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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쉽] 쇼팽 콩쿠르는 공정한가요?

조성진 이을 한국인 스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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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쿠르의 콩쿠르, 최고 권위의 쇼팽 콩쿠르 본선이 쇼팽의 조국 폴란드에서 내일(현지 2일)부터 시작된다.  

직전 대회(2015)의 우승자가 바로 조성진이다. 
2015 쇼팽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중인 조성진
 쇼팽 콩쿠르는 5년에 한번 열린다. 올림픽보다 간격이 1년 더 길다. 원래 지난해 열렸어야 하는데, 코로나19때문에 1년 연기돼 이제 열리는 것이다. 이번 본선에는 7명의 한국인 연주자가 진출했다. 
[뉴스쉽] 2021 쇼팽 콩쿠르 본선진출 한국인 연주자들
쇼팽 콩쿠르는 폴란드 대통령이 직접 입상 메달을 수여할 정도로 폴란드의 국가적 축제이자 세계 음악계의 빅 이벤트다. 단일 악기, 그것도 단일 작곡가의 곡만을 평가함에도 쇼팽 콩쿠르는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사실 예술에 '최고'라는 수식어를 함부로 붙이는 게 경박해 보일 수 있지만, 쇼팽 콩쿠르 만큼은 이런 수식어에 토를 다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이 콩쿠르의 우승자는 다른 콩쿠르의 우승자와는 격이 다른 대접을 받으며 세계 무대에 서게 된다. 조성진 이전에도 마우리지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 전설들이 쇼팽 콩쿠르를 통해 거장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1점 테러' 이겨내고 우승했던 조성진 

하지만, 쇼팽 콩쿠르도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역사가 있다. 조성진이 우승하던 2015년에도 그랬다. 채점표가 공개되면서 뜻밖의 논란이 불거졌다. 10명이 진출한 결선에서 개별 심사위원이 줄 수 있는 만점은 10점이다. 조성진은 심사위원 대부분에게서 9점 이상의 고른 점수를 받았는데, 유독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필리프 앙트르몽만이 최저점인 1점을 줬다. (채점표 상단에 이름 약자인 PE로 표시됨.) 앙트르몽이 조성진의 스승과 불편한 관계였기 때문에 점수를 박하게 줬다는 설, 조성진의 쇼팽 해석이 자신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반감의 표시로 1점을 줬다는 설 등이 나왔다.
[뉴스쉽] 조성진 채점표 (2015 쇼팽 콩쿠르)
물론 예술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1~2점 차이로 결과가 갈리는 콩쿠르에서 극단적인 최저점은 "저 연주자를 떨어뜨리고 말겠다"는 악감정 없이는 설명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앙트르몽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우승 이후 조성진도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쿨하게 말하고 넘어갔다.

현재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쇼팽 콩쿠르지만,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역사가 있다. 조성진 채점표 논란은 논란의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다. 콩쿠르 초기에는 심지어 '정치'와 얽힌 경우가 많았다.
 

정치가 된 콩쿠르... 쇼팽 콩쿠르 수난사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89년까지 구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공산 국가였다. 역사적으로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됐고, 그 과정에서 소련군이 폴란드 민중을 학살하기도 했다. 전후 친소 정권이 들어섰지만, 반소 항쟁도 계속됐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49년 제4회 쇼팽 콩쿠르가 열렸다. 당시 폴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일했던 관료인 I.S. 쿠즈네초프가 소련 본국에 보고했던 전문에 논란이 잘 담겼다.

공산권 맹주 소련과 개최국 폴란드의 자존심 대결

소련은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소련 출신 피아니스트가 우승하기를 원했다. 정 안되면 공동우승이라도 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최종 결과가 집계 됐을 때, 1위는 폴란드 출신의 체르니-스테파우스카, 2위는 소련 출신의 벨라 다비도비치였다. 소련은 다비도비치가 1라운드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지만 폴란드 심사위원들이 2라운드부터 의도적으로 낮은 점수를 줬다며, 점수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23명 가운데 폴란드인이 10명이었다.

