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그사람] 'K-에듀'를 꿈꾸는 사교육 총수, 손주은

[그사람] 'K-에듀'를 꿈꾸는 사교육 총수, 손주은

1. 사교육은 나의 원죄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 연애를 할 때도 목숨을 걸었고 공부를 할 때도 목숨을 걸었고 사업에도 목숨을 걸었다. 뭔가에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질 못했다. 어렸을 때는 구슬치기와 축구에, 청춘 시절에는 연애에 몰입했고,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강의에 빠진 적도 있다. 당구, 골프, 포커 같은 취미를 반쯤 목숨 걸고 한 적도 있다. 당구를 44시간, 축구를 14시간 계속한 적도 있고 학원 강의를 22시간 쉬지 않고 한 적도 있다. 한 여자와 4백 24일을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났다.

모두 11개의 계열사가 있는 메가스터디 그룹 회장, 손주은의 이야기다. 이런 넘치는 열정으로 얻은 게 '사교육계의 총수'라는 말이다. 그룹 임직원이 2천 2백 명, 소속 강사 수가 1천 8백 명이 넘는다. '재야의 교육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손사탐'이라는 별명은 사교육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런 이 사람에게 당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더니 선뜻 그렇다는 답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떳떳하지 못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회한다' '반성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자신의 삶을 두고 '원죄' '사회적 범죄자' '잡놈'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 자신의 세 치 혀에 사람들이 속고 있다고도 했다. 자신은 실제보다 과대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업적이나 성취를 자랑하는 말이나 글은 거의 없다. 자랑하자고 들면 얼마든지 자랑할 게 있는 사람이 자신을 왜 이리 박하게 평가하는지 궁금했다.

메가스터디 그룹 손주은 회장 외부 초청 강연 모습

SBS에서 교육 분야를 취재하는 김경희 부장이 얼마 전 보내 준 동영상을 보니 사교육은 앞으로 10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했다. 몇 년 전부터 해오던 말인데 그 톤이 더 높아졌다. 사교육으로 입신하고 사교육으로 양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사람과 학연이 있긴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다. 전화로 한 번 만나자고 했더니 후배의 요청인데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지난 15일 오후 김경희 부장과 함께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를 찾았다. 강의 동영상을 보고 꽤 거친 사람이려니 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생각보다 표정이 밝았다. 성공한 사업가의 여유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2. 나의 노력이 사회 정의가 아니라는 비애

처음 사교육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7년이다. 한 여고생을 가르쳤는데 반에서 20등을 하는 학생을 5개월 만에 전교 15등으로 만들었다. 그다음에 가르친 학생들까지 대입에서 성과를 내면서 강남 일대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과외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2억 원을 벌었다. 쉽게 많은 돈을 버는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유학과 고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대학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사교육 시장으로 나섰다. 소수 학생을 대상으로 고액 과외 학원을 운영했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시키면 5천만 원, 원하는 대학에 보내면 1억 원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1997년부터 학원 강사로 나서 통합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첫 달 수강생이 겨우 8명, 월급은 32만 원이었다. 불과 다섯 달 만에 학생 수가 5천 명으로, 한 달 급여는 4억 원으로 늘었다. 이른바 '손사탐' 신화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2000년 온라인 강의를 하는 메가스터디를 창업했고 창업 4년 만에 코스닥 상장, 6년 만에 매출 1천억 원 목표를 달성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8천5백억 원, 올해는 1조 원에 근접할 전망이다.

'손사탐'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손선생 통합사회' 강의 교재

이 사람의 삶은 사교육의 질곡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1996년 말 5년 동안 운영하던 고액 과외 학원을 접었다. 한 달에 4-5천만 원의 매출을 올리던 곳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말렸지만 돈 있는 집안 아이들에게 학벌의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 학원은 당시 기준으로 명백한 불법이었다. 툭하면 교육청, 경찰, 국세청 단속 대상이 되는 일도 지긋지긋했다. 비슷한 또래 직장인들에 비해 열 배 이상의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음지가 아닌 양지로 나가서 떳떳하게 강의를 하자, 내 지식을 좀 더 싼 강의료를 받고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전수해주자고 결심했다.

