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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홍콩 국가 연주 실수' 중국 한마디에 홍콩 '잠잠'

지난 13일 한국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 럭비 세븐스시리즈 2차 대회 남자부 결승전. 한국 대표팀과 홍콩 대표팀이 맞붙었는데, 이 경기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기에 앞서 진행된 양팀 국가(國歌) 연주 시간에 홍콩 국가가 잘못 나간 것입니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 국가를 사용했지만, 지난 1997년 중국에 주권이 반환된 이후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을 국가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된 데다, 중국 본토의 '일국양제(一國兩制)' 정책에 따라 홍콩은 주권 반환 이후에도 올림픽을 포함한 각종 국제 대회에 중국과 별도 팀을 구성해 출전합니다. 깃발도 중국 오성홍기가 아닌 홍콩 특별행정구기를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외국의 제3자는 홍콩의 국가(國歌)와 중국의 국가가 같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13일 인천에서 열린 국제 럭비 대회. 국가 연주 시간에 홍콩 선수들이 도열해 있다.
 

인천 럭비 대회에서 홍콩 국가 대신 시위대 노래 연주

더 큰 문제는 하필 홍콩 국가로 연주된 노래가 홍콩에서 금지된 노래였던 것입니다. 13일 인천 대회에서 홍콩 국가로 울려 퍼진 노래는 '글로리 투 홍콩(Glory to Hong Kong)'. 이 노래는 지난 2019년 대규모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시위대를 상징하는 노래였습니다. '어찌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겠는가'로 시작하는 이 노래에는 '자유가 이곳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여 온 힘을 다하자', '정의를 위한 시대 혁명에 함께 하자' 같은 가사가 등장합니다. 때문에 이 노래는 2020년 홍콩국가보안법이 제정된 뒤 금지곡이 됐습니다. 국기와 국가휘장, 국가(國歌)를 모독하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법도 생겨났습니다. 몰론 럭비 경기장에서 노래 가사가 나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애국가도 그렇듯이 경기장에선 멜로디만 울렸습니다. 하지만 홍콩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멜로디만 들어도 '글로리 투 홍콩'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럭비는 홍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입니다.

홍콩 측은 발끈했습니다. 대회 주최 측에 항의했고, 주최 측은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에 앞서 한국어와 영어로 공개 사과한 뒤, 중국 국가 '의용군 행진곡'을 다시 틀었습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홍콩 정부는 이튿날인 14일 '폭력적인 시위, 독립 운동과 밀접히 연계된 노래가 중국 국가로 연주된 것에 개탄하고 강력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홍콩럭비연맹에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고, 주최 측인 아시아럭비연맹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를 불러 강하게 항의한 데 이어, 홍콩 행정 수반인 존 리 행정장관이 직접 나서 경찰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리 장관은 14일 밤 기자들에게 "현장에서 연주된 노래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서 "국가법이나 다른 홍콩 법을 위반하려는 음모와 관련이 있는지 홍콩 경찰이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홍콩 밖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조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홍콩 정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홍콩 경찰은 법에 따라 조사할 것이다"라고 말해 한국 담당자들에 대한 조사 가능성도 열어 뒀습니다.
 
홍콩 의원 등이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 앞에서 항의하는 장면
  

'홍콩 럭비팀 해체'·'한국 개최 금지' 주장까지 나와

홍콩 내부 여론이 들끓면서 불똥은 홍콩 선수단에게까지 튀었습니다. '의용군 행진곡'이 아닌 '글로리 투 홍콩'이 울려 퍼지는 동안 선수단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홍콩 대표팀 선수들은 '글로리 투 홍콩'이 연주되는 동안 어깨동무를 하며 가만히 있었고, 코칭스태프도 벤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홍콩 매체 명보는 사설을 통해 "현장이 있던 대표단이 즉시 항의해 연주를 중단시켰어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매체는 201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19세 이하 축구 대회 한국과 요르단 전에서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흘러나오자 한국 코칭스태프가 바로 항의해 북한 국가를 중간에 끊고 애국가를 튼 사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북한 여자축구팀이 북한 국기가 아닌 한국 국기가 게양된 것을 보고 즉시 퇴장한 사실 등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글로리 투 홍콩'이 울려 퍼지는 동안 가만히 듣고 있는 홍콩 선수들
 
