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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수용시설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국가의 하층민 감시 통제 네트워크 보고서 ③

수용시설 여아들 모습
"이제 나는 그곳에서 돌아온 이들의 고독을 이해한다. 다른 별에서 왔거나 저세상에서 온 것 같은 그 외로움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세상을 알고 있으며, 그 세상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알 수 있는 세상이다. 그 세상의 뭔가를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려 시도할 때 이들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참전 여성들의 목소리로 전쟁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최근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 여성 저격수의 활약이나 러시아군의 성범죄 정황이 알려지면서, 그가 언급되는 일도 늘고 있는데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 "하다는 작중 참전 여성의 말처럼, 이 책을 다시 소환한 비참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시설에 갇힌 여성들…"16~28년 빨리 숨져"

전쟁만큼이나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과거 정부가 취약계층의 아동들을 보호하겠다며 전국에 설치한 집단수용시설입니다. 수용시설은 입소자 사망률이 당시 성인 사망률의 최대 30배에 달할 정도로 죽음에 가까운 공간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SBS '끝까지판다' 팀이 단독 입수한 <집단시설 인권 침해 실태 조사 연구용역 사업> 최종 연구 결과를 살펴봤더니, 시설 내 여성은 남성보다 죽음에 다가간 속도가 훨씬 빨랐습니다.
집단수용시설별 사망률 당시 성인 사망률의 최대 30배
여성은 남성보다 더 오래 삽니다. 과거에는 차이가 더 커서 최대 8.6년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연구진이 수도권과 강원권 4개 수용시설에서 확보한 진료기록을 분석한 결과, 여성의 수명이 남성과 유사하거나 오히려 짧은 곳도 있었습니다. 남성 수용자가 10년에서 18년 정도 조기사망할 때, 여성 수용자는 16년에서 28년 정도 조기사망해 수명 감소폭이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집단수용시설별 평균수명과 당시 수명 대비 감소폭,?시설 내 여성, 16~28년 조기사망
입소 전부터 영양 상태가 열악했던 점과 정신질환 비율이 높았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수치라는 것이 연구진의 지적입니다. 훨씬 과거인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조현병 환자들을 30~40년간 추적 관찰했더니 남성은 10년, 여성은 9년 정도 수명이 감소했다는 미국 연구 결과와 큰 차이가 납니다.
 
"통계적으로 전세계 어디에서도 여성 수명이 깁니다. 그런데 왜 시설 내 여성은 수명이 남성과 같거나 짧게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남성의 수명이 짧은 주 이유는 위험 요인에 많이 노출되기 때문인데, 시설 내에서는 남녀가 동일하게 노출되거든요."

수용시설 아동 놀이터 모습

일상적인 폭력…"언니들이 떨어지는 걸 봤어요"

아직 명확한 원인 규명은 어렵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입니다. 다만, 과거 수용시설을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그 이유를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1981년 당시 14살 나이로 서울의 한 수용시설에 입소한 여성. 담장이 매우 높아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었다"며 일상이 감금생활과 다름없었다고 했습니다. 잘못하면 "반성의 방"에 불려 가 맞을 거라고 들었고, 자유롭게 오가거나 말을 꺼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투신하는 언니들을 봤다는 그의 증언은 시설 내 생활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는지 보여줍니다.
 
"두 번, 세 번 들어오는 언니들이 2층에서 떨어지는 걸 봤어요"

열 살 때인 1983년 다른 시설에 입소했던 여성은 "들어간 순간 무서웠다"고 회상했습니다. '조 선생님'이라고 불렸던 직원에게 매일 얼차려를 받고 방망이로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겁니다. 손바닥이 멍들고 피가 나도록 맞았지만 어떤 처치도 받지 못해 지금도 손이 다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숱한 성폭력…"예쁘장한 애들이 많이 팔려갔어요"

폭행은 물론, 여아들에 대한 직원들의 성폭력도 일상적으로 진행된 걸로 보인다는 게 연구진의 판단입니다. 위 여성은 한 남성 복지사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여아들을 예뻐하는 척하면서 만지고 "찝적거렸다"고 했습니다. 다른 직원에게 말해도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고, "예뻐서 그런 거다"라고 어영부영 넘어갈 것이라 봤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남성 수용자 사이에서도 "대장"들이 밤에 자고 있는 "이쁘장한 애들"을 데리고 나가는 성폭력이 "숱하게" 일어났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여성 수용자라고 해서 안전했을 리는 없습니다. 서울 한 시설에서 자란 남성의 증언은 당시 시설 내 여성들이 겪었을 환경을 짐작하게 합니다.
 
"귀가조치 되는 게 내 한 번도 기억에 없어요. 그냥 팔아먹은 건 많이 봤어요. 여자들은 어디 식모로 몇 명 갔다. 여자들은 진짜 마 한 십대 후반, 이런 좀 예쁘장한 애들이 많이 팔려갔지예. 식모로. 노리개로 이래, 그런 말이 많이 들렸지예. 원장 집에도 가, 아 소장 집에도 가고 뭐 이런 소문이 들린다 아입니까"
과거 '부랑아' 수용 모습

30대 여성 의문의 쇼크사…"추가 조사 필요"

1991년 31살 나이로 수도권의 시설에 입소했다가 1년여 만에 숨진 여성. 사망 기록엔 선행사인이 '조현병', 중간선행사인이 '쇼크사'로 적혀 구체적인 사인을 알 수 없습니다. 쇼크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연구진은 이 여성의 과거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조현병 환자가 갑작스러운 쇼크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는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외력이든 물리적인 문제에 의해 쇼크가 발생하지 않았을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사례라고 보입니다."

젊고 출중한 외모에 학창 시절 성적이 뛰어났다고 적힌 이 여성. 사고로 다리를 다친 뒤 술집 등에서 일하며 생활했고, 어떤 이유에선지 구청 직원에 의해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입소 당일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며 조현병 진단을 받았을 뿐, 갑자기 쇼크를 받을 정도의 건강상 문제는 없었는데, 이후 숨지기까지 어떠한 의무 기록도 없습니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는 게 연구진의 판단입니다.
 
"조현병은 쇼크사가 있을 수 없는데 왜 일어나지? 하고 찾아보면 여성의 쇼크사 기록이 더 많았어요. 혹시 쇼크를 일으킬만한 의학적 상황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 쇼크가 많이 일어난 것 아닐까? 폭력이 더 쉽게 가해진 것은 아닐까? 의문이 자꾸 들게 하는 자료들입니다. 여성이 물리적 강압에 더 취약한 상황이었다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자료가 너무 제한적이라 더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관련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번 연구에서 그나마 관련 자료를 제출한 기관은 일부였고, 피해 증언이 집중되고 있는 서울의 시설들은 자료 협조를 거부했습니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죽음이 규명되지 않은 채 잊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여성에게 유독 가혹했던 수용시설의 사망 수치, 그 의문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는 이제 시작입니다.

※ 이 기사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의뢰한 <집단시설 인권 침해 실태조사 연구용역 사업>의 최종 연구 결과와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김재형·추지현·김관욱 교수와 여준민·이묘랑 활동가, 김일환·황지성 박사, 심국보 박사과정생이 연구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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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정반석, 원종진, PD : 김도균, 영상취재 : 김태훈, VJ : 김준호, 콘텐츠디자인 : 옥지수, 사진 : 국가기록원, 제작 : D콘텐츠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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