학원 강사 자리를 구하지 못해 지인에게 부탁해 겨우 강사 자리를 얻었다. 대중 강의로 전환하던 1997년도 수능은 역대 최고의 불수능이었다. 과목별 단순 암기가 아니라 통합적 사고 능력을 측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제들이 대거 출제되었다. 과외 교사로 일할 때 전 과목을 혼자 가르쳤던 경험이 빛을 발했다. 국사, 세계사, 지리, 사회문화 등을 하나로 묶은 통합사회를 가르쳤다. 통합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가르치는 능력에 더해서 이를 탁월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이 사람 강의는 금방 소문이 났다.

1999년 학부모 한 명이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다. 딸이 손사탐 선생 강의를 듣게 하기 위해 대치동으로 이사 왔는데 이사 온 지 몇 달 만에 집값이 3억 원이 올랐다며 아들 성적만 아니라 집값도 올려줘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제는 부동산 가격 올리는 공범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나 내 강의를 듣게 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온라인 강의였고, 메가스터디 창업이었다.

초창기 메가스터디 사이트

거의 모든 인터뷰와 강연에서 이런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은 타고난 사람이다. 인생 자체에 극적인 요소가 풍부하지만 그 스토리를 풍성하게 풀어내는 것은 이 사람의 능력이다. 사업을 확장하고 돈을 더 벌고 사교육 업계에서 영향을 키워가는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강조, 반복, 생략 같은 방법을 통해 '고뇌하는 손사탐 선생' 스토리로 만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노력이 사회적 정의와 부합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고민을 끊임없이 하지 않았다면 탄생할 수 없는 신화이기도 하다.
 
"제가 초기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제 제자들이 잘 알아요. 소수 정예반을 운영할 때부터 그런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 너희들은 부모 잘 만나서 이 돈 써서 성적 올리지만 누군가는 너희들 때문에 밀려난다. 그럼 나의 행위는 뭐냐? 나하고 너희는 선한 관계다. 개인 윤리적으로…그런데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이 행위가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적 의미는 뭐냐. 나는 악이다. 맞잖아요."

사교육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이 사람 몸부림이 성공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사교육으로 고통받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노력을 통해 이 사람의 부가 커지고 지명도가 올라갔지만 말이다. 손주은 신화는 2004년 메가스터디 상장과 그 이후 급속한 성장으로 완성된다. 신화는 주로 '교육자 손주은'에 초점이 맞춰지고 이 사람 역시 그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에 비해 '사업가 손주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궁금한 대목이다. 2010년 강의를 그만뒀고 그 이후엔 '교육 사업가' 손주은으로 살고 있다.

메가스터디교육 사옥

쉰다섯 살이 되던 2015년 두 가지 인생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가 나쁜 놈은 되지 말자는 것이다. 그동안의 삶이 나쁜 삶이었으니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자는 뜻인지 아니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삶을 살겠다는 것인지 다소 모호한 말이지만 나쁜 사람은 되지 말자는 인생 목표는 특이하게 들린다. 두 번째 인생 목표는 능력 있는 호구가 되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지난 2016년 사재 3백억 원을 출연해 윤민창의투자재단을 만들었다. 청년들의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하는 재단이다. 사교육을 통해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리 떳떳하게 벌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빚을 갚는 마음으로 돈을 내놨다고 했다.

"재단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4-5백억은 내야 할 거 같더라구요.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3-4백억으로 바뀌더라구요. 이걸 어떻게 계산을 했느냐면 그동안 제가 떼먹은 십일조를 나름대로 계산을 한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십일조를 철저하게 냈는데 1997년 손사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어요. 한 달에 4천만 원 벌 때는 마누라가 들어온 돈의 10분의 1을 딱 떼서 교회에 내거나 기부를 했어요. 그런데 월 4억을 벌면 사람 마음이 달라져요. 엄청 큰 부자들 가운데 십일조 제대로 하는 사람 없어요. 저도 제대로 하면 4천만 원을 십일조로 내야 되는데 천만 원만 낸 거죠. 그런 식으로 떼먹은 게 300억쯤 되더라구요."