결국, 두 피아니스트에게 공동 1위를 수여하는 걸로 정리됐다. 쇼팽 콩쿠르 역사상 유일무이한 공동 우승자였다.
[뉴스쉽] 쇼팽 콩쿠르의 유일한 공동우승- 체르니 스테파우스카, 벨라 다비도비치
 1955년 5회 대회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이탈리아의 거장 아르투로 미켈란젤리가 심사위원이었다. 미켈란젤리는 당시 소련 출신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가장 뛰어난 연주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개최국 폴란드 출신 아담 하라셰비치의 우승이었다. 아쉬케나지는 준우승에 머물렀다. 미켈란젤리는 심사위원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항의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쉬케나지는 이후 자국 소련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우승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냉전 시대 동구권...환영받지 못한 미국 연주자들

 1960년 6회 대회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우승한 대회였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폴란드의 거장으로 살아있는 쇼팽처럼 추앙받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었다. 그는 폴리니의 연주에 대해 "기술적으로는 그의 연주가 여기 있는 그 어떤 심사위원들보다 낫다"고 하며 극찬했지만, 루빈스타인이 선호했던 다른 연주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루빈스타인은 콩쿠르 참가자들이 연주의 '기술'보다 한 발 더 나가길 원했던 것 같다.
1960년 명예심사위원장으로 나선 루빈슈타인. 쇼팽 연주의 20세기 최고 권위자였다.
 루빈스타인은 미국 출신의 미셸 블록의 연주를 좋아했지만, 그는 10위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폴란드는소련의 위성국가였다. 미국 출신 연주자들은 환영 받지 못했다. 루빈스타인 역시 심사위원 사퇴를 고민했지만, 이미 지난 대회에서 심사위원 사퇴 파동이 있었던 만큼 행동을 자제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폴란드 출신의 루빈스타인은 쇼팽 음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데, 그런 루빈스타인 입장에서 쇼팽을 기리는 자국의 대회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미셸 블록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특별상과 큰 액수의 상금을 수여하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밝히고 논란을 마무리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심사 시스템도 바뀌었다. 각 라운드 채점 결과를 심사위원들이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심사위원들 스스로 자신의 점수가 편향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만든 제도적 조치였다.

1965년 7회 대회는 그간 찬밥 신세였던 미국 연주자들이 강하게 저항했던 콩쿠르로 기록돼 있다. 당시 우승자는 훗날 피아노의 여제로 추앙받게 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였다. 아르헤리치의 우승 자체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콩쿠르 우승 즈음의 마르타 아르헤리치. 검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야생마같은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콩쿠르 과정 내내 폴란드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뒀던 소련과 이에 맞서는 초강대국 미국 간 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문제를 제기했던 건 미국 출신의 핀드레이 코크렐이었다. 그는 콩쿠르 심사위원들이 소련 출신 연주자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며 폴란드 정부에 공개 서한을 보내며 항의했다. 당시 소련 연주자는 5명 가운데 전원이 1라운드를 통과했지만, 미국 연주자는 8명 가운데 3명만이 통과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공정하게 심사한 결과"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진심인지 말실수인지 모를 이런 말을 남기는 바람에 의혹에 불을 지폈다.
"미국인이 쇼팽을 잘 연주하면, 앞으로 콩쿠르에서 계속 미국이 우승하지 않겠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심사 인정 못해! ... 관객들의 반란

1975년 9회 대회는 관객들이 직접 나선 사례로 기록돼 있다. 당시 우승자는 폴란드 출신의 크리스티앙 짐메르만이었다. 우리 시대 최대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거장 탄생의 신호탄이었지만, 의외의 논란이 있었다.
1975 쇼팽 콩쿠르 당시의 지메르만. 연주도 뛰어났지만 초상화속 쇼팽이 실제로 태어난 듯한 외모도 인기였다.

