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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내겐 혜택, 그들의 희생이었다" 폐광촌 핫플 만든 93년생

[그사람] "내겐 혜택, 그들의 희생이었다" 폐광촌 핫플 만든 93년생

1. 금의환향은 아니었다

대통령 탄핵에 이은 대선 열기가 뜨겁던 2017년 봄 고향 정선으로 돌아왔다. 2012년 대구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난 지 5년 3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이 두려웠다. 무엇보다 남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정선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반장과 전교회장을 거의 놓치지 않았고, 중학교 때는 정선군을 대표하는 육상선수였다. 엄마가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결국 실패하고 내려왔다며 수군댈 사람들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실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실패, 집안의 실패로 치부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이 사람에게 귀향 이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한 시민단체에 인턴으로 합격했을 때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 찼다.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곳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존재가 조직 안에 묻히는 느낌이었고 하는 일도 즐겁지 않았고 보수는 적었다.

-시민단체에서 얼마 받으셨습니까.
"세전 120만 원이었어요. 뗄 거 떼고 나면 113만 원 받았어요. 방세 23만 원 나가면 90만 원 남는데 그 돈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차비도 한 10만 원 나가고… 이렇게 하면 끝이었어요. 사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알아보니까 한 달에 70만 원 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는 못하는 거죠."
시민단체를 1년 만에 그만 두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방황할 때 이 사람에게 유일한 희망이 사진이었다. 중2 때 처음으로 사진을 접한 이후 카메라를 메고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였다. 한 독서 모임에서 만난 사진작가 강민진은 당신이 사진에 재능이 있다며 사진으로 돈 못 버는 거 아니라고 격려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으로 전문성을 키워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하는 이 사람에게 강민진은 사진 기술은 물론 사진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줬다.

"강민진 언니가 너만 찍을 수 있는 소재를 찾아봐라 했을 때 딱 탄광 생각이 났어요. 내가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봤던 풍경들을 찍어서 기록을 해보면 어떨까 그랬더니 언니가 너무 좋대요."

통장 잔고는 바닥이 났고 성공해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열패감이 이 사람을 괴롭혔다. 고향으로 돌아오면 실패한 사람처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기를 원했지만 금의환향이라고 말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3개월의 실업급여 기간이 끝났을 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한 18번가 일대

-고향으로 돌아오면 마치 실패해서 돌아오는 것처럼 보는 시각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실패해서 돌아온 거 아닌가요?
"물론 실패해서 돌아온 게 맞기는 하지만 저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 온 거에 더 가까워요. 그런데 그런 프레임에 갇히면 그냥 실패자가 되는 거예요. 제가 지역에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늘 그 문제가 거론이 되고 그런 이야기 듣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른들 상대로 강연할 일이 있으면 지역에 청년들이 다소 꾀죄죄한 몰골로 돌아다녀도 괜히 안부 묻지 마시라, 다 뜻이 있어 내려온 것일 게다 제발 이렇게 생각해달라, 그래야 그 친구들도 지역에서 정을 붙이고 일을 할 힘이 생긴다고 말씀드리지요."
 

2. '들꽃사진관'을 열다

고향 정선은 한때는 내리는 눈조차 검었던 탄광촌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며 자라지는 않았다. 1993년생, 이 사람이 아버지 고향 정선으로 이사 온 것이 여섯 살 때였다. 이때는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은 뒤였다. 아버지가 광부도 아니었고 가까운 친·인척이나 지인들 중에 광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탄광의 기억보다는 2000년 정식 개장한 강원랜드와 관련된 기억이 더 많다. 강원랜드에서 나오는 돈으로 급식, 학비, 장학금 지원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 해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광부, 탄광은 이 사람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탄광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겠다며 낡고 녹슨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고한과 사북의 폐광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그때 고향의 역사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고2 때의 기억

"지역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을 통해 지역 어른들에 대한 외경심이 생기고 그랬어요. 강원랜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긴 것인지, 왜 그 기업이 사회 공헌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자랄 때 받은 혜택이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이 동네 어른들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아무도 안 해준 거예요. 저는 고향에 돌아와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런 역사와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폐광의 기록을 내가 사진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크게 했던 거 같아요."

