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영케어러 49만 영국, 23만 호주 '적극 지원'…한국은 '나 몰라라'

준비 안 된 바통 터치-영 케어러②

저출산·고령화와 비혼과 만혼, 이혼 증가가 맞물리면서 한국에서 늙고 병든 부모나 조부모를 홀로 부양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혼자 부양 부담을 떠안느라 학업을 중단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영국과 호주 등에선 이런 청년들을 '영 케어러(Young carer)'로 규정하고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영 케어러'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돼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국의 영 케어러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취재해봤습니다.
 

영케어러 49만 영국, 23만 호주 '적극 지원'…한국은 '나 몰라라'

가족 부양 부담을 떠안은 청년들, 영 케어러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과 호주 정부는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을 사회 안전망의 한 축으로 인정하고, 이들이 부양 부담 때문에 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다. 일본도 올해 처음 실태조사를 벌였다. 영국과 호주, 일본의 영 케어러들은 어떤 상황이고, 정부는 이들에 대해 어떤 지원을 하고 있을까.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②)

● 영 케어러 49만…지원법 만들고 직접 만나는 영국 국회
영국에서는 영 케어러를 "장애, 질병, 정신질환, 약물, 알코올 문제를 가진 가족이나 친척을 돌보는 18세 이하 청소년"으로 정의하고 있다. 10년 주기로 이뤄지는 영국의 인구조사 결과, 영 케어러는 2011년 49만 1천여 명으로 집계돼 2001년보다 8만 7천 명이 증가했다. (국회도서관. 2021, 7.13 <영 케어러 지원-영국, 호주의 사례> 인용.)

영 케어러가 50만 명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자, 영국 국회는 이들에 대한 지원 내용을 담은 법안을 만들었다. <2014년 아동가족법/Child and Families Act 2014>이다. 이 법안 96조에 따르면 영 케어러는 자신의 요구에 대해 평가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정부에 요구하면, 정부는 이를 평가하고 지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의원들은 법안 만들기에 그치지 않고 영 케어러들을 직접 만나기 위한 통로도 만들었다. 영 케어러 지원과 서비스 개선을 논의하기 위한 '영 케어러 의원협회(All-party Parliamentary Group for Young carers)'가 지난해 초 설립됐다. 영 케어러들이 의원들을 직접 만나서 자신들이 겪는 문제와 정책적 지원방법을 논의할 기구가 생긴 것이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②)

2019년부터는 영 케어러에 대한 복지 급여도 지급되고 있다. 영 케어러들이 사회 안전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부양 부담으로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누리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막겠다며 스코틀랜드 정부가 보조금을 신설한 것이다. 이 덕분에 16세~18세 사이의 영 케어러들은 연간 3백파운드, 우리돈 48만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됐다.

● 23만 영 케어러 호주, 학비 보조하니 부양 부담 줄고 성적도 올라
호주는 장애나 신체/정신질환, 약물중독, 고령의 가족이나 친구를 돌보는 25세 이하 청년을 영 케어러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2017년 기준 23만 5천여 명으로 집계됐다. 호주 정부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2010년 케어러인정법(Carer Recognition Act 2010)>을 만들었다. 이 법에서는 장애인과 심신질환자, 노인에게 일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영 케어러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데, 특히 "영 케어러는 다른 아동 및 청소년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아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②)

이에 따라 2015년부터 영 케어러 학비보조금 프로그램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올해 기준 영 케어러 1명 당 연간 3천 호주 달러(255만 원)가 지급됐다. 영 케어러들이 부양 부담 때문에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상당한 성과를 냈다. 학비 보조를 받는 영 케어러 중 37%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이들 중 55%가 보조금을 받은 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거나 시간을 줄였다고 응답했다. 특히 학업성취도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학비 보조금을 받은 영 케어러들 중 76%가 성적이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도서관. 2021, 7.13 <영 케어러 지원-영국, 호주의 사례> 인용.) 부양 부담이 학업 중단과 취업 실패, 빈곤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 올해 첫 실태조사 나선 일본…한 반에 한명 꼴 영 케어러.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올해 처음 영 케어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전국단위 실태조사에 나섰다. 올해 4월 발표된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약 6%,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약 4%가 영 케어러로 확인됐다. 이 두 학년에서만 영 케어러가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중학교 2학년 17명 중 1명, 고등학교 2학년 24명 중 1명꼴이다. 가족을 부양하는 학생이 한 반에 한명씩 있는 셈이다. 이들이 가족 돌봄에 쓰는 시간은 1일 평균 4시간이며, 7시간 이상도 1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②)

이런 조사 결과에 따라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영 케어러 지원에 대해 검토해 나갈 생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곧이어 네 가지 후속 대책도 발표됐는데, ①조기 발견, 조기 파악. ②상담 지원 ③가사 육아 지원 ④돌봄 서비스 제공이 주요 골자였다. 아직 확보된 예산은 없으며 내년도 예산 요구에 관련 사업비를 반영할 방침이라고 한다.

일본 내에서 영 케어러 지원에 가장 적극적인 지자체는 사이타마 현이다. 2020년 3월 전국 최초로 영 케어러를 지원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했는데, 학교와 교육위원회가 영 케어러라고 생각되는 아동의 생활을 확인할 것을 의무화 하고 상담하고 지원기관을 연결해주도록 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영 케어러를 지원하여 사회적 고립을 방지하겠다는 목적이다.

● 한국 정부는…"우리 일 아니다" "계획 없다"
인구가 6천8백만 명인 영국의 영 케어러가 49만여 명, 인구가 2천5백만 명인 호주의 영 케어러는 25만 명으로 집계됐으니, 인구 5천만 명의 한국 역시 적잖은 수의 영 케어러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영 케어러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념이 없으니 실태조사와 지원 정책도 없다. 정부 부처에 영 케어러에 대한 실태조사 계획과 지원 대책을 물었지만 '우리 일이 아니다'(여성가족부), '계획이 없다'(보건복지부)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②)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②)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 한국 사회도 이미 부양 부담과 빈고에 시달리는 영 케어러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출산·고령화, 이혼, 비혼, 만혼의 증가라는 시대적 흐름이 맞물리면서 혼자 부양 부담을 떠안은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2와 고2 학급당 한 명 꼴로 영 케어러가 있다는 일본 사례에서 보듯, 한국 영 케어러들의 상당수가 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학생 업무를 담당하는 교육부와 청소년 정책을 담당하는 여성가족부, 복지대상자를 찾아내는 보건복지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책임감을 갖고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 영케어러③ [취재파일] 수면 아래 영 케어러…인식하고, 조사하고, 지원해야.
▶ 영케어러① [취재파일] 부양 부담→학업 중단→취업 곤란→빈곤…영 케어러를 아십니까?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