솔직함에 대한 집착은 거의 강박 수준이다. 이 사람 지인들도 한결같이 이 사람의 장점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점을 들었다.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로 '몰입'과 '중독'을 들었는데 여기에 '과잉'이라는 단어를 하나 더해도 될 듯싶다. 열정이 과잉인 것처럼 정직에 대해서도 과잉이다. 예를 들어 세금 문제를 보자.

"세금만큼은 완벽하게 합니다. 심지어 가능하면 절세도 잘 안 하려고 했어요. 예전에는 자녀들한테 세금을 거의 안 내고 상속할 수 있는 그런 보험 상품들이 많았어요. 제가 그런 걸 하나도 안 들었습니다. 보험사 직원들이 와서 권유하면 나는 그거보다는 세금 내겠다 그랬죠. 왜냐하면 부의 재분배 기능이 세금을 통해서 있으니까요. 절세를 해서 아이들에게 주는 것보다는 국가가 그런 재원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가족에게 현금으로 증여를 했더니 역삼세무서에서 조사받으러 오라고 하더라구요. 더 많이 주고 축소 신고한 거 아니냐고. 저는 현금으로 증여를 할 때도 신고를 정확하게 합니다."
 

3. 천하제일 1타 강사-강의는 나의 힘

그사람 손주은

집안이 유복하셨죠? 라는 첫 질문에 대한 답이 30분 넘게 이어졌다. 조부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부모님 사업 이야기를 당시 일 인당 국민소득에 마산 창원 지역의 경제 상황까지 더해서 설명했다. 손주은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의 도입부가 참으로 유장했다. 마치 강의를 하듯 길게 길게 말을 이어가는 이 사람을 보면서 대한민국 1타 강사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다섯 시간 반 동안 이어진 만남의 하이라이트는 이 사람이 '관동별곡' 몇 문장을 읊어가면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딸 윤민이의 이름과 그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든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었다. 사탐 1타 강사가 되려면 '관동별곡'까지도 이렇게 줄줄 외워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강의만 하면 신바람이 났고 강의를 하면 할수록 몸에서 힘이 솟았다. 자신에게 이런 재주가 있다는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남 앞에서 나서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고 국어책을 더듬거리며 읽다가 선생님에게 그만 앉아!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첫사랑 여학생에게 차인 뒤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분위기를 띄우는 일을 했다. 자신에게 선동가 기질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뒤로는 고3을 눈앞에 둔 학생이었지만 부흥 집회에 불려 다녔다.

"내가 이제 앞에 나가서 찬양 예배를 하면 사람들이 저한테 쫙 빨려 드는 느낌이 들었어요. 강의할 때도 그렇거든요. 손사탐 시절에 내가 마이크 딱 잡고 강의를 시작하면 250명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느낌이 확 와요. 그러면 학생들에게 받는 기운으로 그냥 강의가 춤을 추는 거지. 날아다니는 기분이에요. 부흥회 인도할 때 그런 느낌이었어요. 내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들이 우리 교단에 정말 인물 났다 이렇게 된 거죠."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윤춘호 논설위원

1991년 9월 교회에 다녀오던 아내와 두 자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4살 된 아들은 사고 직후 숨졌다. 아내는 한 달 넘게 사경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았지만 9개월 된 딸은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을 거친 끝에 이듬해 6월 하늘나라로 떠났다. 새벽에 세상을 떠난 아이를 공원묘지에 묻고 그날 저녁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을 했다. 슬픔에 잠겨 있는 것보다 차라리 수업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런 대목에서 이 사람에게서 열정을 넘어 광기 같은 게 느껴진다.