 당시 관객들은 캐나다 출신의 존 헨드릭슨의 드라마틱한 연주에 호의적이었다. 폴란드에서 폴란드 피아니스트가 우승했는데도, 폴란드 관객마저 존 헨드릭슨의 연주에 열광한 사람들이 많았다. 헨드릭슨이 결선 진출에 실패하자 관객들은 분노했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항의 시위가 벌어졌을 정도였다. 심사위원들은 성난 관객들의 마음을 추스르고자 결선이 열리기도 전에 헨드릭슨에게 '폴란드 음악 비평가상'을 수여했다. 에든버러 대학의 음악사 연구가인 리사 맥코맥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관객들의 항의는 짐메르만의 우승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강력했다"고 말했다.
 

콩쿠르 역사상 최대 스캔들... 이보 포고렐리치 사건

1980년 10회 콩쿠르는 쇼팽 콩쿠르 뿐만 아니라, 콩쿠르 역사상 가장 뜨거운 논란으로 기록돼 있다. 논란의 한복판에는 유고슬라비아(현 크로아티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가 있었다.

포고렐리치는 때로는 악보의 세부 지시사항을 과감히 무시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곡을 해석했다. 누구는 "포고렐리치가 쇼팽을 죽였다"고 불쾌해 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포고렐리치가 새로운 쇼팽의 시대를 열었다"며 환영했다. 의상부터가 파격적이었다. 가죽바지에 흰색 셔츠, 검은색 끈 넥타이를 걸치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콩쿠르 무대에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언론은 "포고렐리치가 쿠데타를 기획했다"고 표현했다.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가 아니라 끈넥타이를 매고 연주했던, 자유분방한 모습의 이보 포고렐리치
 포고렐리치가 1라운드를 통과하자, 심사위원이었던 루이스 켄트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포고렐리치 같은 사람이 2라운드에 진출하면 난 심사위원단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격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콩쿠르 무대에서 보기 힘든 앙코르까지 요구할 정도로 포고렐리치에 열광적이었다.

결국, 포고렐리치는 결선을 앞두고 3라운드에서 탈락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심사위원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사임해버렸다. 사실, 루이스 켄트너의 사퇴는 켄트너의 제자가 모두 중간에 탈락했기 때문에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아르헤리치의 사임은 파장이 대단했다. 1965년 콩쿠르 우승자이자,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피아노의 여제가 심사위원 자리를 걷어찼다는 소식은 콩쿠르의 신뢰도가 훼손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뉴스쉽] 1980 포고렐리치 파동 (쇼팽콩쿠르, 아르헤리치, 이보 포고렐리치)
 아르헤리치는 파격적인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보수적인 심사위원과 함께 섞이기 싫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르헤리치는 그날 바로 폴란드를 떠나버렸다. 포고렐리치도 콩쿠르 직후 "일부 심사위원들은 쇼팽이 항상 똑같기를 원한다", "(나의 탈락으로) 쇼팽은 그의 작품이 재해석될 기회를 거부당했다"고 말하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관객들의 저항은 유례를 찾기 어려웠다. 포고렐리치를 결선에 진출시켜야 한다며 거리시위까지 열렸다. 폴란드 음악계는 어물쩍 넘어갔다가 콩쿠르가 존폐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주최 측은 부랴부랴 포고렐리치에게 특별상을, 바르샤바 음악협회는 회장 개인 자격으로 역시 특별상을 줬다.
격정에 차서 청중의 환호에 답하는 이보 포고렐리치 (1980)
 폴란드 음악평론가 75명은 그가 콩쿠르 역사상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아니스트라고 입을 모으며 "이보 포고렐리치 : 우리의 수상자"라는 상장까지 수여했다. 그는 입상자가 아니었지만 콩쿠르 갈라 콘서트에도 참석했다. 뉴욕 타임즈는 당시 분위기를 락 콘서트에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1,000석 규모의 공연장 밖에는 최소 3,000명이 몰려들었다. 관객들은 몰아치는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무대 뒤의 문이 부서졌고, 100개의 문 앞에 배치된 보안요원들이 홀 안으로 밀려들었다. 포고렐리치가 무대 위로 걸어가자 청중이 열광했다. "이보! 이보!" "
- 뉴욕타임즈 <Yugoslav pianist stirring music world: Not thinking about the music> 1980년 11월 1일자

