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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방송사 사장에서 다시 현장으로…PD 최승호의 고백과 다짐

1. <기자 지망생 최승호>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MBC 기자가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땡전 뉴스를 만드는 MBC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자가 아닌 피디로 '우주에서 가장 좋은 직장' MBC에 입사했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경북대 재학 시절 학과 공부보다 연극에 빠져 살았다. 화염병을 던지며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5.18 광주'에 빚을 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 1986년 MBC 입사 이후 노조 설립과 방송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시청률 30%를 자랑하던 <경찰청 사람들>을 만들면서 제작 능력을 인정받았고 1995년 오랫동안 원했던 <피디수첩>에 합류했다.

대학시절 학과공부보다 연극에 빠져 살았다
  
1990년 시작된 <PD수첩>은 기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시사 보도에 대해 피디들이 목소리를 내려는 몸부림이자 우리 사회 금기와 거악에 대한 도전이었다. <PD수첩>은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영역을 넓혀 나갔다. 외부와 싸울 때도 있었지만 내부와 싸울 때도 많았다. 그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앞자리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2003년 노조위원장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노조위원장을 마치고 2005년 <PD수첩> 부장 겸 앵커로 돌아왔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연구 부정 사실을 밝혔고 <검사와 스폰서> <4대강의 비밀>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든 보도를 통해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스타 피디였지만 경영진과 보수 정권에 미운 털이 제대로 박혔다. 2012년 해고돼 4년 넘게 해직 언론인으로 살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사장으로 MBC에 복귀했다. 사장 임기를 마치고 지금은 탐사 전문 매체인 <뉴스타파>의 피디로 활동 중이다.

공영방송은 권력의 전리품이었다. 이 점은 보수와 진보가 다르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권력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공영 방송사의 수장이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갈등과 투쟁이 벌어졌다. 이번 대선이 끝나고 난 뒤 공영 방송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힘들다. 이 사람은 1986년 입사한 이후 MBC에서 벌어진 갈등과 투쟁의 최전선에 서있었고 그 투쟁의 승리와 패배를 온몸으로 겪었다. 방송 민주화를 요구하다 해고되기도 했고 사장으로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를 눈 앞에 두고 누구보다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 사람을 만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듣고 싶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게 많기도 했다. 전 MBC 사장이었던 <뉴스타파> 피디 최승호를 지난 16일 <뉴스타파>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사람 최승호
  

2. <MBC 피디 최승호>

2005년 <PD수첩>이 제작한 황우석 관련 보도는 한국 방송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황우석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이후 최고의 국민적 영웅이었다.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해 한국의 위상을 끌어올리고 난치병 환자들에게는 희망을 주던 황우석의 연구가 거짓이라는 <PD수첩>의 고발은 거센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 때 모든 방송 광고가 떨어져 나갔고 청와대로부터 경고성 전화를 받기까지 했다. <PD수첩> 팀장이자 앵커로서 한학수 피디와 함께 이 보도의 주역이었던 이 사람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방송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들이 때로는 진실보다는 달콤한 환상을 원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대통령과 맞짱을 뜨고 국정원과 정면으로 붙을 때도 두렵지 않았지만 그 때는 힘들었다.
 
"제가 유일하게 두렵다고 느낀 것은 황우석 박사였어요. 제가 두려웠던 것은 노무현 정부나 황우석씨 본인이 두려웠던 게 아니고 황우석 씨를 지지했던 그 많은 사람들, 그 많은 대중들이 두려웠어요. 그 분들이 절망해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두려웠어요."

진실을 말해도 대중들이 믿지 않는 상황에 좌절했고 구속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몸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때 손등에 실핏줄이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평소에는 굉장히 둔감한 편이라 건강 이상 같은 것을 잘 못 느껴요. 그런데 그 날은 이거는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딱 들어서 의무실을 갔죠. 거기서 혈압을 재 보니 최고 혈압이 200이 넘게 나오는 거예요."

한 발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기를 넘기고 이 보도를 통해 피디 저널리즘이란 말을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사실 검증에 있었다. 이 사람과 2000년부터 <피디수첩>에서 함께 일해왔고 영화 <공범자들>과 <자백>을 함께 만든 정재홍의 증언이다.