"그 상황이 되면 어쩌면 누구나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어요. 지금 애를 묻고 왔는데 학생들은 모르잖아. 오늘 새벽에 죽었으니까. 그러니 애들 학원 오잖아 그걸 미리 연락해서 오지 마라 하는 것보다는 그래 가자 이 생각을 할 가능성이 많은데. 그런데 수업하다가 결국은 그 사실을 숨길 수가 없는 거잖아."

수업 중에 내게 오늘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강의실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그 수업은 이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끝내지 못한 수업이 되었다. 그 고통은 1993년과 1996년 다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조금씩 잊혀지긴 했지만 강의에 몰입하는 것으로 두 아이를 잃은 아픔을 달래고 잊으려고 했다. 새벽 2시까지인 학원 수업은 새벽 3시를 넘어 4시가 돼서야 끝나기 일쑤였다. 강의에 몰입하면 시간 가는 것을 몰랐고 그렇게 몰입하는 것으로 고통을 잊었다. 온라인에서 2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본 2001년도 12월 강의 동영상을 보면 이 사람은 굿판에 선 무당 같기도 하고 신령한 기운에 사로잡힌 설교자 같기도 하다. 자신의 강의를 연예인들의 콘서트에 비유했다.

그사람 손주은
"손사탐은 엄청난 스타잖아…그 스타가 매일 10시간씩 학생들 앞에서 콘서트를 하는 거야. 그걸 행복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하여튼 그때는 거기에 확 빠져서 살았죠. 내가 유일하게 딴짓을 안 한 시기가 그때예요. 유일하게 몰입만 한 시기가 그때예요. 그때는 골프고 뭐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지금 와서 분석을 해보니 그게 왜 가능했느냐 완벽한 몰입이었던 거야. 매일 열 시간씩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받는 기가 있었던 거지요."

칠판에 직접 키워드를 적어가면서 수업을 한다. 칠판에 쓰는 글은 반듯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글은 반듯한데 말은 거침이 없다. 독설, 욕설, 비속어가 수시로 터지고 남들 같으면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성적을 올려주고 대학입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한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은 어떤 말이 됐든 이 사람의 말 한마디가 절박했을 테니 비하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독설이 매력이었던 사람인데 이제 순해진 느낌이다. 이제는 자신이 독설을 퍼부을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세월도 이 사람을 조금 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분필 한 자루로 몇천억 원을 번 사람이다. 일 년에 수십조 원이나 되는 사교육 시장 규모를 보면 그 업계의 최고봉인 사람의 재산치고는 별로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교육이 우리 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보상의 크기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람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 것은 맞지만 돈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당신을 움직이는 요소 중에 돈의 역할이 핵심적인 요소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고, 꽤 있지만 돈이 많아서 좋은 게 몇 가지밖에 없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돈을 쓰는 게 별로 없어요. 유흥에 돈을 빵빵 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체질 상 술을 한 방울도 못하니까 그건 못하는 거죠. 골프 치는 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어디 가서 폼 잡고 돈 쓰는 것은 체질적으로 못하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딸과 쇼핑할 때 가격표 보지 않고 물건을 구입하는 거 말고는 돈 많아서 좋은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프로야구 구단을 하나 갖는 게 꿈이지만 그럴 정도의 부는 아니라고 했다.
 

