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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윤찬이가 피아노 치는 건 도 닦기와 같다"

임윤찬을 키운 스승 손민수 교수의 '속내 토크'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임윤찬은 스승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손민수 교수가 자신에게는 '신'과 같고 '종교'와 같다고 합니다. 그만큼 스승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한다는 거죠. 손민수 교수는 2017년부터 임윤찬을 가르쳐 왔는데요, 저와 이병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SBS 골라듣는뉴스룸의 공연문화 전문 팟캐스트 커튼콜에서 손민수 교수를 초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커튼콜 손민수

손민수 교수는 '건반 위의 철학자'로 유명한 거장 러셀 셔먼의 제자이며, 학구적 연주자로 이름나 있는데요, 임윤찬이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는 원래도 그렇지만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였어요. 인상적인 이야기로 가득한데, 1부의 몇 대목을 요약해 전해드립니다. 궁금하시면 팟캐스트를 들어주세요.

1부(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08/clips/2297)는 어제(24일) 공개됐고 2부는 다음 주 월요일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빨리 다음 곡을 공부하고 싶다"

'산에 가서 피아노만 치고 싶어요'라고 했는데, 그게 아마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지금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은가. 너무 큰 파도가 몰려오고 있으니 걱정도 됩니다. 피아니스트는 죽을 때까지 새롭게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걸 윤찬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빨리 다음 곡을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그대로 평정심을 잃지 않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임윤찬 연주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

피아니스트 임윤찬  (사진=클라이번 재단 제공)

콩쿠르 우승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심장에 진동하는 힘을 느끼게 하는 연주였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윤찬이처럼 피아노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결은 '오로지 음악이 요구하는 영혼과 캐릭터 속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밀어 넣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과정을 나름대로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윤찬이 연주를 볼 때 작곡가와 사적인 공간에서 둘만이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작곡가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서 외길을 갔습니다. 어떤 방해물도 다 쳐내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연주를 위해 쏟는 남다른 노력

(임윤찬이 리스트의 '순례자의 해: 이탈리아' 중 단테 소나타를 연주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는 일화를 기자가 언급했더니) 연주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재료들을 늘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은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태도입니다. 리스트 단테를 치면서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됩니다. 윤찬이는 당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기도 읽었습니다. 윤찬이는 가능한 모든 자료들은 다 찾아보고 싶어 하는 학생입니다. 옛날에 활동해서 지금은 거의 잊힌 피아니스트들을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마음이 크고, 자료 리서치를 정말 많이 합니다.
 

'오리지널' 카덴차를 친 이유

반클라이번 콩쿠르서 경연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사진=목프로덕션 제공, 연합뉴스)

윤찬이는 콩쿠르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초연 때 쳤던 '오리지널' 카덴차를 쳤습니다. 아마 작곡가 본인과 호로비츠, 존 브라우닝 같은, 윤찬이가 좋아하는 연주자들의 마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 곡 1, 2, 3악장 전체를 두고 볼 때 1악장의 카덴차가 너무 비중이 커져 있기 때문에, 두 번째 버전인 오시아로 가게 되면 구조적으로 1악장 뒷부분에 너무 중심이 맞춰지고 후반부에 에너지가 힘이 빠지는 느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선택은 윤찬이에게 맡겼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윤찬이는 두 가지 버전 카덴차를 다 칠 수 있고, 다음 번 연주에는 오시아 카덴차를 칠 수도 있습니다.

콩쿠르에서 화려한 기교를 보여주기에는 오시아 카덴차가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윤찬이에게 그런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콩쿠르는 '내가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카덴차: 악곡이나 악장이 끝나기 직전에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추고 솔로 악기의 연주만 진행되어 독주자의 기교와 음악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부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끝부분에 작곡가가 직접 쓴 카덴차가 있습니다.