부장과 앵커를 지낸 뒤 평피디로 돌아갔고, 이때가 최승호의 전성기였다

"최승호 PD는 MBC 시사교양국에서도 저널리즘 원칙에 유별나게 집착하는 사람이었어요. 그전에 MBC 시사 교양국은 <인간시대>이런 걸로 대표되는 감성적인 터치와 구성으로 먹으려는 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최승호 피디가 취재를 하고 부장을 하면서 기자들보다 오히려 더 팩트를 강조했어요. '팩트에 기반하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는 거죠.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크로스 체크하고…그러면서도 편파적인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어요. 진영 논리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은 편파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더라고요." <정재홍/ <PD수첩> 작가

2008년부터 10개월 동안 미국 미주리 대학 탐사보도 전문 과정인 IRE에 연수를 다녀왔다. 연수에서 돌아온 2009년 <PD수첩> 피디로 복귀했다. 그 팀에서 부장과 앵커를 지낸 사람이 평피디로 돌아온 것은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그 때부터 해고된 2012년까지가 자신의 전성기라고 했다. <검사와 스폰서>, <4대강 관련 연속 보도>가 이 시절에 나왔다. 20년 이상의 현장 경험에 미국에서 체계적으로 익힌 탐사보도 이론이 더해졌고 <PD수첩>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얼굴과 이름도 알려졌으니 3박자가 온전히 갖춰졌던 셈이다. <PD수첩>에서 총 36편을 만들었는데 거의 예외 없이 비리를 고발하거나 권력 실세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들이다. 정정과 반론의 연속이려니 생각했는데 아니란다.

"제가 지금까지 보도했던 것 중에서 내용이 크게 틀려서 반론 보도를 하거나 정정 보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4대강 프로그램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동지상고 출신 기업인들이 4대강 사업에서 대거 계약을 했는데 업체 숫자가 틀렸다고 해서 방송통신심의위에서 권고를 받은 게 유일합니다."

동창회에 발길 끊은 지 오래 됐다. 미국 연수 시절에도 골프를 하지 않았다. 골프를 치다 보면 자꾸 인간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런 부분들이 탐사 보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탐사보도를 하는 사람은 항상 누구라도 저격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영문 주간지 <The Economist>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 주말에 가볍게 달리거나 부인과 함께 산행을 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다.

그사람 최승호

"그런 생각은 늘 있었죠. 예를 들어 <검사와 스폰서>라든지 이런 프로그램을 하면서 '내가 지금 취재하면서 가는 이 길을 몇 달 뒤에 검사들이 현미경을 들고 쫓아올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최근 공개된 국정원 자료를 보면 지난 정권 시절 국정원은 이 사람 동정을 손바닥 들여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특정 단체 가입 여부는 물론이고 온라인 활동까지도 지켜보고 있었다. 국정원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3. <해직 언론인 최승호>

이명박과 각별한 관계인 김재철이 2010년 MBC 사장으로 부임했다. 김재철은 MBC의 저항 DNA를 바꾸려고 했다. 노조가 파업을 하면 '너희들 아니어도 방송을 할 사람은 많다'는 태도로 대체 인력을 고용했다.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해고를 하거나 유배를 보내고 수치와 모멸을 안겨줬다. 노동조합은 6개월에 가까운 파업으로 저항했다. 그 방송사에서 벌어진 일은 권력이 마음을 먹으면 무슨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노동조합이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노사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MBC 노조의 상징이기도 했던 이 사람을 김재철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4대강 관련 보도를 통해 권력 핵심부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해고는 어느 정도 각오한 터였다. 2012년 현 MBC 사장인 박성제와 함께 해고되었다. 나이 쉰 세 살에 일자리를 잃고 해직언론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직장인에게 해고는 사형 선고 같은 것일 텐데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해고된 뒤 아버지와 장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셨다. 두 분에게 죄송했다고 했다. 이 사람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전 MBC 보도본부장 오정환에 따르면 이 사람은 농담도 잘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해직 이후 달라졌다. 늘 우울한 표정이었고 말도 줄었다. <뉴스타파> 대표 김용진이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마음의 병이 깊어졌을 것이다.
 