4. 나의 기본은 신앙

손주은 회장의 가족사진

외할아버지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된 목사, 아버지는 장로, 어머니는 권사다. 지난 2019년 타계한 어머니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이 사람이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형제 6남매 가운데 두 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사람 이름도 주님의 은혜라는 뜻으로 主恩이다. 할머니는 손주들이 시험을 볼 때면 사흘 금식, 길게는 일주일 금식 기도를 했다. 일요일은 온전히 주님에게 헌신하는 날이어서 일요일에는 공부를 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경남 지역에서 양돈업을 크게 해서 해외로 수출도 하고 군부대에 납품도 했다. 사업가 기질은 어머니 쪽에 더 있었던 모양이다. 동네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가져다가 가장 싸게 팔았다. 엄격한 기독교 신자답게 담배와 술은 팔지 않았다. 일요일에 당연히 영업을 하지 않았다. 이런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명절이면 점원들은 물론 이 사람까지 나서 물건을 팔았다. 농기구, 농약, 사료까지 팔았고 양복점, 양화점까지 겸했다. 나중에는 아예 가게 간판을 '제일백화점'이라고 붙일 정도였다. 어머니는 겨울철이면 마산 어시장 입구에 가죽점퍼 가게를 냈다. 지금으로 치면 한 벌에 2백만 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었지만 물건이 없어 못 팔 지경이었고 진주, 순천, 진영 등지에 지점을 냈다.

"그 가죽 잠바를 하루에 보통 25벌을 만들어 팔더라고. 지금 돈으로 생각하면 한 벌에 2백만 원쯤 했던 거 같아요. 하루 매출액이 5천만 원인 거예요. 마산이 우리나라 수출자유지역 1호예요. 그 시기에 노동자들이 마산에 몰려들었는데 겨울에 솜옷 입을 때거든요. 그런데 솜옷이 되게 불편하잖아요. 그런 노동자들에게 가죽 잠바는 로망이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냐면 내가 한참 학원으로 돈 벌 때 '아직 내 젊을 때보다 네가 모자란다. 나는 그때 마산에 한 달에 집 한 채를 살 만큼 벌었다' '그러셨어요. 내가 메가스터디를 만들기 전까지는 맨날 그러셨어요."

이 사람이 다니는 교회는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기독교 근본주의 계통의 교파로 개신교 안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분류된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근본은 '재건 신앙'이라고 했다. 다소 지나치다 싶은 엄격한 도덕주의, 정직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은 신앙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완전히 변한 사람을 주변에서 많이 봤지만 자신이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신앙인 것은 틀림없다. 신앙 간증 초청을 숱하게 받았지만 나간 적이 거의 없다. 나갈 자격이 없다는 것인데 이 대목에서도 왠지 자기 검열의 '과잉'이 느껴진다.

학창 시절 손주은 회장(왼쪽)

어렸을 때 신동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천만 단위 숫자의 암산을 했고 국어책을 줄줄 읽고 성경 구절을 막힘없이 외웠다. 초등학교 2학년을 건너뛰고 3학년으로 바로 진학했다.

"어릴 때 신동으로 소문이 난 게 제게는 큰 압박이었어요. 월반 이후에 사람들이 저한테 거는 기대가 너무 컸거든요. 그래서 남들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컸어요. 제가 중3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간 것도 사실은 마산고등학교 입시에 대한 부담이 커서 무의식적으로 도피한 것일 수 있어요."

중고등 학교 시절은 화려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비하면 존재감이 그리 강하지는 못했다. 부산이라는 대도시에 기죽기도 했고 텃세를 부리는 학교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이 사람에게서는 어딘가 모르게 마이너리티의 정서 같은 게 느껴진다. 부러움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존경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사교육계에 종사해온 것도 그런 느낌을 주겠지만 다소 의기소침했던 중고등학교 시절도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5. 운동권과 거리는 멀었지만 의식은 여전히 386 ?

그사람 손주은

1981년 서울대 인문대학에 입학했다. 학생 운동보다는 연애와 당구, 축구 등에 관심이 더 컸지만 그 시대사상의 세례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일부 선배들의 과격함과 비현실적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시절의 대의를 부정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 세대는 정치적으로 각성할 수밖에 없는 학번이잖아요. 선배들도 제게 영향을 줬지만 제겐 한완상 교수님의 <민중과 사회> 이런 책이 충격적이었어요. 리영희 선생이 쓴 <우성과 이성> 같은 책도 읽었지만 백기완 선생이 쓴 책들이 제겐 더 와닿았어요. 그런 책들을 보면서 내가 발을 제대로 땅에 딛고 있지 않구나 하는 각성을 많이 했죠."