그사람_이혜진 편
그사람_이혜진 편
이혜진 작가의 기록들

택배 알바로 용돈을 벌면서 고향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기겠다며 정선을 누비고 다니는 이 사람에게 2018년 동네 '삼촌'들이 고한읍에 사진관을 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당시 고한읍에서는 마을 살리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광산 경기가 좋았을 때 강원도 정선 사북, 고한 일대는 돌아다니는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1985년 읍으로 승격될 무렵 고한읍 인구는 4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2001년 모든 탄광이 문을 닫은 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곳곳에 빈집이 속출했다. 고한시장 입구가 있던 고한읍 18번가 일대는 주인 없는 빈집이 20여 채에 이르렀다. 빈집이 폐가로 변해가며 흉물이 되자 김진용, 유영자를 비롯한 주민들이 2017년 10월 마을 살리기 운동에 나섰다. 폐가를 구입해 들어와 '하늘기획', '이음 플랫폼', 영화제작소 '눈' 등을 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이 사람을 주시하고 있다가 폐광 지역 빈집 살리기 프로그램에 사진관 개설로 응모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런 제안을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좋다기보다 발목이 묶이는구나 그런 생각… 조용히 있다가 돈 모아서 다시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발목이 묶이는구나. 이런 생각이 덜컥 들었어요. 조건이 최소 3년 거주였거든요. 제가 그때 스물여섯 살이었어요. 제 친구들은 엄청 놀러 다니고 여행 다니고 그럴 땐데 저는 이제 그걸 못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서울을 다시 못 간다는 것도 컸어요. 다시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강원도는 정선, 태백, 영월, 삼척 폐광 지역에서 빈집이나 폐가를 이용해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파격적으로 2억 원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었다. 심사를 거쳐 지원 대상이 되면 첫해에 1억 원, 2년 차와 3년 차에 각각 5천만 원 등 총 2억 원을 지원받는 이 프로젝트에 응모했고 최종적으로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다른 데보다 지원금이 많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부담이 확실히 컸던 거 같아요. 덜컥 되고 나니까 이제 나의 바닥이 곧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을 어른들끼리 모여서 막 뚝딱거리면서 마을 살린다고 하고 있는데 내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고한읍 18번가 문 닫은 슈퍼 자리에 <들꽃사진관>을 연 것이 2019년 3월 8일이었다. 사진관 문을 열었지만 사실 눈앞이 캄캄했다. 취미로 하는 일과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은 전혀 달랐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진 기술을 틈틈이 익힌 것은 맞지만 전문적으로 사진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조명을 어떻게 쓰는 지조차 잘 몰랐다. 혼자 타이머를 맞춰 놓고 조명을 옮겨가며 수백 번 자신과 석고상을 찍어가며 감을 익혀갔다. 개업하던 날 이웃들에게 개업 떡 돌리고 사진관으로 들어오는데 첫 손님과 마주쳤다.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손님이 들어오자 정신이 없었다. 증명사진을 일단 찍긴 찍었는데 인화된 사진을 보니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황해서 커튼을 치지 않았고 조명도 엉망이었던 것이다. 손님에게 죄송하다며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첫 손님인데 어떻게 돈을 안 주느냐며 1만 원을 주고 갔다. 그 고마운 첫 손님의 사진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증명사진 촬영은 한 달 정도하고 나니 뗐지만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손님만 오면 손에 진땀이 났다.

-그럼 어느 정도 하니까 이제 돈 받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창업하고 3년 차 되던 해에 좀 여유가 생겼던 거 같아요. 그전까지는 이제 손님 온다 그러면 손에 계속 땀이 나는 거예요. 긴장이 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고. 제가 심리 상담하는 분에게 제 이야기를 했더니 이건 심각한 거래요. 좀 쉬어야 된다 할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어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전문 학원에 다니면서 사진의 이론과 실제를 다시 배웠다. 점차 사진 잘 찍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들꽃사진관은 이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소가 되었다. 언론에도 종종 소개가 되었고 여기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목, 금, 토 사흘만 문을 열고 예약 손님만 받는다. 한 달에 열 팀만 예약을 받는데 예약은 매달 10일이 되기 전 조기 마감된다. 손님을 많이 받으면 사진의 질이 떨어진다고 했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는 생각도 있다.

