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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부양 부담→학업 중단→취업 곤란→빈곤…영 케어러를 아십니까?

[취재파일] 준비 안 된 바통 터치-영 케어러①

저출산·고령화와 비혼과 만혼, 이혼 증가가 맞물리면서 한국에서 늙고 병든 부모나 조부모를 홀로 부양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혼자 부양 부담을 떠안느라 학업을 중단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영국과 호주 등에선 이런 청년들을 '영 케어러(Young carer)'로 규정하고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영 케어러'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돼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국의 영 케어러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취재해봤습니다.
 

부양 부담→학업 중단→취업 곤란→빈곤…영 케어러를 아십니까?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①)

● 부양 부담이 학업 중단으로…80대 치매 할머니 부양하는 00년생 연주 씨
연주(가명) 씨를 두 번째 만나기로 한 날, 연락이 닿지 않았다. '00년생 / 80대 치매 할머니 부양 / 편의점 야간 알바로 생계유지 / 통장 잔고 2580원 / 기초생활수급비 일주일 뒤 입금'…처음 만난 날 취재하면서 적어둔 메모가 눈에 밟혔다. '무슨 일이 있나'하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데 연락이 왔다. 어젯밤에 택배회사 물류창고에서 일을 하고 새벽 4시에 퇴근하는 바람에 늦잠을 잤다고. 일당이 10만 원이라 수급비가 들어오는 일주일 뒤까지 버틸 생계비는 해결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밝았다.

할머니는 연주 씨를 돌부터 맡아 키웠다. 남편과 이혼하며 연주 씨를 떠난 엄마를 대신해서였다. 학교 입학식 때마다 손녀를 백화점에 데려가 좋은 옷을 사 입혔고, 70대의 나이에도 손녀의 공부를 직접 챙겼다. 원더우먼 같았던 할머니는 5년 전, 연주 씨의 아빠가 갑자기 사라지면서부터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날짜와 계절을 인지하지 못했고, 아들을 찾겠다며 동네를 배회하는 일이 반복됐다. 고1. 아직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에 연주 씨는 할머니의 보호자가 됐다.
 
"그때까지 할머니가 저를 보살펴 주셨으니까 제가 할머니를 보살펴드릴 차례가 된 거죠. 한마디로 바통 터치죠."

생계를 책임지던 아빠의 부재는 생활고로 이어졌다. 대학에 가기 위해 모아둔 적금 4백만 원을 깨야했다. 다행히 연주 씨가 고2 때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생계비를 지원받게 됐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울 상위권 대학에 입학했지만 할머니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연주 씨의 몫이었다. 요양보호사를 부르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치매 5급을 받으셨어요. 등급이 낮아서 요양보호사를 부르려면 한 달에 15만 원이 들어요. 저희 입장에서는 크게 부담이 되죠."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①)

집에서 혼자 할머니를 돌보던 연주 씨는 결국 대학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할머니를 부양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빨리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주 씨는 학교를 휴학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학원에 가자니 학원비는 너무 비쌌고, 할머니를 집에 두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연주 씨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24시간 직접 돌보면서 인터넷 강의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스물두 살, 2인분의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시기가 너무 빨리 와버렸다는 연주 씨.
 
"할머니가 그동안 저한테 해주신 게 너무 많아서, 제가 보답을 해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죄송하죠."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①)

● "더 잘 모시고 싶은데…취업이 걱정이에요"
또 다른 영 케어러인 25살인 종민(가명) 씨 형제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종민 씨가 5살, 동생이 8개월 무렵 사업에 실패하면서 이혼한 부모는 형제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연락을 끊었다. 20년 가까이 종민 씨 형제를 키워준 할아버지가 2018년 암으로 숨지고, 비슷한 시기 공공근로에 나갔던 할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하면서부터 종민 씨 형제가 할머니의 보호자가 됐다. 종민 씨는 지방의 대학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번 돈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세 가족의 생계를 꾸리고 있다.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①)

25살 나이에 생계를 책임지게 된 종민 씨의 가장 큰 고민은 취업이다. 아직 학생인 동생과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공부와 취업 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희한테 쏟은 시간을 생각하면 힘들지는 않아요. 두 분의 노후를 저희한테 갖다 바치셨으니까. 할머니를 더 잘 모시고 싶은데 미래가 좀 막막하기는 해요.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일하면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하면 공부하고 취업 준비할 시간이 많이 부족하죠."

● 20년 부양이 남긴 생활고…결혼까지 포기.
올해 40살인 윤상 씨는 20년 전부터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홀어머니를 혼자 부양했다. 20대 때부터 홀어머니를 부양하느라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윤상 씨.
 
"어머니 모시느라 경제상황도 좋지 않았고, 공부는 고등학교까지만 하게 됐어요. 자동차 정비도 해보고, 아이스크림 영업도 해보고, 김도 팔아봤죠."

닥치는 대로 일을 해봤지만 혼자서 어머니를 부양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4년 전, 김을 팔러 다니다가 교통사고가 나면서 생활고까지 겪게 됐다. 2년 넘게 일을 못하게 되자 당장 생활비가 떨어진 것.
 
"직장이 없으니까 은행에서는 대출이 안 되더라고요. 4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서 생활비로 썼어요. 2천만 원정도 빚이 남았죠. 지금도 매달 50만 원씩이 이자로 나가요."

어머니 부양과 생활고에 윤상 씨는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가장 슬펐던 일은 결혼을 포기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말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는데, 돈도 없고, 제가 장가를 가면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도 없어서…결혼을 포기하게 됐죠."
 
윤나라 취파용 (영케어러①)

● 부양 부담과 빈곤의 악순환…포기가 익숙해진 영 케어러들.
부양 부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연주 씨, 취업 걱정에 미래가 막막한 종민 씨, 빈곤에 빠져 결혼까지 포기한 윤상 씨. 세 사람은 영 케어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부양 부담이 학업 중단으로 이어지고, 이 때문에 취업이 어려워져 생활고에 빠지게 되고, 결혼과 본인의 노후 준비까지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심형래 관장은 "생애 주기적으로 봤을 때 10대와 20대는 학습과 취업으로 자신의 자립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인데, 부모나 조부모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양 부담이 빈곤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어주기 위해 해외 복지 선진국에선 진작부터 영 케어러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이들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다.

▶ 영케어러② [취재파일] 영케어러 49만 영국, 23만 호주 '적극 지원'…한국은 '나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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