이 대목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했다. 음악평론가이자 명리학자인 강헌,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등이 이 사람 입에서 나왔다.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거나 선배들이 지도하는 학회에 적을 두는 대신 서울대 인문대 동기였던 강헌, 정경심, 홍석경 등과 1-2주에 한 번씩 세미나를 했다는 것이다. 의식화를 목적으로 하는 세미나와는 커리큘럼이 사뭇 달랐다. 당시 유행하던 책은 물론 서양 음악사, 서양 미술사 같은 것까지 공부했다.

"강헌이가 주도해서 세미나를 시작했어요. 어느 날 서양 음악사를 공부하자는 거예요. 어떻게 할 건데 하니까 비발디부터 시작해서 모짜르트까지 주요 작곡가 6명의 곡을 들어야 되는데 한 작곡가 당 30곡은 들어야 된대… 강헌 이 자식이 학생회관에 앉아서 한 30분 만에 6명의 작곡가의 180개가 넘는 곡명과 작품 번호를 다 외워서 적는 거야. 이런 미친놈의 천재가 다 있나 싶었죠."

아버지는 법관이 되기를 바랐고 본인은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꿈꿨지만 대학 시절은 뚜렷한 앞날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시기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학 3학년 때는 '타락'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고 복학하기 전에 결혼을 했다. 생활비가 떨어져 서울대 졸업식에서 커피 장사를 하고 과외 교습에 나선 사연도 꽤 알려진 스토리다.
1-2년 바짝 벌어서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생각에 그쳤다. 졸업을 한 뒤 사교육에 종사하면서 학교 동기들에게 다소 주눅 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한 달에 몇천만 원을 벌고 어지간한 월급쟁이들보다 몇 배나 되는 소득을 올려도 과외로 돈을 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가 하는 일이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386세대의 정서가 아직도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그사람 손주은

"그 시기에 투쟁하고 교도소에 갔다 오고 이런 사람들은 그런 것을 훈장이라는 착각을 아직도 하는 것 같고 그 시기에 운동에 몸을 던지지 않은 사람들은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저는 그런 것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나한테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부채의식이 큰 것은 아니에요."

매출 실적이 좋더라도 아무리 봐도 선생이 아닌 거 같은 사람은 강사로 계약을 하지 않는다. 투자를 할 때도 상품보다는 상품을 설계하거나 상품을 가져온 사람을 보고 결정한다. 어려운 결단을 할 때는 항상 Back to the basic, 이익이냐 손해를 따지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진다. 성경 다음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고 했다. 소유 중심의 삶에 동의하기 어렵고 비인간화, 소외 같은 것에 고민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전히 386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6. K에듀케이션의 마중물이 되고 싶다

2003년 <고3 혁명>이라는 책을 썼다.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바퀴벌레처럼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는 것, 입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고3들이 성공하는 방법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대필 작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만 이 책에서는 손주은의 말소리는 물론이고 숨소리까지 느껴진다. 사교육에도 전문가가 있고 그 전문가 중에서도 이 사람이 발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의 뜨거운 기운 때문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책을 쓸 때가 손주은의 전성기였다. 이 사람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이 줄을 섰고 2000년 창업한 메가스터디는 해마다 몇 배의 성장을 보이며 코스닥 상장을 앞둔 시점이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숨죽이며 이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그랬던 사람이 사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 그 자체의 효용성을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메가스터디 입시설명회 입장하기 위해 선 긴 줄

"강의를 할 때마다 늘 처음에 이야기를 해요. 내 강의를 듣고 성적이 올라가면 그것은 미친놈이다! 난 그거 진심이에요.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설명할 때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이 세상 소비재 중에 가장 효용이 없는 게 교육 상품이다. 다른 상품은 돈 쓰고 만족 못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이거는 돈만 쓰는 게 아니고 시간도 쓰는 거다. 인생도 들어가는 건데 이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정확하게 측정이 안 된다"