 당시 우승자는 베트남 출신의 당 타이손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딛고 우승한, 첫 아시아 출신 우승자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성도 뛰어났다. 하지만 모든 이목은 포고렐리치에게 집중됐다. 이듬해 포고렐리치는 뉴욕 카네기홀에 데뷔했고, 도이치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으며 수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우승자보다 더 큰 부상을 받은 거나 다름 없었다.
1980 쇼팽콩쿠르를 우승한 베트남 출신의 당 타이 손. 이보 포고렐리치가 대중의 관심을 독차지해 손해를 봤지만, 세련되고 아름다운 연주로 꾸준히 팬을 늘려왔다. 올해 쇼팽콩쿠르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포고렐리치에게는 늘 콩쿠르 역사상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콩쿠르 13년이 지난 뒤 포고렐리치는 LA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승자는 이미 결정돼 있었다. 소련은 대회를 몇 달 앞두고 베트남 수상자를 만드는 게 정치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의 참가는 환영받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소련 배후론' 의혹을 제기했다.

1980년 엄청난 폭풍이 지나간 뒤, 쇼팽 콩쿠르의 공정성 논란은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당시의 파장이 워낙 커서, 주최 측 입장에서는 콩쿠르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공정성 시비를 없애지 않으면 안됐을 것이다. 80년대 탈냉전과 더불어 소련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점, 강대국들이 콩쿠르를 통해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려던 ‘문화 제국주의’가 약화된 점도 영향을 미쳤던 걸로 보인다. 냉전 이후 쇼팽 콩쿠르는 '쇼팽답게' 연주한 피아니스트들을 수상시키겠다는 목표 의식도 명확해졌다.

 하지만, 더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 생긴다.

 무엇이 '쇼팽다운' 연주인가.

'쇼팽 다움'이란 무엇인가

'쇼팽다운 연주'는 늘 변했다. 심지어 19세기 전반기 사람인 쇼팽(1810–49)이 스스로 선호했던 쇼팽다움과, 지금 우리 시대가 원하는 쇼팽다움은 다를 수 있다.
귀족의 살롱에서 연주하는 쇼팽, 큰 음량이 필요없는 작은 공간이므로 피아노 뚜껑(음향판)이 닫혀 있다. 헨릭 시에미라츠키 그림.
 가령, 쇼팽은 귀족의 저택 같은 소규모 공연장을 선호했다. 밀도 높은 음색을 위해 피아노 뚜껑을 닫고 연주하는 걸 즐겼다. 쇼팽은 피아노 제작사 '플레옐'에서 만든 피아노를 좋아했는데, 지금 피아노와는 많이 다르다. 음이 툭툭 끊어지고, 상대적으로 잔향이 약하며, 소리도 작아 다이내믹이 덜하다. 쇼팽 자신의 녹음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의 제자 계보를 따라가보면 연주 경향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모리츠 로젠탈(1862-1946). 쇼팽의 제자의 제자. 요절한 쇼팽과 달리 장수한 리스트에게서도 배웠다.
 모리츠 로젠탈(Moriz Rosenthal)은 쇼팽의 제자인 카롤 미쿨리에게 배웠다. 쇼팽과 같은 폴란드 출신이다. 1862년생인 로젠탈이 1935년에 남긴 쇼팽 소나타 녹음이 있다.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는데, 에너지와 감정의 진폭보다는 간결한 우아함이 느껴진다. 19세기 살롱 음악회에선 이렇게 쳤겠구나 하는 느낌과, 요즘 콩쿠르에서 이렇게 치면 떨어질텐데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대규모 공연이 일반화되고, 깊은 잔향과 강력한 사운드를 낼 수 있도록 피아노 기술이 발전하면서, 쇼팽다움 역시 변모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연주 스타일도 달라졌다. 대중음악도 어쩔 때는 록이, 어쩔 때는 R&B가, 또 어쩔 때는 힙합이 주류가 됐듯 말이다.