그사람_이혜진 편
"이혜진 대표가 강원도가 내놓은 정책을 똘똘하게 잘 활용한 거죠. 저 친구도 초기에 장사가 안 돼 밤에 불 꺼놓고 혼자 많이 울고 그랬어요. 겁났을 거 아니예요? 사진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사실상 사회 초년생인데 경험은 없지 장사는 안 되지… 자기 장사하는데 장사 안 되면 밤에 잠 안 오거든요. 그걸 잘 이겨낸 거죠. 자기 나름대로 돈 버는 모델도 만들어 냈고 이제 자리 잡은 거죠. 이제 다른 사람들 롤 모델이 되었어요." 김진용/고한읍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상임이사

한 달 매출이 500-600만 원 정도, 연 매출이 6천만 원을 넘는다. 이 정도면 혼자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통장에 잔고가 쌓이고 할부지만 얼마 전에는 중형 SUV 자동차를 구입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억 원이다. 어떻게 하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인데 이를 위해 온라인 사업, NFT를 이용한 사업 등을 구상 중이다.
 

3. 지방, 청년 - 사회적 약자?

이 시대 지방과 청년은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고 이 사람은 두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모든 약점을 강점으로 바꿨다. 지방에 살기 때문에 2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창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2001년 정선, 태백, 영월, 삼척에서 모든 탄광이 문을 닫은 이후 중앙정부와 강원도가 이 지역을 살리기 위해 쏟아 부은 돈이 3조 원이 넘는다. 38번 국도 확장 등 SOC 투자까지 더하면 10조 원이 훌쩍 넘는다. 그래도 떠나는 사람들은 많고 돌아오는 사람은 적었다. 올해 고한읍에 있는 두 개 초등학교의 신입생은 불과 8명, 이 사람이 졸업한 중학교는 이미 문을 닫았다. 사람이 떠나고 빈집은 늘었다. 2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지원금을 지급하는 강원도의 폐광 지역 빈집 재생 사업 정책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폐가와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마을을 살리는 거예요. 선정되면 3년에 걸쳐 2억 원을 주는데 이런 사업은 여기 말고는 우리나라에 없어요. 그동안 폐광 지역 개발에 수조 원이 들어가고 관광객도 많이 오고 하는데 동네는 다 빈집인 겁니다. 고한읍 인구가 1995년 1만 명이었는데 수조 원이 투입되는 동안에 인구는 오히려 절반으로 준 거예요. '당신들 그동안 뭐 한 거냐'라는 비판이 나오니까 강원도가 그 정책을 들고 나온 겁니다." 김진용/고한읍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상임이사

이 사람은 그 정책의 최대 수혜자다. 다른 지역 출신도 응모할 수 있지만 이 지역에 연고가 있었기에 유리했던 것도 사실이다. 청년이라는 것도 가점 요인이었다. 파격적인 지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이 사람도 잘 안다.

"처음에 지원 받고 나서 이게 워낙 큰 금액이다 보니까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우리 세금으로 너네가 돈을 벌고 있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손님도 계셨어요. 지원 받는 것을 되게 쉽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한 것도 사실이죠."

지방에서 청년은 존재 자체로 힘이다. 정선에서 이 사람은 존재 만으로 사랑 받는다. 곳곳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고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삼촌', '이모' 들이 있다. 서울에 있을 때 이 사람은 차별 받는 존재, 억압 받는 존재였다. 자기 책임이 아닌 일로 추궁 당하고 자기 업무가 아닌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도 항의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억울하다고 했다. 처음 여기에서 같이 일하자는 '삼촌'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 기억이 떠올랐다.

"사진관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게 또 내가 청년으로 이용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시민단체에 있을 때 그런 느낌을 제가 많이 받았거든요. 시민단체 그분들은 그런 생각을 안 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기분을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지역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왜냐하면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이었거든요."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48세인 동네에서 젊다는 것만으로 도드라지는 존재다. 이 동네 유일한 20대 청년인 이 사람은 이 마을이 언론에 소개될 때마다 빠지지 않았다. 이제는 고한읍 18번가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제가 만약에 결혼을 하고 나이가 좀 더 있었으면 이 정도로 저를 지역에서 키워주지 않았을 거 같고 제가 어쨌든 청년이니까 가능성을 보고 지원을 해주는 거라는 생각은 지역에 있으면서 정말 많이 하죠. 어른들이 저를 보고 되게 흐뭇해 하는 표정을 지으시거나 잘하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실 때 그런 기분을 되게 많이 느껴요."