심지어 홍콩 럭비 대표팀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우리의 국회 격인 홍콩 입법회의 주니어스 호 의원은 "선수들이 국가가 모욕 당하도록 했다"며 "유일한 해결 방법은 팀은 해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룩 의원과 매기 찬 의원도 "이 사건은 모든 중국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관련자들의 엄중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나아가, 로니 웡 홍콩올림픽위원회 명예사무총장은 "한국이 국제 럭비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이 럭비 대회를 개최할 경우 홍콩팀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초임 직원이 인터넷에서 내려받는 과정에서 실수"

대회 주최 측인 아시아럭비연맹과 대한럭비협회는 거듭 사과했습니다. 이들은 "국가가 잘못 울려 퍼진 사건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홍콩럭비협회와 홍콩 정부, 중국 정부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습니다. 현지 초임 직원이 인터넷에서 홍콩 국가를 내려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실수일 뿐 어떤 의도도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체 조사 결과, 홍콩 대표단이 아시아럭비연맹에 홍콩팀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 파일을 전달했지만, 대한럭비협회는 아시아럭비연맹으로부터 이 파일을 전달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때문에 현지 실무자가 임의로 인터넷에서 '홍콩 국가'를 검색했는데, '글로리 투 홍콩'이 '홍콩 국가'로 올라와 있어 이를 내려받았다는 것입니다.
 
대한럭비협회가 홈페이지에 게재한 사과문
 
단순 실수라는 해명과 거듭된 사과에도 홍콩 정부가 경찰 조사 운운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힌 데에는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홍콩 정부와 친중파 의원들이 중국 본토에, 새로 출범하는 시진핑 집권 3기 지도부에 잘 보이기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는 해석도 있고, 홍콩 내부적으로 반중국 정서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도 높게 대응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앞서 민주화 시위 당시 럭비 경기장 등 공공장소에서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이 울려 퍼지면 많은 홍콩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곤 했습니다. 또, 이번 기회에 다른 나라들에도 홍콩은 중국의 일부임을, 국제 경기 대회에서 반드시 '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려 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중국 외교부 "이미 사과한 일"…홍콩 기류 '급변'

중국 본토의 반응은 오히려 뜨뜻미지근했습니다. 지난 14일 중국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마오닝 대변인은 관련 질문이 나오자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대응을 했고, 주최 측이 이미 시정하고 사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홍콩 정부나 친중파 의원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외교부의 이런 반응을 한·중 관계 개선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다는 신호로 해석했습니다. 한·미·일 공조 강화 등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확대될 경우 한·중 관계가 악화해 중국을 난감한 입장에 빠뜨릴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18일 '홍콩 국가 연주 실수에 대해 홍콩의 친중 진영이 조용해졌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어 중국 외교부 브리핑 이후 홍콩의 기류도 바뀌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 목소리가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많은 입법회 의원들이 공개적인 논평을 피하고 있으며, 나아가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보도했습니다. 매체에 따르면, 중국 본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정치 거물은 "이 사건은 찻잔 속의 폭풍"이라면서 "국가적 차원의 사건으로 끌어올릴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 중진 의원은 "충성주의자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점수를 따기를 원했지만 한·중 관계 개선에 대한 여지를 읽지 못했다"고 지적했고, 다른 의원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국가 안보 침해를 내뱉는 바람에 홍콩의 세계적 명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비판했습니다. 선봉에 섰던 홍콩 정부와 친중파 의원들이 머쓱하게 됐습니다. 매사가 그렇듯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과유불급.

(사진=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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