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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작침] 임신중절권 뒤집겠다는 미국, 어떻게 생각하나요?

임신중절권 뒤집겠다는 미국, 어떻게 생각하나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어느 한 사진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 사진에는 같은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어요. 한쪽의 사람들은 "KEEP OUR CLINICS"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고, 또 다른 쪽의 사람들의 손에는 "LET THEIR HEARTS BEAT"이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진료소를 유지하라"라는 구호와 "그들의 심장을 뛰게 하라"라는 구호가 함께 울려 퍼지는 공간, 바로 미국 연방 대법원 앞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임신중절권은 항상 뜨거운 감자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죠. 그런데 최근 임신중절권을 인정했던 판결을 뒤집을 것이라는 내용의 의견이 유출되면서 다시 한번 이슈의 중심으로 떠올랐어요. 이번 주 마부뉴스에서는 이 임신중절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왜 이런 결정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상황은 어떤지 데이터로 하나하나 따져볼 예정입니다. 이번 주 마부뉴스가 독자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겁니다.

임신중절권 뒤집겠다는 미국, 어떻게 생각하나요?
 

49년 전으로 돌아가는 미국?


미국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습니다. 연방 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인정했던 판결을 폐지하겠다는 의견서 초안이 유출되면서 미 전역에 파장이 일고 있거든요. 판결이 폐지되고, 뒤집어지면 어떻게 되냐고요? 기존엔 임신중절을 규제하는 주 법을 미국 연방 단위에서 차단했지만 이제는 각 주에서 알아서 허용하거나 금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에 편법으로 임신중절을 규제했던 주에서 대놓고 임신중절을 금지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미 연방 대법원 앞에서 시위중인 시위대

문건이 공개되자 임신중절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 대법원 앞에서 연일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길래 이렇게 상황이 심각한 걸까요? 마부뉴스가 유출된 초안 일부를 가져와봤어요.
 
Roe was egregiously wrong from the start. Its reasoning was exceptionally weak, and the decision has had damaging consequences. And far from bringing about a national settlement of the abortion issue, Roe and Casey have enflamed debate and deepened division.

'로 판결'은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틀렸다. 해당 판결의 추론은 유난히 약했고, 그 결정은 해로운 결과를 낳았다. 임신중절 문제에 대한 국가적 해결을 가져오기는커녕 '로 판결'과 '케이시 판결'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분열을 심화시켰다.


'로 판결'과 '케이시 판결'이 뭐길래 이런 내용이 담긴 걸까요? 미국의 임신중절 권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상황을 파악하려면 이 두 사건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참고로 연방 대법원 대법관 9명 중 5명의 의견이 담긴 의견서 초안 원본은 미국의 정치 전문 언론사 폴리티코에서 볼 수 있습니다.
 

1973년 미 연방 대법원의 선택


초안에서 Roe로 언급되는 판결은 바로 '로 대 웨이드' 사건을 의미합니다. 혹시 독자 여러분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들어본 적 있나요?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미국 대법원의 가장 중요한 판결 중 하나인데,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미국 헌법에 기초한 사생활의 권리가 개인의 임신중절권까지 포함하는가?”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게요. 1971년 텍사스 주에서 성폭행으로 인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제인 로(가명, 실명은 노마 맥코비)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인 로는 임신중절 수술을 하고 싶었지만 텍사스 주의 병원들은 거부했죠. 결국 로는 텍사스 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사건을 맡은 검사는 댈러스 카운티의 헨리 웨이드라는 지방검사였고요. 그래서 이 사건을 원고와 담당 검사의 이름을 따서 '로 대 웨이드' 사건으로 부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대법원의 선택은 어땠을까요? 당시 연방 대법원은 7대 2로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 권리가 사생활 보호 권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어요. 대법원은 태아가 산모의 자궁 밖에서 스스로 생존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지 않았다면 여성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임신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봤죠.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73년에 상당히 진보적인 판결이 이뤄진 셈입니다.
Keep Abortion Legal 판넬을 들고있는 여성

이번엔 시곗바늘을 1992년으로 돌려볼게요. 당시 펜실베이니아의 주지사로 있던 로버트 케이시는 강경한 임신중절 반대론자였습니다. 케이시는 펜실베이니아 주법으로 임신중절 제한 규정을 만들었고, 이에 반발한 지역 시민단체는 케이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죠. 1973년 판결로 이미 연방차원에서 여성에게 임신중절 권리를 보장해줬는데, 주에서 규제를 만드는 건 위헌 아니냐는 게 시민단체의 입장이었어요.