너와 네가 철저하게 구분되는 서울에서 숱하게 마음을 다친 이 사람을 고향 어른들은 따뜻하게 안아줬다. 어른들이 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일단 제 편이 하나씩 생기는 느낌이 되게 좋았어요. 서울에 있을 때 제일 특이했던 게 서울 사람들이 너무 냉정하더라구요. 간단한 조별 과제를 할 때조차 내 일과 네 일이 너무 분명하고 '노'라는 말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친구들 보면서 나를 싫어 하나 보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제 편을 만드는 게 어렵고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역은 어떤 스타일인지 잘 아시잖아요. 제가 열심히 사는 부분에 대해 어른들이 기특하게 여겨주시고 그냥 제 편이 되어 주시는 거 같아 그 점이 되게 좋았어요."

많은 게 좋았지만 모든 게 좋았던 것은 아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불분명하고 개인의 공간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지역 공동체 문화는 때로는 당혹스럽고 충격이었다. '내가 도시 물을 너무 많이 먹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세대 차이는 문화 차이로 이어졌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대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이 사람은 열정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기록하려 하지만 어른들 대부분은 딱히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아름다운 풍경도 아닌 것을 왜 굳이 기록하느냐고 한다. 그들에게는 되돌아보면 아프고 슬프기만 한 역사인 것이다. 이런 차이가 당장 큰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의 차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비슷한 또래가 거의 없는 지역에서 젊은 여성이 겪는 일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일상에 녹아 있는 남녀 차별, 성희롱성 발언에 어떻게 대응할지 혼자 연습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연습하고 그랬어요. 미리 연습하지 않으면 말이 안 나오거든요. 성희롱 발언을 듣고 제가 한 번 분노를 표시한 적이 있는데 오히려 여자 분이 저를 말리셨어요.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들이 이미 그렇게 살아오셨고 아들이 짱이고 남자가 짱이던 시대를 살아온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발끈하면 저만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경험이 초반에 있었어요."

이 사람 성공은 마을의 성공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공이 밀어주고 마을 주민들이 호응하고 청년 스타트업이 주도하며 중간 지원 조직이 도와주는 지역 재생, 도시 재생의 행복한 협업"의 모범 사례로 꼽힌 이 마을 스토리를 언론에서는 '18번가의 기적'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사람도 마을 일에 적극 나서면서 마을 안으로 녹아 들기 위해 애썼다. 마을 만들기 위원회 간사로 잔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고 마을 협동 조합 감사 자리도 맡았다. 이 사람 사진관이 있는 정선군 고한읍 고한 18번가는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 해도 이 마을을 배우겠다며 전국에서 100팀이 넘는 견학단이 다녀갔다. 다른 곳에 가서 일을 해도 잘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가끔 듣지만 여기가 아니면 들꽃사진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이 사람도 잘 안다.

그사람_이혜진 편
'잘 가, 사북초등학교' 프로젝트

<들꽃사진관>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의 전신 초상 사진을 찍어줬다. 몇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사진을 되찾으러 가니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사진가로서 자신이 제대로 된 경력이 없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려고 했다. 얼마 전에 구 사북초등학교 교사 외벽에 가로 세로 11X12미터에 이르는 대형 사진을 벽화처럼 붙였다. 초등학교 건물이 곧 헐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지을 예정인데 이 지역 예술가들이 '잘 가, 사북초등학교' 프로젝트를 펼쳤고 이 사람도 참여한 것이다. 사진작가로서 자존심을 걸고 한 작업이었다.

