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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EYE] 제조업 경제와 궁합 안 맞는 한국 정치

제조 강국에 필수인 조율과 합의, 정치가 방해

[깊은EYE] 제조업 경제와 궁합 안 맞는 한국 정치
과거 우리 경제에는 수많은 역할 모델이 있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이 이렇게 한다더라" 하면 그게 모범이 되고 정책으로 채택되곤 했다.

정보에 대한 신뢰도 그랬다. 한국 경제에 대한 정보마저도 세계은행이나 IMF 통계를 더 믿었다. 그 통계가 사실은 한국 통계청에서 가져간 자료인데도 말이다.

세상이 변해서 요즘은 한국이 모방할 만한 역할 모델이 별로 없다. 많은 부분에서 한국은 이미 선도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경제와 정치 시스템에서도 이제는 한국적 모델의 설정이 필요하다.

전 세계를 시장경제 체제가 주도하고 있지만 나라마다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약간씩 다른 시장경제 시스템이 저마다 궁합이 맞는 정치 시스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 시스템에 관한 대표적인 학술적 분류로는, 경제 발전이나 시장 실패 예방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조정시장경제 시스템과, 되도록 시장 자율에 맡기는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이 있다.
조정시장경제
경제 발전이나 시장 실패 예방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
자유시장경제
되도록 시장 자율에 맡김
조정시장경제 : 독일·북유럽식, 다당제, 제조업 발달, 장기투자 자유시장경제 : 영미식, 양당제, 금융서비스업 발달, 단기투자

그간의 연구들을 보면 조정시장경제 시스템은 주로 독일과 북유럽, 일본을 비롯해 제조업이 발달한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공장을 짓고 제품을 만들어 유통망을 통해 판매해서 수익을 얻는 제조업의 특성상, 여기서의 중점적인 투자 형태는 장기 투자가 주력일 수밖에 없다.

이런 나라들에서 정치는 조율과 협치가 중요한 다당제와 연정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노동 문제를 비롯한 민감하고 중요한 현안들은 노사정 협의 체제에서 다자 간 협의를 통해 방향이 정해진다.

이에 비해 영국과 미국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자유시장경제는 주로 금융과 서비스업이 발달돼 있다. 거대한 공장이나 설비가 필요 없는 두 산업의 특성상, 투자 형태는 단시간 내 이익 실현을 선호하는 단기 투자가 주력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한 나라들의 정치 형태는 빠른 정책 결정과 강력한 추진이 보장되는 양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 걸까. 몇 가지 측면에서 한국은 앞서 기술한 일반적인 분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고도 성장기 한국은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정부가 경제 전반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갖고 기업에 막대한 정책 자금을 지원하며 시장경제를 끌어왔다는 점에서 볼 때, 전형적인 조정시장경제의 나라로 볼 수 있다.

IMF 이후 미국식 자유시장경제가 강제적으로 도입되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제조 강국 타이틀 획득에, 조정시장경제가 강력한 뒷받침이 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한국이 조정시장경제에 가깝다면 정치 형태가 다당제나 연정 형태여야 시너지를 낼 텐데, 한국 정치는 명목상 다당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정치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사실상 양당제로 운영돼왔다.

거기에다 사실상 양당제인 한국의 정치는 극한 대립과 갈등을 사회 전반에 조장하면서 조정시장경제에 반드시 필요한 덕목인 사회적 합의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고용 안정과 근로 조건에 관한 노사정 협의는 항상 실패의 노정을 걸어왔다. 민감한 이슈에 대한 이해집단 간의 협의나 조율 역시,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나라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에 똑같은 틀을 강요할 수 없지만, 제조 강국에서 경험적으로 필수라고 여겨지는 조율과 협의를 유도하는 정치적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만약 그것까지 더해졌다면 대한민국은 훨씬 더 잘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의 경제 현실을 살펴보면, 한국 경제는 자동차와 조선, 철강, 전자와 같은 전통 제조업의 강국인 동시에, 혁신과 창의성 및 빠른 전환이 필요한 IT 강국이기도 하다.

정부가 선두 지휘하는 조정시장경제가 전통 제조 강국 시절에 잘 먹혔다면,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는 시장 자율을 중시하되, 규제 혁파로 혁신을 북돋우는 레벨업된 정부의 조정 기능이 필요해 보인다.

모방할 대상이 없는 시대,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정치 경제 시스템을 모색해야 할 때다. 새로운 시스템을 어떻게 지칭하든, 거기에는 노사정과 여야를 비롯한 이해집단 간에, 갈등과 파탄 대신 조율과 합의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

(고철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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