케이시가 제한 규정을 만든 것도 사실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때는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로 이어지는 공화당 11년 차였거든요. 보수 진영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었죠. 게다가 연방 대법관 중에 보수 측 인사로 꼽히는 법관들도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연방 대법원은 1973년의 핵심 원칙을 유지했고 펜실베이니아 주법의 제한 규정을 위헌으로 판결했어요. 1992년의 대법원도 여전히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보장해 준 겁니다.
 

임신중절권 폐지는 보수층의 오랜 숙원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온 지 49년이 지난 지금, 왜 미국은 갑자기 판결을 뒤집으려고 하는 걸까요? 미국의 판결 역사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될만한 데이터 하나를 가져와봤습니다. MQ 스코어(Martin-Quinn Score)라고 불리는 데이터인데, 미국 연방 대법원 판례를 분석해 대법관의 진보, 보수 이데올로기 성향을 점수화한 자료입니다. 아래에 1937년부터 2020년까지의 미국 연방 대법원의 이념 성향을 그려봤어요. 위(+)로 올라오면 보수, 아래(-)로 내려가면 진보적 선택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미 연방 대법원의 판결 성향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 사법부에는 진보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시점에 미국 사법체계에 미란다 원칙이 생겼고, 국선 변호사를 누구든지 선임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당시의 연방 대법원은 그 외에도 인종 차별 등 굵직한 사회문제에 있어서 진보적 변화를 만들어 냈어요. 그래프에서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죠? 당시의 보수주의자들은 20년간 이어진 이른바 사법 진보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수적 판사들에 대한 배신감도 한몫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법 진보주의를 이끌었던 판사들은 보수 정당인 공화당에서 추천한 인사들이었거든요. 얼 워런은 공화당 인사였지만 대법원의 개혁을 이끌었어요. 다음 대법원장인 워런 버거는 얼 워런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로 대 웨이드' 사건에서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인정하는 선택을 했고요.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대법원의 진보주의를 억제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뒤 보수적인 성향의 대법관 4명을 앉혔는데 이 중 3명이 임신중절 권리를 인정했죠.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 대법관의 보수화가 필요했어요. 그것도 본인들이 원하는 진짜 보수 말이죠. 그런데 지난 정부인 트럼프 정부에서 3명의 대법관을 임명하는 행운 아닌 행운이 온 겁니다. 미국의 대법관은 종신직이라 본인이 물러난다고 하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바뀌질 않거든요. 그런데 트럼프 정부에서 2명의 대법관이 사망했고 1명이 물러나면서 전체 9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3명을 새롭게 앉힐 수 있게 된 거예요.
트럼프 정부에 임명된 대법관들의 정치 성향

트럼프가 새로 채워 넣은 대법관들은 전임자들보다 보수 성향이 상당히 짙습니다. 새로 임명된 대법관들과 전임 대법관들의 이념 성향을 비교해본 그래프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거예요. 기존의 보수 대법관들도 나이가 들수록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판결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트럼프는 그들의 자리를 젊고 보수성향이 한층 더 진한 대법관으로 교체했어요. 그래서 현재 미 연방 대법관은 6대 3으로 보수가 앞서 있죠.

새로 임명된 대법관들은 헌법 원전주의자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헌법 원전주의는 말 그대로 헌법을 해석할 때 원전에 쓰여있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철학이야. 헌법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 임신중절권을 사생활 권리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현재도 그래야 한다는 거죠. 헌법 원전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한 미국 대법원의 생각이 바로 기사 초반에 소개해드린 초안입니다. 실제로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 3명 모두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번복하는 것에 투표했다고 하죠.
 

판결이 번복되면 미국은 어떻게 될까?


만일 초안대로 1973년의 판결이 뒤집힌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25개 주는 임신중절을 바로 금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25개 주에 있던 임신중절 클리닉은 문을 닫게 될 거고요. 임신중절을 금지하는 주에 사는 여성은 임신을 정지하고 싶어도 근처에 병원이 없으니 원정에 나서야 합니다. 문제는 미국의 땅이 상당히 넓다는 거죠.