-사교육에 종사한 것에 대해 부끄럽다, 원죄, 성찰과 반성 이런 표현들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허무함 같은 것도 느껴지더군요.
"허무함까지는 아니고…"

-사교육만이 아니고 교육 자체의 효용성까지 의심하는 말씀을 들으니 지금까지 자신이 잘 놀고 즐기고 거기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이 왜 이런 생각을 하실까?
"그래서 제 이런 태도에 대해 사교육에 종사하는 분들이 오해를 하기도 해요. 자기는 돈 다 벌고 잘 놀던 물에 침 뱉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지금까지는 사교육을 통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성공의 척도였지만 이제는 그런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가 그러하고, 산업 구조가 그러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 단계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어느 기업을 다니느냐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됐다고 했다. 대학의 효용성이 떨어지니 대입 사교육도 쇠퇴할 것이라는 말이다.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를 돌아 그 성을 무너트렸다는 성경 속 일화가 연상될 만큼 이 사람 이야기는 집요하다. 회사 직원들이 군수 물자를 만드는 기업 총수가 반전 운동하는 꼴이라고 말하는 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세상이 옳은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K에듀케이션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졌다. 이 대목에서 사교육 전문가가 아니라 미래학자 같은 태도였다. 2년 전부터 한국의 사교육이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고 수출되는 이른바 K에듀케이션이 가능한지 고민하며 몇 사람과 공부 중이라고 했다. K팝, K드라마가 처음에는 "저게 노래냐, 립싱크지", "저거 막장 아니냐" 같이 자기 비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글로벌 차원에서 수용이 되니 우리 국민들이 자긍심을 갖는 것처럼 한국 사교육도 지금은 주입식 교육이다 뭐다 비판이 있지만 글로벌 무대에서 K에듀케이션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윤춘호 논설위원

-K에듀케이션이라는 게 어떤 것들이 어떤 요소들이 담긴 교육입니까.
"일단 한국이 가지고 있는 교육 수요자나 교육 공급자의 치열함… 그게 중요한 본질로 들어가야 될 거고 거기에다가 메타버스 공간에서, 그게 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공간이 될 거니까, 그 시스템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에듀테크적인 걸 얼마나 잘 만들어 낼 거냐 하는 것이 저는 답이라고 생각을 해요."

학교 교육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학생들이 학교를 매일 갈 필요가 있느냐, 매일 안 가도 되는 거 아니냐, 고등학교 몇 개를 하나로 통폐합하면 재원도 확보할 수 있고 그렇게 확보된 재원으로 기업, 공공기관과 연계해 다양하고 현실적인 학습 커리큘럼을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학교는 메타버스 공간 안에 지으면 되는 것 아니냐 등등. 아이디어는 많지만 교육부 장관이든 교육감이든 그런 자리에는 관심도 없다고 했다. 대신 K에듀케이션의 상징, 마중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크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 사람이 '교육가'보다는 '교육 사업가'로 보였다.

자신의 노력이 사회가 인정하는 정의와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 반 평생 고민이자 한이다. 개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지 못하기에 당당하게 내 인생은 성공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K에듀케이션 프로젝트는 필생의 과업이다. 처음에는 저게 노래냐, 저거 막장 아니냐는 말을 들었던 K팝이나 K드라마처럼 존중보다는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던 사교육을 K에듀케이션으로 만들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K에듀케이션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 사람이 여기에 승부를 걸 거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인터뷰 중간에 김밥으로 저녁을 먹으면서도 이 사람 이야기는 잡담으로 흐르지 않았다. 5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이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폭소가 터지는 즐거운 대화라기보다 긴장을 풀기 어려운 집중도가 높은 흥미로운 대화였다. 이 사람이 느끼는 부끄러움의 정체나 자신의 세 치 혀로 이 세상 사람들을 속인 것이 무엇인지도 묻지 못했다. 그런 것들은 이 사람이 믿는 신 앞에서나 털어놓을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손주은 회장과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23일) 밤 9시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