"제가 <뉴스타파>라는 새로운 길이 없이 MBC 안에 갇혀 있어야만 되는 상황이었으면 그런 부분이 굉장히 큰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 다행히도 바깥에서 새로운 일을, 새로운 형식으로 일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크게 상처로 남아 있거나 이러지는 않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노조에서 월급의 반 정도를 주고 <뉴스타파>에서 받는 돈이 있어 생활하는데 문제는 '전혀, 전혀' 없었다고 했다.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 등으로 자신의 싸움의 수준을 스스로 격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전혀'라는 부사를 두 번이나 힘주어 말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뉴스타파 시절 이 사람에게 성역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든 취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면 카메라를 들이댔고 누구에게든 질문을 던졌다. 불청객으로 냉대받고, 거절당하고, 쫓겨나고 조롱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라는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취재는 무례하고 거칠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런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퇴임하는 대통령 이명박에게 4대강 수심을 6미터로 하라는 지시를 했느냐고 묻는 장면은 그런 취재의 정점으로 한국 언론사에 남을 장면이다.

-2014년 지승호와의 인터뷰에서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는 거다. 우리나라 언론이 얼마나 개판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때 당시 제 입장이 그랬다는 이야기죠. 제도권 안에 있는 언론에서는 그런 질문을 못한다는 거죠. 그 때 제가 소속된 <뉴스타파>는 어떤 면에서 비제도권 언론이기 때문에 체제 내의 룰이랄까 이런 것에 의해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거였죠"

<뉴스타파>에 있는 동안 국정원의 간첩 사건 수사와 재판을 추적한 <자백>과 공영방송언론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공범자들> 영화를 만들었다. <자백>은 취재와 제작에 3년이 걸렸다. 재판이 있는 날이면 거의 매번 서초동 법원을 찾았다. 검사에게 묻고 변호사에게 묻고 사건을 수사한 국정원 직원들에게 묻고 우산으로 한사코 얼굴을 가리려는 전 국정원 수장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사람 최승호

-집요하다, 독하다는 이야기 많이 듣지 않습니까.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짧은 시간 취재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니까요. 4대강은 10년 넘게 취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취재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집요하다고 느끼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뭘 제대로 밝혀낼 수가 없어요."

싸워야 할 대상, 미워해야 할 대상이 분명해서 오히려 마음은 편했던 시절이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시절이기도 했다. 대통령 박근혜 지지율은 60%가 넘었고 MBC는 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고 노조는 무력화된 시절이었다. 1심 법원에서 해고 무효 판결이 나왔지만 MBC 경영진은 이 사람을 복직시킬 생각이 없었다. 복직의 희망이 없어서라기보다 공영방송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암담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마치 꿈을 꾸듯, 그러나 가장 절실하게 바람직한 공영 방송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 때부터 정치적 중립 지대에 있는 공영방송을 주장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한다.

"현대사에서 보수 세력은 언론장악과 동의어였기 때문에 언론 자유를 추구하는 세력은 그동안 보수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공영방송 지배 구조 개혁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자세를 갖고 보수적 성향의 국민들도 설득하여 이를 추진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선진 공영방송들이 그러하듯 이제 공영방송을 정치적으로 중립된 지대에 놓아야 한다." <2013, 실천문학>

2014년 지승호와 나눈 대화는 예언처럼 들린다. 그 예언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지승호: 만약에 다시 정권이 바뀐다면 공영방송을 빨리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코드 인사'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최승호: "그럴 겁니다. 그러면 보복과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겠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결국 방송의 신뢰도가 극한으로 떨어지게 되겠죠. 공영방송이 죽으면 세지는 건 종편이거든요.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 됩니다." <2014년, 정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라-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의 한국 언론 이야기> 중
 