"지역 주민분들이 사진 너무 멋지다고 해주시고 그 다음에 그런 대형 작업을 실제로 성공했다는 거에 큰 기쁨이 있어서 나는 차라리 작업으로 이렇게 보여드리는 게 내 자격지심에 대한 원천을 오히려 해소할 수 있겠다, 그 작업을 통해 자존감이 많이 올라왔고 내가 이 정도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 엄청 컸어요. 좋은 작품을 이렇게 보여주면 사람들이 편견없이 나를 바라봐줄 수 있겠다, 그래서 대학원 가는 마음은 지우기로 했습니다."
 

4. 몸은 정선에, 눈은 서울에

대학에서 경찰행정학과를 다녔고 경찰관이 되고 싶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경찰관 모집 포스터에 모델로 나오면 좋을 거 같은 인상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회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청년이 언제까지 이 동네에 머무를지, 아니 얼마나 버틸지 궁금했을 것이다. 이 사람도 내가 여기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그사람_이혜진 편

-이혜진이라고 하는 사람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외지기도 한 이 동네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하네요.
"처음 사진관 열었을 때 3년은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3년 버티고 나니 이제 10년은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제 제 영역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니까 쉽게 놓을 수 없을 거 같아요."

고향에 뿌리를 내리겠다고, 내 인생 여기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좀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3년을 넘겼다. 옛 탄광 지역이 젊은 사람이 숨 쉬기 편한 곳은 아니다. 어쩌다 서울이나 가까운 도시에만 가도 나는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지역 운동, 로컬 재생 이런 말 속에서 이 사람의 존재가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래가 거의 없는 곳이고 취미 활동을 할 만한 공간이나 시설도 찾아보기 힘들다. 밤에 혼자 영화를 보며 혼술을 한다. 이 사람 페이스북에는 친구와 가족 이야기가 거의 없다. 젊은 여성이 친구들과 누릴 법한 소소한 행복 같은 것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실한 노동의 기록, 생활을 위한 분투 같은 느낌은 있지만 여유와 낭만 깔깔거림은 별로 읽을 수 없다. 행복하다고 했지만 그 말이 뱃속 깊은 데서 솟아나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긴 휴가를 간다. 올해도 1월에 다녀왔다. 혼자서 어디론가 떠난다. 나도 숨 쉴 곳과 숨 쉴 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사람_이혜진 편

-여기가 답답하시죠?
"솔직히 되게 답답해요. 어른들은 제가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시지만 여기가 답답해서 저는 차를 되게 좋아해요. 차 안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장거리 여행 좋아하고… 여기서 산다는 게 쉽지는 않아요. 여기가 엄청 촌은 아닌데 너무 답답해요."

-그 답답함을 이기게 하는 게 뭘까요?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서울로 전시를 보러 가거나 모임에 참석하거나 포럼에 가면서 계속 서울과 연결 고리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하고 한 주 또 열심히 살아져요."

서울에서 태어나지도,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다. 서울 생활은 불과 1년 3개월이었고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던 시절이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시절을 보낸 곳이 서울이다. 고시원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방 한가운데 기둥이 박혀 있는 가장 좁은 방에서 외로움에 떨며 지낸 시절이다. 누군가 매일 이 사람 방문 앞에 과자 한 봉지를 두고 가곤 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방문 앞에 과자가 놓여 있었다. 연심이든 연민이든 이 사람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선의였을텐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여유조차 없이 각박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살던 곳이라면 환멸과 수치로 기억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서울을 그리워하고 서울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산다.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를 쐬지 않으면 질식할 거 같은 거다. 여기 시골에 있다가 혹시라도 뒤쳐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치는 게 느껴졌고 이 사람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제가 주말마다 서울을 가요. 요즘 제 또래의 트렌드를 따라 가려구요. 촌에 있지만 도태되지 않으려고 되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시골에 들어올 때 두려운 게 그런 거거든요. 처음에 이 사진관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걱정했던 게 그 부분이기도 하고요.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트렌드를 쭉쭉 읽어내는 환경에 있는데 저는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니까 계속 부지런히 읽고 쓰고 접해야만, 접점을 잃지 않아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아서 고민이 많아요. 현재 트렌드, 제 또래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제가 그런 걸 쫓아가는 것을 좋아해요."