쇼팽다운 연주가 이렇게 변한다면, 도대체 쇼팽 콩쿠르는 무엇을 쇼팽다운 연주로 규정하고 심사하며 평가할까. 쉽게 말해,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하는가.
2015 쇼팽 콩쿠르, 결선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는 조성진
 쇼팽 콩쿠르에 참여하는 연주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쇼팽다움'을 제시하고, 서로 경쟁한다. 가령, 2015년 콩쿠르 우승자 조성진의 연주는 건축학적으로 신중히 설계된, '계획적인 쇼팽'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의도한 바를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수많은 음표 중에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음표를 뽑아내 멜로디 라인을 살리고, 강약 대비도 명확하다.

당시 조성진은 결선에서 17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2명의 심사위원에게 만점인 10점을 받았는데, 3위에 입상했던 미국의 케이트 리우는 3명의 심사위원에게 10점을 받았다. 10점은 한 심사위원당 단 한 명의 연주자에게만 줄 수 있다. 케이트 리우는 곡이 느려지더라도 시간을 들이며 섬세하게 접근하는 '명상적인 쇼팽'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를 지지하는 심사위원만큼이나 이에 동의하지 않은 심사위원도 있었다는 걸 방증한다.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2010 쇼팽 콩쿠르)
 2010년 콩쿠르 역시 비슷했다. 당시 우승자 율리아나 아브제예바는 쇼팽을 처연하고 고통스럽게 연주한다. 그녀의 소나타 2번 연주는 꺽꺽 울음을 삼키듯 순간순간 머뭇거리는 모습이 묘한 아픔을 준다. 준우승을 한 잉골프 분더는 우아하고 침착하게 쇼팽을 끌어갔다. 타건이 참 건강한 연주자였다. 당시 분더가 우승했어야 했다며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지만, 심사위원들이 고통스러운 쇼팽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쇼팽 콩쿠르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기교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를 골라내는 자리가 아니다. 연주자들이 각자의 해석으로, 자신 만의 쇼팽다움을 제시하면 심사위원들은 그 해석을 협의하고, '판정'을 내린다. 당연히 '쇼팽다움'의 정답지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시대 최고의 쇼팽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리 시대 최고의 젊은 연주자들의 '경쟁'을 지렛대 삼아, 우리 시대가 지향하는 쇼팽다움을 모색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아우른다.

결국, 쇼팽 콩쿠르는 단순히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을 뽑는 경연대회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쇼팽다움을 협의하고, 종국적으로는 합의하는 '학술대회'에 가깝지 않을까.

2021년 쇼팽 콩쿠르, 여기서 합의될 '올해의 쇼팽다움'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쇼팽콩쿠르가 열리는 바르샤바 내셔널 필하모닉 홀.
추신) 쇼팽협회에서는 1라운드부터 결선까지 콩쿠르의 모든 과정을 유튜브로 생중계하고 있다. 채팅방도 운영한다. 음악 애호가들이 채팅방에 모여 참가자들 연주를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채팅은 영어로 해야 한다. 영어가 아니면 쇼팽협회에서 계속 영어를 쓰라고 닦달한다. 그렇더라도 가서 한국인 참가자들을 응원해 보자.
(쇼팽협회 유튜브 채널 : https://www.youtube.com/c/chopininstitute)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 장선이 기자, 김휘란 에디터 / 디자이너 : 명하은, 박정하)    

# 이경원 기자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세요.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08/clips/1835
[뉴스쉽] 이경원 기자, 팟캐스트 커튼콜, 쇼팽 콩쿠르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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