4. <MBC 사장 최승호>

2017년 정권이 바뀌고 MBC 사장 김장겸이 임기를 2년 이상 남기고 쫓겨났다. 그 자리에 가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제가 해고자로 탄압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사장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지금 세월을 돌려놓을 수 없으니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이제 MBC라는 조직의 생명력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함께 가야 된다'라는 부분에 대한 공감을 만들어내는 데 저 같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좀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포부를 갖고 있었지만 그 포부대로 됐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장 취임 이후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19명의 직원을 해고했고 이 가운데는 두 번이나 해고를 당한 사람도 있다. 성추문과 개인 비리로 해고된 8명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시절 해고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 사장 시절 타의에 의해 직장을 떠났다. 노조 파업에 동조하지 않은 보도본부 소속 기자 88명 중 82명이 마이크를 잡을 수 없는 부서로 인사 조치됐고 특파원들은 임기 도중 소환됐다. 사장 재직 시절은 본인의 표현대로 '손에 피를 묻힌 시절'이었다.

그사람 최승호

"MBC에 들어가서 한 인사는 제가 했다기보다 MBC의 새로운 체제가 한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누구를 좋아해서 이 자리에 앉히고 그렇게 했던 게 아니라 그 당시에 인사는 조직에서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원하는 선배, 신망 있는 사람들을 조직의 리더로 세웠던 것이죠. 그래서 바깥에서 볼 때, 특히 보수 진영에서 볼 때 이제 역으로 자기네 세력이 깡그리 다 없어졌으니까 그런 것들이 굉장히 편향된 인사가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공영 방송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이 사람이 최고 책임자로 있던 MBC가 정치적으로 중립지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장 재직 시절 가장 큰 이슈는 조국 사태였다. MBC 뉴스는 검찰 개혁을 강조하며 조국 옹호 입장을 취했다. 당시 보도국장 박성제가 김어준이 진행하는 뉴스공장에 출연해 서초동 집회와 관련해 '딱 보니 백 만명'이라고 한 이야기는 그런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승호는 박성제의 언행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을 표시했지만 그에 대해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책임은 져야 되는데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 거 같습니다. 개별적인 보도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중심을 잡으려는 생각은 했습니다. 팩트에 근거해서 보도를 해야 한다, 양쪽 이야기를 최대한 같이 다뤄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런 이야기를 항상 했습니다."

당시 엠비시 경영진은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였다. 아무리 사장이라고 해도 해직되었다가 복귀한 노조 출신 직원들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는 구조였다.

"노조 출신들이 자기들끼리 전리품을 나누듯 나눠먹기를 한 겁니다. 사장으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통제가 될 리가 없지요. 그 양반은 몇 명 안 되는 시사 교양 PD출신이고 후임자인 박성제 사장은 제일 숫자가 많고 영향력 있는 기자 집단이니까 세력 면에서 최승호 사장이 약했던 건 맞지요." <오정환/ 전 MBC 보도본부장>

MBC 사장 시절 회의 시간은 길었고 분위기는 늘 무거웠다. 추락하는 시청률, 쌓이는 적자 때문이었다. 드라마를 비롯한 프로그램 경쟁력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고 뉴스 시청률은 한 때 1% 대까지 떨어졌다. 이 때부터 명상 공부를 시작했다.
"사장이라는 자리가 조직 전체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니까 제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많이 썼죠. 제가 회의를 하면서 막 버럭 화를 내고 후배들을 괴롭히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이랄까 그런 것을 많이 하게 됐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거 같아요. 왜냐하면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다가가는 거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더 이상 이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지만 임기 중 누적 적자가 2천억원이 넘었으니 사장 연임 이야기를 꺼낼 처지는 아니었다. 2017년 12월 해고된 지 1,997일 만에 사장으로 복귀하는 이 사람을 직원들이 환호와 박수로 맞았다. 나갈 때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MBC 사장을 마치고 다시 <뉴스타파> 피디로 돌아왔다. MBC 사장으로 가면서 절대로 정치권을 기웃거리지 않고 <뉴스타파>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언론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장에서 물러나 뉴스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은 평가받을 만하다.
 