-이혜진 대표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어떤 곳입니까?
"치열하지만 매일 새로운 곳. 이런 이야기하면 어른들은 젊어서 그런다고 그러는데 이런 일상을 반복한다는 답답함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카메라를 들고 여행하는 삶을 꿈꾸면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공간을 가진다는 거에 대한 두려움과 묶여 있어야 되는 두려움이 굉장히 컸죠. 그때 생각은 '내가 지금 이 실력으로 서울에 가서 뭘 할 수는 없으니 좀 연습하고 다져 나가는 시간을 한 5-6년 잡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원래부터 서울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 아니라는 일종의 서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그 고민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 것이 콤플렉스인지 아니면 도태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콤플렉스인지 명확하지 않은데 도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서울에 뿌리내리는 것은 이제 해탈을 한 편이라…."

-어떻게 보면 해탈이 아니라 포기이겠네요.
"그것은 포기를 하고 내가 그만큼 현장에 있지 못 하니 거기를 따라가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고민은 늘 하고 있는 거 같아요."
 

5. 지역이 희망, 지역이 힘

여기를 거점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여기가 희망이고 힘이라는 것을 이제 아는 것이다. 그 힘을 충분히 이용하겠다는 점에서 보면 이 사람은 영리한 것이다. 여기를 발판으로 삼아 살겠다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이 동네에 뿌리내리고 살겠다는 말과는 다른 말이기도 했다.

"사진관도 솔직히 고민은 돼요. 이거를 접기는 솔직히 아깝고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한테 맡기고 저는 사진 작업에 좀 더 몰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들꽃사진관의 매출 가운데 40% 정도가 강원도 내 공공기관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들꽃사진관이 정선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면 지금 같은 수익 구조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지역을 발판으로 삼되 지역에 묶이고 싶지 않다는 이 사람 이야기는 듣기에 따라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 편한 것만 챙기겠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을텐데 그런 말을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지역 운동에 관심은 있지만 자신이 중심에 선다는 생각은 없다. 전문가가 되어서 지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것은 나중, 꽤나 훗날에 생각할 일이다. 그 때 역시 자신이 중심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역 활동가가 아니라 사진작가에서 찾고 싶어한다.

"제가 작가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지역 이야기이고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에 지역 활동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활동가보다는 작가로서 더 많이 비쳐졌으면 좋겠고 그래서 올해부터는 작품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사람 사례를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이 사람처럼 살아볼까 고민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래도 이 사람처럼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은 아직 없다. 이 지역을 수시로 오가며 '간을 보는 중'인 청년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이 사람 역시 나처럼 살라고,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외로운지, 포기해야 되는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사람_이혜진 편

-청년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뭔가요.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면 하라'인가요 아니면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인가요?
"'할 거면 준비를 하고 와라'를 더 많이 이야기하는 편이구요. 속마음도 그래요. 지역에 들어올 거면 제대로 관계를 쌓을 준비를 하고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청년들 중에는 지역 어른들한테 요구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청년인데 왜 이런 거 안 해주느냐고. 그런 마음으로 하면 어른들도 다 알거든요. 저는 두 가지를 꼭 이야기해요. 지역에서는 어른들에게 꼭 받은 것 이상으로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뽕짝 문화에 익숙해져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준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 오는 청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것이다.

들꽃사진관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처럼 시골에 자리 잡은 순박한 청년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 만나보니 야망이 보통이 아닌 청년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거둔 성공에 고무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라고 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을 찾자면 한도 없다는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왔다는 것 만으로 되게 행복해요. 그래도 아직 만 스물아홉 살이라는 거. 앞으로 더 도전해도 마흔을 안 넘길 거 같다 뭐 이런 생각도 들고. 처음에는 되게 외롭고 진짜 고단한 싸움이었는데 주변을 바라보면 저만큼 자리 잡은 사람도 많지 않다 보니까 일찍 지역에서 사진관을 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정으로 자신의 성취를 기뻐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얼굴이었고 그런 표정은 보기에도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 만으로 스물아홉 살, 가야 할 길이 아직 한참 남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소박한 꿈을 꾸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큰 꿈을, 야망을 갖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이 사람에게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20년 후가 더 기대되는 이 사람의 20대 시절 한순간을 같이 했다는 것을 훗날에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혜진 씨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26일) 밤 9시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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