*오시아: 악보에서 원래의 '오리지널' 연주 방법 외에 존재하는 다른 버전을 '오시아'라고 합니다. 악보에 오리지널과 오시아를 병행 표시합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의 오시아 카덴차는 라흐마니노프가 오리지널 카덴차를 쓴 다음에 덧붙인 것인데, 오시아는 오리지널 카덴차에 비해 스케일이 크고 드라마틱하며 두터운 화음을 썼습니다.

 

기교에 매몰되면 안 돼…나보다 음악이 먼저

피아니스트들은 연주하면서 내가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치고 있는지를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가락에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오히려 음악의 메시지는 폭풍 같은 물결 속에 휩쓸려 지나갈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난곡인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선곡한 이유

임윤찬

이 12개의 연습곡은, 물론 극한의 피아노 테크닉이 요구되는 곡이지만, '연습곡'이라고만 하기는 힘듭니다. 테크닉도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한 요소에 불과합니다. 이 곡은 하나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세트'입니다. 그래서 임윤찬의 서사를 담아내기에 너무 좋은 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곡에서 중점이 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시적인 상상력입니다. 윤찬이가 이 곡을 정말 좋아하고 그렇게 빠져들어서 연주할 수 있었던 건 먼저 마음으로 그런 시적인 감정을 생생하게 느꼈고, 그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각을 많이 하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였다면, 즉 '내가 이걸 잘 쳐야지. 이 곡이 이렇게 어려운데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 뒤에 감정을 넣으려 했다면 잘 안됐을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영감을 받고 이 음악과 '연결'되면, 학생들이 연주하다 눈동자가 타오르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 이거 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합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음악에서 뭔가 터져나오고, 닫혀 있었던 부분이 조금씩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윤찬이가 초절기교 연습곡을 공부할 때 이런 순간들을 많이 봤습니다. 예를 들어 '이 부분은 독립투사의 마음 같다' 하고 얘기를 해주면 바로 확 받아들이고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콩쿠르를 싫어하지만 클라이번 콩쿠르에 나간 이유

세상에 윤찬이처럼 연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믿었던 바로 지금 10대 윤찬이의 연주를 세상 사람들이 한 번쯤은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콩쿠르는 많지 않은데, 그중 하나가 클라이번 콩쿠르였습니다. 우연찮게도 코로나19로 1년이 연기되어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참가 연령 하한선이 18살이라 예정대로 지난해 열렸다면 참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승하고 심란하다는 제자...스승의 속내는?

우승하고 나서 기쁘지 않고 심란하다고 한 건 정말 윤찬이다운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는 윤찬이는 정말 순수하게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윤찬이는 특히 콩쿠르의 참가자 30명, 그중에서도 한국인 참가자들은 정말 훌륭한 피아니스트인데 왜, 어떻게 내가 됐지? 내가 그 형 누나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데? 나는 제일 어리고 준비도 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참가자들도 윤찬이의 특별함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윤찬이가 너무 깊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윤찬 (사진=클라이번 재단 제공)

솔직히 말하면, 윤찬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음악을 하든, 자기가 음악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상황들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자신은 조용하게 지내고 싶은데 요란한 상황이 벌어지면 견디기 힘들어할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감사하고 늘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윤찬이는 이전에도 슬럼프가 오면 스스로 고민하게 슬기롭게 극복해 왔습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공부하며 힘들어할 때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며 극복했습니다. 윤찬이는 특별한 음악가이기 때문에, 음악 속에서 해답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 닦기처럼. 마음을 단련하는 수도승처럼.

윤찬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울릴 수 있었던 이유는,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 명백한데 그 안에 한 스푼도 오만하거나 편견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주를 하다 보면 나를 드러내고 싶은 오만함, 또 이 음악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하는 편견에 영향받기 쉬운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여기까지 온 과정은 도 닦는 것과 비슷합니다. 수도승이 자기 마음을 단련시키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찬이는 너무 상상력이 뛰어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확 떠벌리고 뭔가 애써서 표현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쭉정이를 쳐내고 정리해야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윤찬이가 앞으로도 기발하고 엉뚱한 자기만의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음악으로 번역해낼지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풀어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사진=클라이번 재단 · 목프로덕션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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