MBC 사장을 마치고 다시 뉴스타파 피디로 돌아왔다
 
"언론인이라는 직역은 나이가 들어서 할 만한 가치가 없고 정치로 가야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취급을 받는 현상이 있는데 언론인들이 현장에서 더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있으면 우리 언론 발전에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뉴스타파로 돌아와 만든 프로그램이 <문재인의 4대강>이다. 현 정부가 당초 약속했던 것처럼 4대강 재자연화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득했더라면 지금처럼 '4대강 사업이 뭐가 잘못됐지'라고 묻는 사람은 줄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사람에게 이명박이 4대강을 망친 사람이라면 문재인은 그것을 방치한 사람이다.
 

5. <"공영방송은 정치적 중립지대에 있어야">

문재인 정부가 원칙을 확립하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공영방송을 특정 정당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몇 차례나 언급하였다.

"그것은 결정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겠다는 정치적인 결정을 한 것이죠. 말하자면 이명박, 박근혜 시대에 그들이 향유했던 어드밴티지를 자기네들도 적지만 놓기 싫다는 의사 표시를 그렇게 했다고 생각합니다…그 알량한 지분을 놓치지 않겠다는 정권 핵심부의 생각, 저는 그게 꼭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대통령에 의해 추인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측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만약 정권이 바뀐다고 하면 공영방송이 다시 외풍을 탈 수 있지 않느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지요. 그런 것들이 점점 더 국민을 실망시키고 공영 방송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악순환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공영방송 지배 구조를 중립화시키는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죠. 문재인 정부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그 부분에 대해서 전혀 이행 의지가 없었던 거죠."

가장 큰 책임은 청와대와 여당에게 있겠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무엇을 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사장이라는 자리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했다. 공영 방송의 정치적 스탠스가 지금보다는 가운데에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에 이 사람이 격하게 공감을 표시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정의라는 것을 추구하다 보면 지나친 경우가 생기고 그런 것들이 또다른 반발을 불러와서 대중들이 공영 방송을 편향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생기죠. 그런 불필요함이 있었던 거 같아요."

정의는 독점될 수 없고 독점되어서도 안된다는 말로 들렸다. 이 사람은 방송이 특정 정파를 대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기계적 중립과 객관 보도라는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진보 울타리 안에서도 공영 방송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적지 않다.
 

6. <진보를 비판하는 진보 언론인>

자신이 진보인 것은 맞지만 진보 역시 문제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든 게 북한에 대한 시각이었다.

"'너는 진보 아니냐'라고 하면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보수는 절대 아니죠. 그런데 제 생각 중에는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향 중에서 보수에 가깝다고 할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그렇습니까.
"북한 문제, 특히 북한의 인권 문제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진보 진영이 잘 이야기를 안 한다든지 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과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그들과 잘 지내야 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 단점에 대해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도덕적으로 맞지 않고 나중에 그런 부분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비판을 받을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지 가늠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을 할 때.

"제가 진보 진영에서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보도들의 어떤 흐름에 대해서 제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요."

이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방점을 찍고 싶은지 모호했다.

정파적 관점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에게 문재인 정부 시절 몇 년은 설 자리가 좁아지는 느낌으로 괴롭고 외로웠던 시절이다. 이 사람도 혹시 그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고요. 저는 그 정도로 솔직하고 그 정도로 용감한 사람은 아닙니다. 페북 같은 거 보면 그런 이슈들 때문에 친구들 하고 갈라서고 헤어졌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저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설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를 주도할 만한 역량이나 그런 부분들이 모자라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죠."

2020년 세월호 음모론과 관련해 김어준에게 쓴소리를 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누군가의 조작이나 음모로 연결시키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지적이었다.

"공영 방송이 제 역할을 못할 때 나꼼수 그 분들이 사이다로서 역할을 많이 했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어요. 그런 부분들이 있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제가 느낄 때는 그 역할이 지나친 면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게 사실아닌가요?
"그렇죠. 그런 정치적인 의도라는 것은 언제든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이 언론계 내부에서 혹은 시민 사회 안에서 적절한 견제를 통해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면 좋은데 아직까지는 그런 부분들이 잘 안 됐던 거 같아요."
 

