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수면 아래 영 케어러…인식하고, 조사하고, 지원해야.

준비 안 된 바통 터치-영 케어러③

저출산·고령화와 비혼과 만혼, 이혼 증가가 맞물리면서 한국에서 늙고 병든 부모나 조부모를 홀로 부양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혼자 부양 부담을 떠안느라 학업을 중단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영국과 호주 등에선 이런 청년들을 '영 케어러(Young carer)'로 규정하고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영 케어러'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돼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국의 영 케어러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취재해봤습니다.
 

수면 아래 영 케어러…인식하고, 조사하고, 지원해야.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부양 부담을 더 이상 영 케어러 개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양 부담을 사회가 나눠가지고 영 케어러들이 본인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시간적,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의 말을 토대로 영 케어러들을 위한 지원 대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정리해보았다.

● 조기현 "사회가 영 케어러의 존재부터 인식해야"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③)

스무 살 때부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부양해 온 경험을 <아빠의 아빠가 됐다>는 책으로 쓴 조기현 작가. 조 작가는 한국 사회가 영 케어러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중앙부처부터 말단의 동 주민센터까지 영 케어러에 대한 개념이 잡혀있지 않아서, 영 케어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주민센터에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학업과 생계유지와 부양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는 건 40대, 50대, 60대 자녀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10대, 20대가 그런 일을 한다는 걸 생각 자체를 못하는 거죠. 그러니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도 모르는 거고요."

사회적으로도 영 케어러에 대한 인식이 확립돼 있지 않다 보니, 또래들 사이에서조차 고립되기 일쑤였다.
 
"친구들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부양하면서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 나이에 그런 친구가 한 명도 없으니까. 또래 집단 안에서 이런 문제를 상의하거나 정보를 나눌 수도 없었죠. 오히려 다른 가정에서는 '그런 친구랑 놀지 말아라'는 얘기도 하고."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③)

영 케어러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일을 막고, 부양에 대한 정보도 나누기 위해 조 작가는 영 케어러 자조모임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책에 '나도 죽고 아버지도 끝내고 싶었다'는 얘기를 썼는데, 다른 영 케어러가 그 얘기를 보고 너무 공감이 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부양 부담이 극심해지면 그런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스스로 너무 죄책감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자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데 위로를 받았다는 거죠. 자조 모임을 하면 서로 정서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정보도 나눌 수 있을 테니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거예요."

실제 영국에서는 2000년부터 매년 6월 '영 케어러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영 케어러를 위한 교육권 보장정책>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 김민서) 매년 1천5백명 정도의 영 케어러가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정기적으로 소통하는 창구를 마련한 것이다. 나아가 영국의 일부 지방정부에서는 이런 영 케어러들을 담당하는 기관을 만들어 워크숍을 개최하고 있다고 하니 한국 정부에서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 허윤정 "영 케어러가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부양 부담을 사회가 나눠가져야"
허윤정 아주대 의대 교수는 영 케어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야 할 10대와 20대에 부모나 조부모를 부양하느라 학업과 취업에 실패하면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부양을 하느라 나의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를 놓치는 거예요. 더 큰 문제는 그걸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시기에 돈을 준다거나, 그 시기가 지난 뒤에 무슨 지원을 한다고 해도 그 손해를 만회할 수가 없어요."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③)

또 부양은 영 케어러 개인의 효심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부모나 조부모를 이렇게 극진히 모시다니 너 참 효자다', 이렇게 부양을 개인에게 떠넘기면 안 돼요. 그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영 케어러들은 부양을 자기의 의무로 인식하게 되고, 그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양 부담을 사회가 나눠 가져야 하는 겁니다. 영 케어러들에게 본인들의 인생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고, 부양은 사회가 담당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당장의 현금 지원도 중요하지만, 영 케어러들이 자신의 삶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요양보호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가요양 서비스나 데이케어센터 같은 데를 영 케어러들이 이용할 수 있게 대폭 확대해 줘야 해요. 요양 보호사들을 영 케어러들에게 우선적으로 배치하거나 하는 방식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허 교수는 영 케어러에 대한 지원 대책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으면, 결국 그 부담은 사회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 케어러들이 자기 인생을 갈아 넣어서 사회가 해주지 못하는 부양을 본인들이 하고, 자기 인생을 소실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영 케어러들은 사회에서 낙오하게 되고, 그 낙오자를 보호하기 위해 또다시 사회는 세금을 갈아 넣어요.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굉장히 시급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 석재은 "돌봄 크레딧으로 영 케어러들의 미래에 대한 부담 덜어줘야"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시 영 케어러들이 과중한 부양 부담에 시달리며 자신의 노후를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장기요양보험에서 하고 있는 돌봄은 요양보호사가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 가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오는 거예요. 하루 24시간 중에 서너 시간을 제외한 그 나머지 시간은 모두 영 케어러들이 부양을 부담하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거예요."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③)

그러면서 사회가 나눠가져야 할 부양 부담을 영 케어러들이 떠안고 있는 만큼, 이들의 미래에 대한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본인의 경제생활 대신 부양을 하다가 본인의 노후준비를 하지 못해 빈곤한 상태로 전락하는 걸 막아줘야 합니다. 독일의 연금제도에 간병 크레딧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 국민연금에 아이를 낳으면 그만큼 국민연금 가입기간을 인정해주는 출산 크레딧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부양을 한 기간을 연금 가입기간으로 인정해주는 거죠."

● 김성주 "실태 조사가 최우선…지원 대책 제도화 시급"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은 우선 가장 급한 건 실태 파악이라고 강조했다. 영 케어러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파악해야 효과적인 지원 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이나 호주의 영 케어러가 수십만 명이라면 한국은 그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지금은 영 케어러가 몇 명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실태조사는 교육부를 통해 학교 현장에서 할 수도 있고, 복지부와 지자체의 복지망을 통해서 할 수도 있겠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정확하게 실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지원 정책을 만들고 제도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③)

김 의원은 우선 영 케어러에 대한 법적 근거와 정의부터 정립해나가겠다며, 이에 근거한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법령을 정비하고 예산을 확보해, 영 케어러에 대한 상담과 가사지원, 학자금 지원 등의 지원 정책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③)

80대 치매 할머니를 부양하는 00년생 연주 씨는 자신의 상황을 바통 터치에 비유했다. 할머니와 부양의 바통 터치를 했는데, 아직 자신이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얘기였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영 케어러들은 대부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부양과 학업, 생계를 병행하다가 지쳐서 지원을 요청해도 정부는 이들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결국 영 케어러들은 빈곤에 빠져 결혼과 출산, 자신의 미래까지 포기하고 있다. 미래를 포기하는 청년들이 늘어난다는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부양의 바통을 넘겨받을 준비가 안 된 건 영 케어러가 아닌 우리 사회일지도 모르겠다. 영 케어러들을 위한 대책이 시급하고, 또 절실하게 요구된다.  

▶ 영케어러① [취재파일] 부양 부담→학업 중단→취업 곤란→빈곤…영 케어러를 아십니까?
▶ 영케어러② [취재파일] 영케어러 49만 영국, 23만 호주 '적극 지원'…한국은 '나 몰라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