위에 정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걸로 보입니다. 국제 관계 메시지를 이해할 때 '힘의 논리'를 빠뜨려선 안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서로 정보를 주고받자'는 말은 미국과 타 국가 간 관계에서 등가로 작동할 리 없습니다. 또 미국과 동맹의 정책이 서로 어긋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말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엇나가지 말라'는 일종의 압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양하고 안전한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보조금 경쟁은 피하길 바란다는 말도 다른 나라에게 보조금은 자제하라는 메시지인 셈입니다.

미, 우리 보조금은 다르다?

미국 반도체

미 반도체법에서 책정한 보조금은 390억 달러, 우리 돈 51조 원 규모입니다. 이런 천문학적 액수를 내걸고 해외 기업들을 유치하고 나선 미국이 정작 다른 나라, 그것도 동맹들에게까지 보조금 경쟁에 나서지 말자고 한, 이 이율배반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미국은 자신들의 보조금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안보 차원의 결정으로,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한 다른 나라들의 보조금과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내로남불'의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미국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물론 여러분 몫입니다.

이날 외신센터를 찾은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과 동맹의 공통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 추진(그러니까 국가 안보 차원의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핵심으로 한 세계 반도체 공급망 구축과 중국 견제)을 위해서는 양측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향해 규칙에 의한 세계 질서를 외치면서도, 정작 국제무역기구 규범까지 무시해가며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미국에게 손 내밀어 공감하는 파트너와 동맹이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 타이완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협의체 '팹4'(전에 칩4로 불렸던 그 협의체입니다)에 속해 있습니다. 미 당국자는 반도체 생산 확대 등 공급망 강화를 위해 각국이 추진하는 정책 정보를 공유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 대로라면 우리나라가 용인에 추진 중인 세계 최대 반도체 단지 조성 계획도 미국에게 '공유'해야 할 걸로 보입니다. 팹4는 주요 반도체 생산국인 회원국들에게 '우리는 줬지만 너희는 보조금 주지 마라'는 식의 방식으로 세계 반도체 정책을 조절하기 위한 창구라는 한 전문가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