7.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우리 나이로 예순 세 살, 중학교 다니는 손주가 있지만 5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지금도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강물 한 복판으로 들어가 취재하는 사람이지만 뜨거운 피를 주체 못하는 청년의 얼굴은 아니었다. 잘 나이 들어가는 원숙한 중년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힘이 이 사람을 움직여온 것일까. 그것을 알면 앞으로 이 사람이 갈 길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사람 최승호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내가 들어가서 뭔가 밝혀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은 늘 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선택을 하다 보니까 황우석 사건, 검사와 스폰서라든지 4대강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하게 된 거 같습니다. 일단 취재에 들어가면 알고 싶다는 욕구가 많이 작용을 합니다. 이게 뭐냐, 이것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하는데 그런 욕구도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공영방송 지배 구조 개선을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니 언론 운동가로 나설 수도 있었을 텐데 뉴스 제작 현장을 택해서 4대강 취재에 몰두하고 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고 싶은 일을 택한 셈이다.

성과에 비하면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소 박한 느낌이다. 이 사람이 제작한 프로그램 리스트를 적어 놓고 보면 이 사람을 능가하는 방송 저널리스트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어느 한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거나 아니면 MBC라고 하는 상징색이 강한 것이 원인일 수 있겠다. 숱한 싸움을 통해 배우고 느낀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 사회가 권력자의 의지라든가 어떤 기관의 판단 미스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 잠깐 흔들릴 수 있지만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어떤 집단적인 의지로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김재철 사장이 노동조합을 해체시키려고 6명이나 해고했지만 재판에서는 93%를 노조가 이겼습니다. 한국 사회가 정의와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에 비추어 보면 이 거는 부당하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기본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8. <반성, 회한 그리고 다짐>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껄끄러운 질문에도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웃을 때도 완전히 웃지 않는다. 덜 웃는다. 묘한 표정이다. 수많은 영상 자료를 봤지만 눈물을 보이는 모습이 없다. 자신을 해고한 사람을 만날 때도, 악연이 겹친 MB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도, 1970년대 간첩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김기춘을 대할 때도 이 사람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거나 노여움으로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다.

그사람 최승호

상대방에게 정서적 공감을 표현하는데도 인색하다. 영화 <자백>에서 중앙정보부의 고문을 받아 마음과 몸이 모두 망가진 재일동포를 만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가슴이 아려 오는 장면인데 이 사람 표정은 담담하다. 국정원 수사 도중 숨진 탈북자 아버지의 소식을 북한에 있는 어린 딸에게 전화로 전달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이 사람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지만 눈물을 보이거나 목이 메이지는 않았다.

아끼는 후배에게 "너는 태생적으로 게으른 놈"이라고 불호령을 내린 적도 있다. 사장 시절 이 사람에게 너무 질책을 당해 차라리 죽고 싶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 취재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칭찬하는 일보다 비판하는 일이 많은 삶이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있고 그 상처가 회복 불능인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비판이 항상 정확해야 하고 지나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죠. 100 정도 취재를 했으면 100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꼭 옳지 않을 수 있다, 한 80 정도만 이야기하는 게 바른 태도 아니냐. 그런 거를 원칙으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MBC 기획조정본부장 박장호는 이 사람을 두고 언론인의 길과 경영자의 길에서 언론인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했다. 정재홍은 언론인으로서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했다. 일본의 유명 영화 감독이 이 사람과 이 사람 영화, 그리고 한국이 부럽다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공범자들>이라는 한국 다큐멘타리를 보고 감동했고 동시에 몹시 낙담하고 질투한 이유는, 일본의 경우 '우리는 보도의 자유를 권력과 싸워 획득한다, 획득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미디어 종사자에게도, 일반 시민에게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중"

어떤 이야기는 반성처럼, 어떤 이야기는 회한처럼 들렸다. 물론 다짐과 결의로 들리는 부분도 많았다.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되었지만 여전히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필자에게 다하지 못한 말은 작품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들려줄 것이다.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말이다.

*최승호 PD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26일) 밤 8시 25분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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