미들버리 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25개 주에 사는 여성이 현재는 평균 53.1㎞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면 클리닉을 이용할 수 있지만, 판결이 뒤집어져서 클리닉이 사라지게 되면 이동거리가 453.8㎞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 시간과 돈을 들여 다른 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병원 접근성이 확 떨어지는 거죠. 참고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325㎞ 정도입니다.
미국 주별 접근성 시각화

얼마나 접근성이 떨어지는지 각 주별 데이터로 살펴볼게요. 미국의 비영리 연구기관인 구트마허 연구소에선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엎어질 경우에 26개 주에서 클리닉을 이용할 수 없을 것으로 내다봤어요. 특히 루이지애나 주가 심각합니다. 기존에는 59.5㎞만 이동하면 됐지만 판결이 무효화되면 이동거리가 1,071.8㎞로 급증하거든요. 500㎞가 넘게 늘어나는 주만 해도 플로리다와 텍사스를 비롯해 8곳이나 됩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클리닉으로 임신부들이 몰리면서 한정된 인프라를 사용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함도 상당해요. 만일 판결이 엎어질 경우 일리노이 주는 현재보다 8,651%가 넘는 환자들이 몰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거든요.

미국의 여론은 대법원의 결정과는 다릅니다.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상황이죠. 결정문 초안이 유출된 이후에 진행됐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0%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했더라고요. 판결 무효를 지지한 사람은 24%에 불과했어요. 지난달 워싱턴포스트가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58%는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28%는 판결을 번복해야 한다고 답했어요.

당장 여당인 민주당은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성문화하기 위해 임신중절 보장 법안을 표결에 부칠 계획입니다. 연방 대법원이 판례로 임신중절권을 폐기한다면, 입법을 통해서 보장하겠다는 취지인 거죠. 일단 11일(현지시간)에 진행된 본회의에선 여성의 임신중절 권한을 보장하는 법안에 대한 표결을 시도했는데, 표결 여부에 대한 투표에서 반대가 더 많아(반대 51표, 찬성 49표) 법안에 대한 표결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어요. 반면 공화당은 한 발 더 나가서 다른 진보적 판례까지 뒤엎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이주민에게 교육권을 보장했던 과거의 연방 판례도 뒤집기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죠. 루이지애나 하원에선 공화당 의원들이 임신중절에 살인죄를 적용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어요.
 

이제 막 발을 뗀 우리나라의 임신중절권


우리나라에선 2019년 4월 11일에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신체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2021년 1월부터는 임신중절을 처벌했던 형법 조항의 효력이 상실됐죠. 원래라면 국회가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 법안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거든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난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체 입법 소식은 들려오고 있지 않고 있어요.

낙태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임신중절을 합법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전히 많은 병원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고 있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있거든요. 대체 법안이 없는 탓에 임신중절의 절차, 시술, 비용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아요.

병원에서 수술을 해주지 않을 때 임신부들의 선택은? 많은 임신부들이 불법약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불법약이긴 하지만 사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05년부터 임신 중단 의약품 중 하나인 미프진을 필수의약품으로 분류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선 허가와 심사가 이뤄지지 않는 탓에 불법으로 약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죠. 법에서 해결해주지 않으니 그 피해를 임신부들이 오롯이 다 받고 있어요.
대한민국 임신중절 수술 건수

그렇다면 피해를 보고 있는 임신부들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나라의 임신중절 건수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2018년에 조사된 실태조사를 보면 2016년엔 69,609건, 2017년엔 49,764건 정도로 파악되는 데, 그 수치로 간접적으로 유추할 뿐이죠. 게다가 실태조사 당시엔 낙태죄가 있었기 때문에 해당 수치가 정확한 규모를 나타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어요.

오늘 마부뉴스가 준비한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 얽혀있는 미국 사법계의 정치적 상황부터 우리나라의 임신중절 상황까지 살펴봤어요. 독자 여러분은 오늘 마부뉴스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2022년의 미국 대법원의 생각처럼 임신중절권을 인정해주는 건 논쟁을 일으키고 분열을 심화시키는 걸까요? 아니면 1973년의 미국 대법원의 생각처럼 임신중절권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 권리에 해당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아래 댓글을 통해 알려주세요! 오늘도 긴 글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본 기사는 마부작침 뉴스레터를 편집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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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혜민   디자인 : 안준석   인턴 : 강수민, 강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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