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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국민은 검찰을 선출한 것이 아니다

[취재파일] 국민은 검찰을 선출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정치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통치를 담당할 정치적 집단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선거에 앞서 예비내각(Shadow Cabinet)을 발표하기 때문에 이런 측면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대통령제 국가에서도 주요 후보들이 정당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함으로써 행정권력을 담당할 정치적 그룹을 선택할 기회를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요컨대, 의원내각제이든 대통령제이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통치자 1명을 선출하는 행사일 뿐만 아니라 통치를 담당할 정치적 그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절차이기도 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선출한 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정치적 그룹을 행정권을 담당하는 정치 집단으로 고른 것일까? 형식적 의미에서 국민은 윤석열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인 국민의힘 또는 국민의힘이 대표하는 보수적 정치 세력을 행정권력을 담당할 정치적 집단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약 1달 동안 진행된 핵심 보직 인사와 인사를 둘러싼 절차를 살펴보면 국민의힘 또는 전통적인 보수 정치 집단으로 인식되는 집단이 아닌 또 다른 그룹이 행정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른바 '윤석열 사단' 또는 '검찰 라인'으로 불리는 전·현직 검찰 관계자들이 행정권력의 효율적 작동을 위해 장악해야만 하는 커맨딩 하이츠(Commanding Heights) 곳곳에 포진됐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커맨딩 하이츠를 장악한 '검찰 라인'

정치적 성격이 덜한 행정관료 또는 행정관료 출신 인사들을 대통령이 발탁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 출신 인사 기용의 질과 양은 일반적 수준의 테크노크라트 발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인사권과 관련된 보직 배치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인사 관련 보직이야 말로 권력 행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커맨딩 하이츠에 해당한다.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곳에 보낼 수 있는 권력, 대통령 권력의 제대로 된 행사를 위한 전제가 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 고위공직자의 인사권 행사를 담당하는 보직에 배치된 인사들은 검찰 출신 일색이다.

대통령실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인사기획관과 인사비서관이 모두 검찰 출신이며, 고위공직자 후보자에 대한 1차적인 인사 검증 기능을 담당하는 곳도 검찰 출신 장관이 장악하고 있는 법무부다. 대통령실 내부에서 인사의 추천(인사수석실)과 검증(민정수석실)을 모두 담당하던 과거에 비해 인사 검증 기능을 대통령실 밖으로 내보낸 것은 제도적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애써 대통령실에서 분리한 검증 기능을 인사를 본업으로 하는 인사혁신처 등이 아니라 법무부에 배치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핵심적인 권력 기능을 어떤 그룹에게 맡기려고 하는지 의중을 드러낸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검찰 라인'이 커맨딩 하이츠를 장악했다는 신호인 것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선 후보를 선택한 이유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법률적·윤리적 하자가 없는 사람을 원하는 자리에 쓰는 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대통령 선거는 통치자 1명을 선출하는 이벤트일 뿐만 아니라 행정권력을 담당한 정치적 그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민이 지난 대선에서 선출한 사람은 국민의힘에 소속된 기호 2번 윤석열 후보였지, 검찰총장을 그만둔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대선 후보로 직행한 '검찰 라인' 또는 '윤석열 사단'의 보스인 윤석열 후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윤석열 대통령을 뽑은 사람 중 더 많은 이들은 검찰총장에서 대선 후보로 직행한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한 것에 가깝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자리에서 퇴직하기 몇 달 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가 그 증거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2020년 11월에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40%, 찬성하는 여론이 20%로 조사됐다. 이 조사 이후 문재인 정부와 추미애 전 장관 등이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을 상대로 사상 초유의 행태를 이어가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여론이 상승했고 결국에는 대통령 당선에 이르렀지만, '검찰총장이 대선으로 직행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다수가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존재하는 셈이다.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검찰'을 선출한 것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검찰에는 오히려 악재

'검찰 라인'의 요직 장악은 국민이 선출한 바 없는 특정 그룹에 권력이 쏠리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검찰 출신 인사들의 인적 집합체로서의 '검찰 라인'이 아니라 제도로서의 검찰에는 오히려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검찰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검찰 출신 대통령과의 특수 관계를 매개로 곧바로 권력의 이너써클에 편입되는 모습이 준사법기관인 검찰에 미칠 영향은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설사 제도로서의 검찰에 소속된 개인이 실제로는 중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검찰 출신이 요직에 집중 포진된 특정 세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업무를 처리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불식시키기는 쉽지 않다. 

'검찰 라인'의 약진은 검찰 내부에서 업무를 중립적으로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검사들에게는 오히려 악재인 것이다. 반대로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중립성보다 정치권력에 대한 접근성에 더욱 가치를 두는 일부 정치 검사들에게는 가슴 뛰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사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에서 대선 후보로 직행했을 때부터 우려됐던 바이지만, 윤 대통령이 '검찰 라인'을 행정권력을 담당하는 요직에 집중 배치함으로써 걱정이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선거에서의 승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사단'의 집중 기용은 정당 내부에 뿌리가 없는 대통령이 현실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라고 애써 두둔하는 사람도 있다. 국회의 인준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는 자리의 경우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를 견제할 방법이 마땅히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출발한 정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견제할 수 없는 곳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No"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측근들에 둘러싸여 행사할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는 정치권력의 부패와 남용을 오랫동안 수사한 경험이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 임기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세월이 지난 후, 윤석열 정부 5년이 '검찰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 참고: 커맨딩 하이츠 (commanding heights)는 레닌이 1922년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한 국가의 경제를 주도하는 기간산업 또는 주도 세력을 뜻한다. '특정 분야를 장악하기 위한 핵심적인 고지'라는 뜻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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